"따져 생각해서 어떤 문제가 풀릴 때 기쁨이 뒤따르죠"
철학은 근본적 탐구와 통찰 중시
진정한 기쁨, 가치 있는 것에서 난다
레비나스 철학, 내면성 넘어 외재성
기쁨·즐거움 타자적인 요소 좌우

부산대학교 철학과는 지난 5일 오후 인문관 201호에서 문성원 교수(사회철학) 퇴임기념 콜로퀴엄을 개최했다. 이영철 전 철학과 교수 등 철학과 교수와 학부생, 대학원생과 제자들, 스터디원들과 문 교수와 인연을 맺은 이들이 강연장을 가득 채웠다. 철학 강연에 기대감으로 진지함 속에서 약간의 흥분된 분위기였다.
콜로퀴엄은 4∼6시까지 진행됐다. 발표시간은 1시간, 열정 가득한 질의응답이 1시간 이어졌다. 김도형 선생님(레비나스 박사, 인제대 강사)이 주도해서, 제자들이 쓴 인사말과 영상편지를 PPT로 만들어 함께 보는 시간도 가졌다. 레비나스화 된 문 교수에 대한 감사와 애정이 듬뿍 담긴 영상 PPT를 보면서 눈시울을 적시는 이들이 많았다.
콜로퀴엄 발표문 내용이 현시대에 새겨들을 석학의 식견이 담겨 있어 다 담아서 전하고 싶으나 지면의 한계상 아쉬움이 크다. 퇴직 축하 고별 강연 콜로퀴엄 주제는 '철학의 기쁨'이다. 긴 내용을 다 담지 못하고 우리가 현시대에 독자들과 생각해 봤으면 하는 '따지는 기쁨'과 '레비나스 철학의 사유', '가치'를 중심으로 발췌하고 편집했음을 밝힌다.
슬픔과 마찬가지로 기쁨도 우리 삶에서 나름의 역할과 기능을 할 따름이라고 생각하지요. 슬픔이 좌절이나 상실에서 비롯하는 느낌이라면, 기쁨은 유혹이나 보상으로 생겨나는 느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슬픔으로 가득 찬 삶이 지속 불가능하듯, 기쁨으로만 채워진 삶도 성립하기 어렵겠지요. 극락(極樂)이나 천국도 실현되기 전에만 매력적이지, 실현되고 나면 극고(極苦)의 지옥과 같이 곧 무의미해질 겁니다. 이런 점에선 절대적 기쁨의 상태를 상정하는 것 또한 '둠스데이 머신'의 거울상과 같다고 할 수 있겠어요.
철학에서 중시하는 것은 근본적인 따짐
느낌은 중요하지만 완전치 않은 기능이죠. 느낌이 좋지 않지만 인정해야 하는 사태도 있고, 느낌이 나쁘지만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런 건 따져 보고 정하는 경우가 많지요. 철학에서 중시하는 것이 바로 이 따짐, 그것도 근본적인 따짐입니다. 하지만 따짐이라고 해서 완전한 것도 아니고, 또 따짐이 느낌보다 꼭 나은 것도 아니지요. 확실하게 따질 수 있다면야 따져서 정하는 편이 낫겠으나, 따져도 잘 모르겠을 때는 다소 막연하더라도 느낌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은 그래도 따지려고 듭니다. '철학의 기쁨'이라는 제목을 내걺으로써 기쁨에 대해 따지고 논하겠다기보다는 따지는 기쁨에 대해 말하거나 그러한 기쁨을 드러내 보겠다고 예고한 셈입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그런 일을 아주 부분적으로, 주로 저의 개인적 경험을 쫓아서 시도해 볼 생각이에요. 하지만 과연 따짐이 기쁘고 즐거울 수 있을까요? 따지지 말라, 다들 싫어한다, 외롭지 않으려면 따지지 말고 대충 넘어가라, 주변에 사람이 사라진다… 이런 얘기는 더러 들어보셨죠? 모름지기 철학자는 외로운 법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따져 생각하는 일은 귀찮고 골치 아픕니다. 그런 만큼 간혹 기쁨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애써 이 고생을 하겠습니까? 물론, 따지는 것 자체가 기쁘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긴 어렵죠. 따져 생각해서 어떤 문제가 풀릴 때, 또는 적어도 어떤 진전이 있을 때, 기쁨이 뒤따른다는 얘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왕의 지식과 사고방식을 익히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이 기쁜 일이라고까지는 말하기 힘들겠지요. 하지만 따져 생각하는 일로 성과를 거두고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건이죠.
