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보의 원조집 슈프림의 시계
안녕. 나는 한정판, 특별판, 그리고 콜라보레이션 전자 제품 리뷰를 빌미로 옛날 제품 이야기를 하는 ‘컬렉터’ 코너의 객원필자 기즈모다.
오늘은 콜라보레이션의 원조집 ‘슈프림’ 제품이다. 슈프림은 매해 대규모 콜라보레이션 제품을 쏟아내는데 지난해 2022FW 시즌에서 지샥, 노스페이스와 함께 콜라보한 시계를 내놓았다. 카시오 지샥 DW-6900모델을 베이스로 내놓은 모델이다. 지샥 DW-6900 모델의 평균 가격은 7~10만 원대. 하지만 슈프림 로고와 노스페이스 로고를 추가로 박으며 발매가는 24만 원대에 출시됐다. 물론 슈프림은 출시와 동시에 매진되고 대부분의 소비자가 리셀러를 통해 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웃돈을 더 줘야 한다. 10만 원짜리 시계에 뭔가 마크를 몇 개 더 박았다고 30만 원 넘게 주고 사는 바보가 있을까? 있다. 그것도 아주 많다. 나도 그렇다.
어째서 똑같은 제품에 슈프림 마크만 붙으면 2~3배의 웃돈을 붙여 사게 될까? 그리고 슈프림은 왜 콜라보레이션의 원조집이 됐을까? 지샥 슈프림 에디션 리뷰를 통해 그 이유를 알아보자.
우선 박스 패키지에 노스페이스, 슈프림, 지샥 로고가 크게 새겨져 있다. 세 브랜드는 연관이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비슷한 성향의 브랜드다. 아웃도어 브랜드의 대명사인 노스페이스, 스트릿 브랜드의 대명사인 슈프림, 밀리터리 시계의 대명사인 지샥. 세 브랜드 모두 아웃도어 브랜드고, 터프한 브랜드 이미지를 가졌다. 이 셋이 콜라보레이션을 했으니 지옥에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도 굉장히 단단하고 터프한 제품이다. 지난번에 소개한 허약했던 문스와치(http://the-edit.co.kr/50099)와는 확연히 다르다. 실제로 지샥 시계들은 영화 <스피드>, <미션 임파서블> 등의 액션 영화 주인공들이 단골로 착용하는 시계다. 물론 나는 테러리스트와 싸울 기회도 없고 암벽을 등반할 체력도, 누군가와 격투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달나라에 갈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굳이 오메가를 차지 않는가? 달나라보다는 테러리스트가 그나마 현실적이다.
패키지 박스는 지샥 특유의 깡통 케이스다. 일반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케이스에도 노스페이스, 슈프림 로고가 뚜껑에 새겨진 것 정도. 참고로 슈프림은 지난 2020년 노스페이스를 거느린 VF코퍼레이션에게 인수된 적이 있다. 이후로 노스페이스와 슈프림의 협업은 부쩍 늘어난 편이다.
본체인 시계 색상은 노란색, 하얀색, 검정색의 세 가지다. 나는 하얀색을 골랐다. 차고 다니기에는 좀 부담되지만 슈프림을 나타나는데 하얀색과 빨간색의 조합만큼 어울리는 조합이 또 있을까?
베젤에는 지샥 마크가 크게 새겨져 있다. 왼쪽, 오른쪽에 각각 기능 스위치가 4개 붙어 있다. 아래쪽 G마크가 붙은 버튼을 눌러주면 화면이 푸른색으로 빛나며 어둠속에도 현재 시간을 볼 수 있다. 슈프림 버전만의 특성은 불빛이 나올 때 슈프림 마크가 보인다는 점이다. 이 버전만 가진 특징적인 디자인이다. 다만 슈프림 마크 때문에 시계의 시인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슈프림은 원래 효율이나 기능을 따지는 브랜드가 아니다. 그저 슈프림 마크가 중요한 브랜드다.
다이얼 디자인도 지샥 DW-6900과 거의 동일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다이얼 상단에 노스페이스 마크가 붙어 있다는 것 정도. 그 밑으로 스톱워치 애니메이션이 있고, 아래에는 전자시계 창이 있다. 기본적인 기능은 알람, 타이머, 스톱워치 등이다. 다른 지샥 버전에 있는 태양광 배터리 충전이나 블루투스 연결은 빠져 있는 기본형 모델이다. 방수 성능이 대단하다. 20BAR방수로 수심 200m까지 방수가 된다. 이 정도면 수영은 물론이고 스킨스쿠버도 즐길 수 있는 다이버워치급이다. 다만 수중에서 버튼을 누르면 방수를 보장하지 못한다. 물론 나는 수심 200m나 다이빙, 스킨스쿠버를 즐길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마이클 조던만큼 농구를 하려고 에어조던을 사는 건 아니지 않는가?
