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의 빅딜…LG와 해태는 왜 김상훈과 한대화를 트레이드했을까

[이재국의 엘팬알백] ㉞‘미스터 LG’ 김상훈과 ‘해결사’ 한대화 맞교환…4대2 블록버스터 트레이드의 막전막후

1993년 12월, LG 김상훈과 해태 한대화가 포함된 초대형 트레이드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스포츠서울 1면. 이 시점엔 3대2 트레이드로 합의했지만 최종적으로 4대2 트레이드로 수정된다. ⓒ스포츠서울
“정말로 김상훈을 원하면 지난 금요일 마지막 카드 중에서 윤재호 대신 허문회로 바꿔 주면 어떻겠소.”

1993년 11월 29일. 서울 마포 가든호텔에서 LG 트윈스의 최종준 운영부장은 해태 타이거즈 이상국 단장과 트레이드 카드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사흘 전인 11월 26일 두 사람이 만나 처음 트레이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해태가 3루수 한대화, 좌투수 신동수와 함께 유격수 자원 윤재호까지 3명을 내주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해태가 반대급부로 LG에 요구한 선수는 1루수 김상훈과 외야수 이병훈. 말하자면 해태에서 3명을 주고, LG에서 2명을 내놓는 3대2 트레이드 협상이 성사 직전에 있었다.

‘미스터 LG’ 김상훈과 해태 ‘해결사’ 한대화. 다른 이름은 차치하고 두 선수가 트레이드 매물로 거론되는 것 자체가 충격적인 일이었다.

양 구단을 상징하는 간판이자 전력의 핵심 인물들.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있는 최고 인기스타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트레이드 협상이 막판 난항을 겪은 건 신인 선수 한 명 때문이었다.

“시방 뭔 소리여. 허문회는 안 되지. 걔가 어떤 선순데….”

구단에 들어가 LG의 입장을 정리해 온 최 부장은 윤재호 카드 대신 해태가 신인드래프트 2차 1라운드에 지명한 루키 1루수 허문회로 바꿔달라는 요구를 했지만, 이 단장은 최부장의 얘기를 단칼에 잘랐다.

허문회가 누군가. 부산공고와 경성대 출신의 좌타자 1루수로 국가대표를 지낸 인물. 타격 재능이 뛰어난 유망주로 1994년 해태에 입단 예정인 신인선수였다.

LG로서는 간판 1루수 김상훈을 내줄 경우 그 자리를 메워줄 후보가 필요했고, 허문회를 그 적임자로 보고 카드를 바꿔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해태 역시 허문회를 간단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간판 1루수인 ‘오리궁둥이’ 김성한 은퇴 이후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2차 1라운드에 지명한 전도유망한 미래자원이었다. 그래서 이상국 단장도 “허문회” 이름이 나오는 순간 즉각적인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이드 메뉴로 테이블에 올린 신인 허문회로 인해 성사 직전까지 갔던 메인 요리의 맞교환이 물 건너가는 듯했다.

그런데 이튿날인 12월 1일 오전, LG 트윈스 구단 사무실 최종준 부장 책상 위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 이상국이요. 내가 최 부장에게 졌소. 어차피 얘기가 나온 것이니 그대로 진행하도록 합시다. 허문회가 (LG) 가서 잘하면 다음 번에는 더 좋은 카드를 얹어주쇼!”
『프로야구 해태와 LG는 1일 '해결사' 한대화와 '미스터 LG' 김상훈을 맞바꾸기로 합의했다. 해태는 투수 신동수를 비롯해 2차지명 신인인 허문회(경성대)와 김봉재(계명대)를, LG는 외야수 이병훈을 맞트레이드 명단에 각각 포함시켰다. 이번 트레이드는 88시즌이 끝나고 삼성과 롯데가 실행했던 김시진 장효조, 김용철 최동원의 맞트레이드 이후 가장 큰 선수교환이다.』 <1993년 12월 2일자 경향신문>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34번째 주제는 1993년 세밑을 뒤흔든 ‘미스터 LG’ 김상훈과 ‘해결사’ 한대화의 트레이드 막전막후 스토리다. LG와 해태는 왜 간판스타인 둘을 맞바꿨을까.