철학공부의 기쁨은 발견과 통찰에 있다
제게 철학 공부의 기쁨은 작으나마 발견과 통찰에 있었던 것 같군요. 통찰이라고 해서 어떤 대단한 원리나 개념을 안출해 내는 데 이른 것은 아니고, 당시 관심이 있던 문제에 대해 다른 이들이 이미 내놓은 해법을 뒤늦게 이해하는 정도였으나, 그런 순간의 짜릿함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에 힘입어서 저는 소외라는 주제를 좀 더 파고들었지요. 어떻든 소외 문제와 관련된 저의 철학적 앎의 경험과 기쁨은 밖으로 확산돼 발전하는 데 이르진 못한 셈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꽤 큰 영향을 미쳤지요. 저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맑스와 헤겔 공부를 계속했으니까요. 소외론이 그런 공부의 주된 이유였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 단초 가운데 하나였음은 분명합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철학자는 실질적 지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지식의 경계에 걸려 넘어지고 다치는 존재였거든요. 철학자가 통용되는 지식의 영역 너머에 사유의 발길을 뻗치는 한, 이것은 어쩌면 불가피하고 당연한 모습일지 모릅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라는 라캉의 유명한 표현은 뒤집어 보면 방황하지 않는 자들은 속는다는 뜻이 됩니다. 때로는 헤매는 것이 불가피하고 또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요. 속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가 따져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면, 철학자들은 어쩌면 끊임없이 방황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일 거예요. 그렇다고 줄곧 헤매기만 할 수는 없겠지요. 더러 머물러서 여정을 추스를 쉼터나 정박지 같은 곳이 있어야 할 겁니다. 제가 한동안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잠정적으로 닻을 내린 곳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잠정적'이라는 말이 좀 무색하다 싶긴 합니다. 체류한 지가 어언 스무 해를 넘겼으니 말이죠.
레비나스를 택한 이유

왜 하필 레비나스냐 하는 문제는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신자유주의의 횡포를 비판하고 저지할 윤리적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는 것이었지요. 개인적인 기질이나 취향에 따른 선호도 영향을 주었을 거예요. 제가 운 좋게도 교수 자리를 얻어 부산대에 내려온 다음에도 대학원생들 몇몇이 제게 바랐던 것은 들뢰즈를 공부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한동안 들뢰즈를 함께 읽었죠. 하지만 들뢰즈에 매혹되거나 동화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들뢰즈가 기성의 형식을 거부하고 변화를 내세우긴 하지만 그에 따르면 그런 변화의 이념은 이 세계의 내재성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게는 오히려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군요. 들뢰즈 독회 이후, 역시 학생들의 요구로 함께 읽은 스피노자 저작들에서도 그리 큰 감흥을 얻지 못했는데, 그것 또한 유사한 면 때문이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벤야민의 저술들이 제게 꽤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아마, 그의 철학에는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초월성 또는 외재성에 대한 강조가 깃들어 있었던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오늘의 주제인 '철학의 기쁨'에 초점을 맞춰 봅시다. 물론 들뢰즈나 스피노자를 공부하는 일이 기쁨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처럼 출중한 철학자의 사유를 탐구해 나가다 보면, 심심찮게 경탄의 기쁨을 맛보게 되지요. 더구나 스피노자와 들뢰즈는 기쁨을 중시하는 철학자들이 아닙니까. 스피노자는 우리의 존재 능력이 증가하거나 강화될 때 느끼는 감정이 기쁨이며, 더 큰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삶의 윤리적 목표라고 하지요. 또 들뢰즈도 기쁨을 긍정하는 이런 스피노자의 철학을 높이 평가하고 자기 철학의 중요한 자양분으로 삼았죠. 들뢰즈(가타리)의 욕망 개념에도 이와 같은 기쁨에 대한 이해가 스며있다고 보입니다.
▶스피노자- 기쁨이 성립하는 요건 가운데 '주체'의 비중 과도하게 설정
우리가 기쁨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실제로 얼마나 기쁨을 누리느냐가 꼭 합치하는 건 아니죠. 이것은 기쁨의 본성상 불가피한 일이라고 보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바라는 바를 늘 뜻대로 성취할 순 없지요. 실은 이런 사정 때문에 기쁨이 기능하는 것이겠습니다. 우리가원하는 일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지 않은 까닭에, 그런 경우를 기억하고 재실현하려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런 쪽으로 우리의 행동을 이끄는 데 기쁨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처한 상황의 내외적 요인을 적절히 파악하여 대응하면 기쁨을 느낄 여지가 커질 겁니다. 하지만 그처럼 적절한 또는 적합한 파악을 해내기는 쉽지 않지요.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지적 탐구가 성공했다고 보일 때 또한 기쁨을 맛보는 것이죠. 철학적 통찰에 수반되는 기쁨도 다르지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노력하면 '적합한 인식(cognitio adequata)'에 도달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능동적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스피노자는 기쁨이 성립하는 요건 가운데 '주체'의 비중을 과도하게 설정하지 않았나 싶군요. 그의 생애 동안 닥쳐왔던 여러 불행한 사태들은 그의 '적합한 인식'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죠.