일반판 DW-6900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스트랩 디자인이다. 아웃도어 성향에 맞는 벨크로 재질이다. 스트랩 스타일은 좀 독특해서 이중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손에서 풀릴 가능성을 줄였다. 하지만 실생활시에는 불편하다. 크기가 크고 옷에도 걸리기 쉽다. 대신 장갑을 낀 상태에서도 채우거나 풀기 편한 장점이 있다. 스트랩은 노스페이스와 협업의 결과물인 듯하다. 물론 나는 장갑을 끼거나 산에 올라갈 일은 없으니 불필요한 옵션이긴 하다. 대신 스트랩은 쉽게 교체가 가능하고 지샥의 다른 스트랩과 호환이 된다. 다만 스트랩에 새겨진 빨간색 노스페이스와 슈프림 마크는 스트랩을 교환하면 사라지게 된다.
쿨한 제품이긴 하지만 이 시계 역시 30만 원의 가치는 없어 보인다. 10만 원짜리 지샥에 슈프림 로고가 나오는 백라이트와 노스페이스가 디자인한 벨크로 스트랩만 제공할 뿐이다. 하지만 슈프림 로고가 박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빠르게 품절되고 웃돈이 붙어 거래된다. 슈프림은 한번 생산된 제품은 대부분 다시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내놓는 제품은 발매 즉시 대부분 품절된다. 사고 싶은 사람이 많으니 목요일 오전 11시 정각에 일제히 판매하기 시작한다. 이런 판매 방식을 ‘드롭’이라고 하며 이는 곧 유행이 되어 나이키를 비롯, 기타 패션 브랜드에서도 비슷한 방식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제품이나 이런 방식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왜 유독 슈프림만이 이런 성공을 거둔 것일까?
슈프림은 ‘제임스 제비아’가 1994년 미국 뉴욕에서 오픈한 어느 가게에서 시작된다. 창업 자금은 1500만 원 정도. 스케이트보드 관련 패션 브랜드였던 슈프림은 심플하고 강렬한 붉은색 로고가 상당히 감각적이어서 단번에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범용 글씨체에 일반 단어를 그대로 사용한 거라 상표권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수많은 짝퉁들이 범람하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2022년에 들어서야 슈프림 상표권 등록이 됐다)
슈프림이 성공을 거둔 이유는 사실 노이즈 마케팅 덕분이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추측이다. 초창기의 슈프림 매장은 직원을 뽑을 때 길거리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악동들 위주로 뽑아 불친절하기로 악명 높았다고 한다. 광고 방식도 요란했다. 그들은 오픈하자마자 캘빈클라인 광고에 무단으로 슈프림 로고 스티커를 붙이는 식으로 홍보해서 캘빈클라인에게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제품을 내놓을 때는 ‘패러디’라는 명목하에 유명 상표나 유명 이미지, 캐릭터를 무단 도용하기도 했다. 결과는 루이비통, NHL, NCAA등 수많은 업체들과의 소송. 하지만 이런 무단 도용이 결과적으로 슈프림의 반항적인 이미지를 한층 더 강화시켰고 다른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슈프림이 성장한 이후에는 해당 브랜드들과 정상적으로 협업한 제품들을 매해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 소송 당사자였던 루이비통과도 정식 콜라보를 내놓기도 했다. 역시 자본주의다.
[슈프림이 내놓은 스케이트보드]
슈프림의 판매 방식도 악명 높다. 항상 수요보다 적은 양의 제품을 매주 목요일 11시에만 판매하다 보니 오픈 전에 줄을 서야 하고 물건의 수요가 달리니 자연스레 리셀러들의 먹이감이 됐다. 드롭되는 대부분의 제품들을 리셀러들이 구입하니 프리미엄이 붙은 가격에 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반 소비자들의 불만은 높았다. 그러니까 직원들도 불친절하고, 구매하기도 어렵고, 웃돈까지 붙는 브랜드라는 얘기다. 여기에 슈프림 제품들은 짝퉁도 많고, 무단 도용한 이미지나 로고도 사용되며 폭력적인 제품(망치, 벽돌, 마약을 은유하는 제품, 성적인 이미지)도 많다. 운영 방식부터 소재까지 모든 요소들이 노이즈의 집합체다.
일반적인 브랜드라면 망해도 벌써 망해야 마땅한데 슈프림은 이런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오히려 성장해 왔다. 모범적이고 고급스럽고 소비자 친화적인 이미지의 브랜드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슈프림은 정반대의 이미지로 성공을 거뒀다. 인간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모범적이고 고급스러움과는 정반대의 혼란스럽고 부도덕하며 반항적인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슈프림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공략한 일종의 길티플레저 브랜드인 셈이다.
지샥 DW-6900은 평범한 전자시계다. 군인들이 선호해서 밀리터리 시계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슈프림과 노스페이스 로고가 더해지며 전혀 다른 제품이 된다. 내 개성을 말해주는 특별한 패션 아이템이자 반항적이고 쿨한 이미지가 덧붙여진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원래 가격보다 2~3배 높은 가격표에도 기꺼이 지갑을 연다. 웃돈까지 주면서 말이다. 심지어 표절과 도용, 부도덕한 이미지가 있는 로고인데도 말이다. 브랜드의 역사에서 이런 브랜드는 존재하지 않았고 비슷한 사례도 찾기 힘들다. 그래서 슈프림은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브랜드다. 그러나 머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느새 슈프림의 다음 드롭을 기다리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슈프림 로고의 마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