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에서 ‘꽃가마’는 단순한 우승 세리머니가 아니다. 모래판 위에서 버틴 시간, 허리끈을 다시 묶은 날들, 그리고 마지막 한 판을 뒤집은 힘까지 한꺼번에 실린다. 그래서 장사 타이틀이 여러 번인 선수일수록 오히려 더 어려워진다. “또 한 번”이라는 기대가 늘 따라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수원시청 허선행이 설날장사대회 태백장사로 올라선 장면은 묘하게 단단했다. 3-0 스코어는 숫자만 보면 한쪽으로 기운 결승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우승은 ‘압도’라기보다, 스스로에게 걸린 숙제를 정확히 풀어낸 결과에 가깝다. 지난해 설날대회에서 준우승으로 남았던 아쉬움을, 같은 무대에서 다시 꺼내 정리해버렸다.
이번 대회 흐름을 보면 허선행은 처음부터 속도를 내기보다, 판을 ‘정리’하며 올라갔다. 8강에서 홍승찬(문경시청)을 2-0, 준결승에서 윤필재(의성군청)를 2-0으로 꺾고 결승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상대 이름이다. 윤필재는 태백급에서 이름값이 큰 선수로 통한다. 그 선수를 상대로 점수를 내주지 않고 결승에 올라갔다는 건, 컨디션이 좋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준비 과정이 정확했다는 뜻이다.
결승 상대 이은수(영암군민속씨름단)는 21세의 패기 있는 도전자였다. 씨름에서 가끔 나오는 ‘세대교체’ 장면은 보통 이런 구도에서 시작된다. 젊은 선수는 초반에 몰아붙이고, 베테랑은 한 번 흔들리면 연속으로 무너질 때가 있다. 그런데 허선행은 딱 반대로 만들었다. 첫 판 들어뒤집기, 둘째 판 들배지기. 기술이 딱딱 꽂히는 순간, 도전자의 속도가 꺾였다.
여기서 태백급의 매력이 드러난다. 태백급(80kg 이하)은 힘만으로 버티는 체급이 아니다. 물론 힘이 필요하지만, 결정적인 승부는 ‘기술의 각도’에서 갈린다. 허선행이 첫 판부터 들어뒤집기를 꺼낸 건 “오늘은 내 리듬으로 가겠다”는 선언이었다. 상대가 공격을 펼치기 전에, 중심을 빼앗아 모래판에 눕히는 방식이다. 들배지기로 두 번째 판까지 가져간 순간, 결승은 사실상 허선행 쪽으로 굳었다.
셋째 판이 더 인상적이었다. 이미 2-0이면, 보통은 무리하지 않고 안전하게 가려는 마음이 든다. 그런데 허선행은 그 안전한 선택 대신 다시 들어뒤집기를 선택했고, 그대로 우승을 끝냈다. 이건 체력의 문제도 있지만, 결국 ‘결심’의 문제다. 상대에게 희망을 주지 않고, 내 기술로 마침표를 찍겠다는 마음. 점수보다 그 마음이 더 큰 차이를 만든다.

허선행의 이번 우승은 개인 통산 7번째라는 기록으로도 크다. 하지만 기록을 늘어놓는 순간, 오히려 핵심을 놓친다. 이번 꽃가마가 특별한 건 “5년 만에 설날대회 태백장사”라는 시간의 의미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정상에 올랐던 자리가 다시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베테랑이, 다시 그 자리를 되찾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승을 ‘유지’하는 것만큼, 우승을 ‘회복’하는 건 더 어렵다.
또 하나의 포인트는 ‘부상’이다. 허선행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부상을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스포츠에서 부상은 늘 미화되기 쉽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는 말은 듣기 좋지만, 현실은 훨씬 냉정하다. 아픈 몸으로 무리하면 기술이 무뎌지고, 순간 판단이 늦어지고, 결국 승부가 갈린다. 그런데도 허선행이 부상을 핑계로 삼지 않고 “아파도 포기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연습”을 했다고 말한 건, 그가 자신을 어떻게 관리해왔는지 보여준다. ‘버티는 운동선수’가 아니라 ‘조절하는 운동선수’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수원시청 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씨름은 개인전처럼 보이지만, 실은 팀 스포츠의 기운이 강하다. 감독과 코치의 훈련 설계, 동료들의 스파링, 체중 관리와 회복 루틴이 합쳐져야 우승이 나온다. 허선행이 이충엽 감독, 임태혁 코치에게 감사를 전한 건 관례적인 인사로 끝나지 않는다. 베테랑일수록 루틴이 깨지는 걸 싫어하고, 작은 변화에도 민감해진다. 그 루틴을 시즌마다 다시 세팅해주는 사람이 코칭스태프다.
씨름 전체로 보면, 이런 우승은 종목에 좋은 신호다. 대형 스포츠 이슈가 넘치는 시대에, 씨름은 자주 ‘명절 때만 보는 스포츠’로 묶이곤 한다. 그런데 허선행 같은 선수가 매 대회 서사를 만들어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경쟁’이 된다. 더구나 결승 상대가 21세 이은수였다는 사실은, 씨름판이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는 증거다. 베테랑이 지키고, 젊은 선수가 도전하고, 그 사이에서 기술이 진화한다.

허선행의 우승을 보며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남는 장면은 황소트로피를 든 사진이 아니다. 들어뒤집기를 성공시키고 포효하던 순간도 멋있었지만, 그보다 “후회 없이 준비했다”는 말이 더 오래 남는다. 씨름은 모래판 위 3초가 전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3초를 만들기 위해 수백 시간을 쌓는다. 후회 없이 준비했다는 말은, 결과가 어떻든 흔들리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승이 더 단단해 보인다.
이제 관심은 다음 대회로 넘어간다. 하지만 이번 설날대회 태백장사 타이틀은 허선행에게 단순한 ‘한 번 더’가 아니다. 지난 대회 준우승의 아쉬움을 정리했고, 5년 만에 설날 무대 정상에 다시 섰고, 통산 7번째 꽃가마로 자신의 이름을 또렷하게 남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백급이 “기술로 말하는 체급”이라는 걸, 아주 깔끔하게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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