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탈시설 시범사업 1년 살펴보니···참여자 모두 “자립생활 만족”

민서영 기자 2023. 3. 1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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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피플퍼스트 등 장애인 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11월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탈시설 과정에서 당사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을 촉구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뇌병변 장애인 이지민씨(25·가명)는 10살 때 “이 시설에서 뼈를 묻어라”라는 아버지의 강요로 지적장애인 시설에 입소했다. 다른 장애인들과 한 방에서 8명이 같이 지내는 삶이 너무 싫었던 이씨는 20살 성인이 되면 시설을 나가겠다고 결심했다. 이씨의 꿈은 지난해 12월에야 이뤄졌다. 자신만의 집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 “너무나 행복하다”는 이씨는 여전히 시설 퇴소 후 혼자 사는 것에 반대를 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걱정마세요, 저 잘 살고 있어요.”

사랑하는 아버지의 반대와 거의 평생의 삶을 함께한 공간을 등진 건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씨를 비롯한 35명의 장애인들은 시설을 나와 혼자 살아보겠다는 어려운 선택을 했다.

올해는 정부의 탈시설 시범사업이 시작한 지 1년을 맞는 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월 시범사업에 참여할 지자체 공모를 거쳐 같은 해 3월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제주, 경북 경주, 전북 전주, 전남 화순, 충남 서산 등 10개 지역을 시범사업 대상으로 선정했다. 19일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복지부로부터 받은 ‘10개 지자체 탈시설 시범사업 추진 현황’ 자료를 보면, 지난 1월 기준 대구, 부산, 경주, 제주, 전주, 인천, 화순 등 7개 지역의 35명의 대상자가 지역사회 내 주거전환을 완료했다.

네일아트·요리·뜨개질·트로트···탈시설 후 찾은 ‘나만의 재미’

대부분 대상자들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강 의원이 복지부로부터 받은 한국장애인개발원의 ‘시설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체계 구축 시범사업 자립인원 현장 모니터링 결과 보고서’를 보면, 보고서는 “(면접조사에 참여한) 29명의 대상자들 모두 현재의 자립생활이 만족스러우며, 거주시설에서의 생활보다 좋다고 응답했다”고 밝혔다. 자립생활이 만족스러운 이유로는 자유로움과 개인의 공간이 있다는 점, 대학교 진학과 동료 상담가 등 자아실현의 기회가 생긴 점을 꼽았다고 했다.

탈시설한 장애인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시설 밖으로 나온 시범사업 대상자들은 자신만의 취향과 취미가 생겼다. 경주의 A씨(31)는 자신만의 네일아트숍을 차리기 위해 관련 교육을 받고 싶어한다. 학습에 대한 욕구가 있는 B씨(27)는 퇴근 후 집 근처 다이소에 들러 시계와 거울 등 필요한 것들을 사곤 한다. C씨(47)는 새로운 취미로 요리와 뜨개질을 꼽았다. 대구에 사는 D씨(51)는 노래, 특히 트로트를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부산의 E씨(48)는 자립생활지원센터의 다른 장애인들과 백화점 쇼핑을 한 게 자립 후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날 E씨는 백화점에서 자신의 집에 올 손님을 위한 ‘접대용’ 밥상을 샀다. 대구의 F씨(50)는 한 달 전 다녀왔던 제주여행을 언젠가 또 가고 싶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의 하루 일과는 ‘규칙적이고 체계적’이다. 식사는 대부분 이용인의 욕구를 반영해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는다. 직장이 있는 경우 점심식사는 직장에서 한다. 스스로 요리를 해먹거나 배달음식도 시켜먹는다. 29명 중 절반에 가까운 15명은 복지관과 장애인일자리사업, 직업재활원, 보호작업장 등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일자리가 없으면 주간 활동서비스나 복지관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저녁과 주말엔 여느 혼자 사는 비장애인처럼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시청하거나 교회를 가고, 장을 보고, 산책을 하며 여가 시간을 보낸다.

남은 과제들···더딘 주택확보와 부족한 활동지원시간

여전히 갈 길이 먼 부분도 있다. 보고서는 ‘주택확보와 대상자 발굴’을 시범사업의 가장 어려운 점으로 지적했다. 보고서는 “주택을 마련하는 것도 어렵지만 개인 계약이 어려워 보증금 임대 지원과 같은 기존의 제도를 더욱 활용하지 못하며, 동별로 계약할 시 또 하나의 시설로 보이는 것에 대해 부담이 있으며 공실에 대한 관리비와 임대료 부담이 어려워 사업 추진에 어렵다”고 했다. 현재 대상자들이 거주하는 임대주택은 대상자 본인이 아닌 지자체나 시범사업 수행기관 명의로 계약이 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택 확보도 더딜뿐더러 전담인력이 부족해 대상자 발굴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현재 확보된 주택들이 당사자의 다양한 욕구를 반영하지 못한단 점도 문제다. 조아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는 기자와 통화에서 “올해 공급된 주택 물량은 어느 정도 편의시설은 확보됐지만 기본적인 편의시설 외에 개별 장애 유형에 따라 필요한 개조들이 이뤄진 ‘유니버셜 주택’은 확보가 미진하다”며 “또 새로 확보된 주택 물량은 거의 도시 외곽 지역에 만들어져 당사자들의 도심 접근성이나 서비스 기관으로부터 원활한 서비스 지원을 받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자립생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활동지원시간 역시 지자체마다 편성 예산의 편차가 크다는 문제가 있다. 조 활동가는 “중앙정부가 예산 때문에 활동지원시간 세팅을 얄팍하게 해버리면 시범 사업에 뛰어든 각 지자체가 채워야 하는데 지자체별로 편차가 워낙 큰 상황”이라며 “서울의 경우 3차 탈시설 계획을 수립하는 곳인 반면 경주나 제주, 화순 등은 지자체 차원의 탈시설 계획이 아예 없던 곳이라 시범사업의 성과가 크게 나오기 어렵다”고 했다. 중앙정부의 예산이 아예 편성되지 않은 자립정착금의 경우 지자체마다 적게는 800만원에서 많게는 1500만원까지 차이가 크다. 조 활동가는 “지자체의 편차를 고려해 (탈시설 체계를) 세팅하지 않은 중앙정부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며 “복지부가 자립 의사가 있는 장애인을 계속 확인하고 있는데 현재와 같은 체계라면 부족한 지원 제도에 부합하는 (장애 정도가 경미한) 사람만 탈시설을 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020년 12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관계자들이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장애인 탈시설지원법 발의 환영 및 제정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정부가 2021년 발표한 ‘탈시설 로드맵’에 따르면, 복지부는 2024년까지 3년간 시범사업을 통해 자립 지원 기반을 다지고, 2025년부터 본격적인 탈시설 지원사업에 나설 계획이다. 처음 5년간 매년 740여명을 시작으로 한 해 수 백명씩 지역사회 정착을 지원하면 2041년 전환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고 있다.

강 의원은 “탈시설 시범사업에 따른 전환완료자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나 긍정적이다. 하지만 지원주택의 부족과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가 여전히 원활하게 제공되지 않으면서 전환속도가 느린 것으로 나타났다”며 “정부가 탈시설 로드맵의 제대로 된 이행을 위해서 장애인의 지역사회 정착을 위한 환경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민서영 기자 min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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