레비나스- 기쁨이나 즐거움은 자기중심적 욕구 충족
우리 삶의 기본 특성 레비나스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레비나스에 따라 보더라도 기쁨이나 즐거움은 자기중심적 욕구의 충족에서 성립하죠. 우리 삶의 본래적 모습이 즐김, 즉 향유(jouissance)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향유는 '~으로 산다'는 구조를 갖지요. 그리고 이 무엇무엇('~')은 우선 타자적인 요소들로부터, 그러니까 내 뜻대로 좌우할 수 없는 요소들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나의 삶은 내가 아닌 것에 의존해 사는 것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이죠. 즐김은 이렇게 내가 아닌 것으로 사는 삶이 존립하는 데서 오는 만족함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여기에 수반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으로 사는 삶을 사는 한, 여기에 따르는 기쁨이나 즐거움은 우리 삶의 기본 특성인 셈입니다.
- 기쁨은 타자적인 요소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 그러한 한, 이 기쁨은 근본적으로 자족적인 것일 수 없어요. 타자적인 요소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레비나스에서 이 타자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동일화가 불가능한 것, 즉 완벽한 제어와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에요. 말 그대로 '다른' 것이거든요. 물론 레비나스 철학에서 이런 타자성의 본령은 윤리적 차원에 있지만, 향유와 관계하는 타자적인 것도 무한하기는 마찬가집니다. 완전히 장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것이죠.
- 스피노자와 달리 타자적인 면을 더 중시한다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삶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그 실제적 누림은 무엇보다도 타자적 요소들에 의해 좌우되죠. 날씨가 좋으면 기분이 좋고 즐겁죠. 그러나 날씨를 우리 마음대로 바꾸긴 어렵습니다.
기쁨의 근본적 유인은 기쁨을 느끼는 주체 밖에 있습니다. 기쁨이 느낌인 한에서 그럴 수밖에 없지요. 물론 그 바깥을 안으로 만들어 나가려 할 수는 있습니다. 레비나스식으로 말해, 외부를 내재화하려, 타자적인 것을 동일자화하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폭우가 쏟아질 때 우산이나 지붕 아래서 비를 피할 수는 있지만 당장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죠. 처마 밑에서 비를 긋는 일도 작은 기쁨일 수는 있겠으나, 마침내 먹구름이 걷히고 환한 햇살을 마주할 때의 기쁨에 그것을 견줄 수 있을까요?
▶진정한 기쁨은 가치 있는 것에 의해 생겨난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가 사고방식의 큰 전환기를 맞고 있다고 봅니다. 인터넷 통신과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신경계의 외장(外藏) 경향이 심화하고 있을뿐더러, 그에 따라 인간의 자기중심적 사유로부터의 탈피가 불가피해지고 있어요. 환경을 인간에게 맞게 개조하려다 보니 그 과정에서 인간 자신의 됨됨이가 자연적 질서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진 거죠. 이 같은 아이러니는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됨의 심연이나 비밀에도 적용됩니다. 그것 또한 자연의 심연이나 비밀과 무관할 수 없을 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철학과 과학의 재합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학문의 초창기 때와는 달리 여기서 주도권을 철학이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다고 추론과 발견의 기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굳이 학문의 인위적인 경계와 명칭을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이런 추세의 와중에서 철학은 한편으로 가치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죠. 흔히 돈으로 환산되는 경제적 가치 말고 양화 불가능해 보이는 가치들 말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이 가치들은 논리적 가치, 윤리적 가치, 미학적 가치 등으로 대별될 수 있어요. 실증과학은 이런 가치들을 직접 문제 삼지 않죠. 이것들은 여전히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철학은 가치들을 다루지요. 그렇다면 철학은 애당초 기쁨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활동이 아니겠습니까? 기쁨은, 적어도 진정한 기쁨은 가치 있는 것에 의해 생겨나는 것일 테니까요.
◆ 문성원 교수 프로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0년부터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역사철학, 문화철학, 현대사회철학 분야를 주로 다뤄 왔다. 지은 책으로 '철학의 시추: 루이 알루세르의 맑스주의 철학' (1999), '배제의 배제와 환대: 현대와 탈현대의 사회철학'(2000), '해체와 윤리: 변화와 책임의 사회철학'(2012),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2013), '타자와 욕망'(2017), '철학의 슬픔'(2019)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자유' (2002), 자크 데리다의 '아듀 레비나스' (2016), '죽음의 선물'(근간),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신, 죽음, 그리고 시간'(2013, 공역), '전체성과 무한'(2018, 공역), '타자성과 초월',(2020, 공역),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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