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가 된 배우, 그레이스 켈리
1950년대 할리우드를 빛낸 배우이자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그녀는 영화계의 아이콘이자 우아함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배우로서 찬란했던 경력, 왕가의 일원이 된 이후의 삶, 그리고 그녀가 남긴 유산까지.그레이스 켈리가 천사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발을 들인 날을 기념하고자, 그녀의 생애를 돌아본다.
그레이스 켈리
· 1929~1982
필라델피아 명문 가문 출신
그레이스 켈리는 1929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어머니는 운동선수 출신. 이미 출발부터 그녀의 유전자 풀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스는 세 자매 중 막내로, 명문 가문에서 자라며 우아함과 교양을 자연스레 습득했다. 켈리 가문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집안이었고, 그녀의 어릴적 놀이는 교양 수업이나 사교계 행사였다. 이 모든 환경이 그녀를 할리우드의 ‘프린세스’로 만들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문 가문 출신답게 사교성과 세련미는 그레이스에게 ‘기본값’이었다.
연기 공부와 브로드웨이 활동
17세가 되자 그레이스 켈리는 뉴욕으로 향했다. 연기를 배우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뉴욕의 아메리칸 아카데미 오브 드라마틱 아트에서 연기 공부를 시작했고, 동시에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작은 역할을 맡으며 경력을 쌓았다. 화려한 대사가 없어도 그녀의 존재감만큼은 확실했다. 우아한 외모와 정갈한 발음으로 곧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무대에서 갈고닦은 연기력을 바탕으로 할리우드 진출을 꿈꿨다. 브로드웨이는 그녀에게 연기를 위한 ‘첫 관문’이었지만, 이내 그녀는 더 큰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리우드 진출과 주요 작품
뉴욕에서 연기를 공부하던 그레이스 켈리는 할리우드로 진출하면서 본격적인 스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1951년 영화 <14시간>(1952)으로 할리우드에 데뷔했다. 비록 작은 배역이었지만 그녀의 우아한 이미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후 <모감보>(1954)에 클라크 게이블과 함께 출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이 작품으로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할리우드에서 배우로서 빠르게 입지를 다지며 주연배우로 올라섰다. 그녀의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세련된 이미지 덕분에 대중은 곧 그레이스 켈리를 시대를 초월한 배우로 기억하게 되었다.
히치콕과의 협업, 그리고 아카데미 수상
그레이스 켈리의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앨프리드 히치콕과의 협업이었다. 1954년,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 히치콕과 첫 호흡을 맞추며 주연을 맡았고, 같은 해 <이창>(1954)에서 또 한 번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히치콕은 그레이스의 우아하고 차분한 이미지를 활용해 스릴러의 긴장감을 극대화했고, 이후 그녀는 히치콕 감독의 뮤즈가 되었다. 이어 <갈채>(1954)에서 현실 연기를 선보이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그녀는 단순히 미모가 아닌 연기력으로도 할리우드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됐다.
Episode. 수많은 스캔들 속에서도 잃지 않은 우아함
할리우드에서 승승장구한 만큼 대중은 그레이스 켈리의 사생활에도 관심이 많았다. 클라크 게이블, 윌리엄 홀든 등 당대 최고의 남성 배우들과의 로맨스 등 각종 스캔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특히 <모감보> 촬영 당시 클라크 게이블과의 관계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스캔들에 휘말릴 때마다 침묵을 유지하며 공적 이미지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 했다.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히 관리한 그녀는 대중 앞에서는 여전히 완벽한 우아함을 유지했다.
모나코 왕비가 되다
할리우드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1955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모나코 왕 레니에 3세를 만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적이었고, 곧 로맨스로 발전했다. 1956년, 그레이스는 할리우드를 떠나 모나코 왕비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녀의 결혼은 영화보다도 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며 당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모나코 왕가의 결혼식은 화려하면서도 고전적인 스타일로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었고, 특히 그녀의 웨딩드레스는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시간을 엄수하는 일, 같은 일을 몇 차례고 되풀이하는 일,
화장하는 법, 걸음걸이, 타인을 대하는 법 등
배우 생활을 하며 익힌 것은
왕비가 되어서도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 그레이스 켈리
왕비로서의 공적 역할
왕비가 된 후에도 그레이스 켈리의 삶은 화제였다. 그레이스는 모나코 왕실과 관련한 여러 자선 활동과 문화 행사에 적극 참여하며 왕비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녀의 존재는 단순히 모나코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었다. 대중은 그녀를 할리우드 스타에서 왕비로 신분 상승에 성공한 인물로 기억했고, 여전히 변치않는 우아함의 대명사 이미지를 유지했다. 레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고, 그레이스는 모나코 왕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도 한몫을 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
영화 속에서도 사생활에서도 그레이스 켈리의 패션 감각은 시대를 초월했다. <이창>에서 보여준 간결하고 세련된 스타일은 이후 수십 년간 전 세계 패션계의 사랑을 받았고, 많은 여성이 그녀의 스타일을 따라했다. 고급스럽지만 과하지 않은, 세련된 우아함이 그녀의 시그너처였다. 특히 청순하면서도 기품 있는 분위기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녀가 입는 옷은 곧 트렌드가 되었다. 그녀는 할리우드 시절부터 이미 패션 아이콘으로서 독보적 위치에 있었다.
왕비가 되어서도 지속되는 영향력
모나코 왕비가 된 이후에도 그레이스 켈리의 패션 감각은 변함없었다. 결혼식에서 입은 웨딩드레스는 그 자체로 전설이 되었고, 수많은 여성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후 왕비로서 공적 자리에서 보여준 그녀의 패션은 품위와 격식을 갖추면서도 세련미를 잃지 않았다. 그녀의 스타일은 단순히 개인의 패션을 넘어 모나코 왕실에 대한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영화배우에서 왕비로 변신한 후에도 그녀의 패션은 계속해서 현대 패션계에 영향력을 미치며 지금까지도 우아함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비극의 13일
1982년 9월 13일, 모처럼 가족과 함께 별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그레이스 켈리는 막내딸 스테파니와 먼저 별장을 떠났다. 30년 전 영화 〈나는 결백하다〉(1955)를 촬영한 바로 그 도로를 그레이스가 직접 운전하다 핸들을 놓치는 바람에 차량이 40m 아래 산비탈로 추락하고 말았다. 혼수상태에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녀는 결국 숨을 거뒀다. 충격을 받은 전 세계 언론은 비극적인 이 사고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이 사고는 성공한 할리우드 배우에서 모나코 왕비로 품격 있는 삶을 살다 비극적 최후를 맞은 그녀를 만인이 영원히 기억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간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한 여자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 그레이스 켈리
영화계와 모나코 왕실에 남긴 유산
그레이스 켈리가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유산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녀는 할리우드뿐 아니라 모나코에서도 전설로 남았다. 영화계에서는 그녀의 우아한 이미지와 탁월한 연기력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으며, 그녀가 남긴 영화들은 클래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레이스는 모나코에서도 자선 활동과 대중적 인기를 통해 모나코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삶은 수많은 다큐멘터리와 전기를 통해 조명되고 있으며, 그녀가 남긴 패션과 영화는 변함없이 대중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ㅣ 덴 매거진 2024년 11월호
에디터 정지환(stop@mcircle.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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