1993년 12월 해태 타이거즈에서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된 '해결사' 한대화. ⓒLG트윈스

◆해태 김응용 감독의 발길질로 촉발된 한대화의 트레이드 요구

김상훈과 한대화의 트레이드 논의가 시작된 건 사실 해태 측 사정 때문이었다. 한대화가 트레이드를 요구하자 해태 구단이 이를 받아들인 뒤 대상자를 물색하다 LG와 협상 테이블을 차린 것이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1993년 7월 4일 올스타전 때 발생한 그 일 때문이었다. 덕아웃에서 해태 김응용 감독이 한대화에게 발길질을 한 사건(?)이다.

당시 올스타전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9회초 1사 후 대기타석에 있어야 할 한대화가 덕아웃에 앉아 있자 서군(해태, 빙그레, LG, 태평양 연합팀) 3루코치로 나가 있던 김 감독이 경기를 중단시키고 덕아웃까지 달려갔다. 그러면서 “성의가 없다”며 한대화에게 발길질을 했다.

이 장면은 올스타전을 중계한 MBC-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33세 베테랑이었던 한대화는 후배들 앞에서, 그리고 전국의 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큰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

화가 난 한대화는 올스타전이 끝난 뒤 6일부터 광주진흥고에서 시작된 해태의 합동훈련에 불참했다.

당시 스포츠서울이 ‘한대화 팀 이탈’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대서특필하면서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김응용 감독.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1993년에도 해태의 우승을 이끌었다. ⓒ스포츠서울
“당시 올스타전이 열린 사직구장 그라운드엔 인조잔디가 깔려있었어요. 한여름이니까 엄청 뜨겁잖아요. 3루수로 나가 수비를 할 때 슬라이딩을 하면서 공을 잡았는데 손이 인조잔디에 쓸리면서 거의 화상을 입다시피 했어요.”

한대화. 1960년생이니 그도 이제 60대 중반의 나이를 넘어서고 있다. 현재 대전시 체육회 부회장를 맡고 있는 그는 32년 전 여름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8회말이 끝나고 나서 도저히 경기를 하지 못할 것 같아 당시 서군 김영덕 감독님(빙그레 감독)과 이광환 코치님(LG 감독)께 ‘더 못 뛰겠다’는 뜻을 전했어요. 그런데 ‘부상자가 많아 교체할 선수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대기실에서 부상 부위에 얼음찜질을 하다 경기에 나가기 위해 덕아웃으로 가서 계속 얼음찜질을 하고 있었는데 김응용 감독님이 달려오셨던 거죠.”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됐지만, 그는 “당시엔 감정이 격앙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한대화. 그는 '해결사' 혹은 '3점홈런의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최고의 3루수였다. ⓒ스포츠서울

다음날인 7일 오전 스포츠서울과 인터뷰에서 “감독에게 얻어맞는 장면이 공개적으로 드러나 수모를 견딜 수가 없다. 다른 팀 선수는 물론 많은 팬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감독 자신이 데리고 있는 선수를 그런 식으로 다뤄도 되느냐. 이런 처참한 기분으로는 도저히 팀에 합류할 수 없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김응용 감독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해태 구단 측에 “훈련에 무단불참한 한대화를 현역 엔트리에서 제외해 달라”면서 “야구를 계속 하려거든 알아서 하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실제로 6일 훈련 때는 중견수 이순철에게 3루수 훈련을 받도록 지시했다. 1985년 3루수로 활약하며 신인왕을 받은 이순철은 1986년 한대화가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돼 올 때 김 감독의 지시로 외야수로 변신했는데 7년 만에 다시 3루수 훈련을 시작한 것이었다.

7일에도 한대화가 훈련장에 나타나지 않자 해태 구단 직원이 한대화 집까지 찾아가 설득을 하기도 했다.

결국 김응용 감독은 8일 한대화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호통을 쳤다.

“나와!”

한대화는 곧바로 팀훈련에 참가했다. 김응용 감독의 카리스마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대화는 후반기 첫 경기인 7월 10일 대전 빙그레전부터 5번 3루수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 이후 김 감독과 한대화 사이에 별 다른 얘기는 없었지만 서로 간에 냉랭해진 감정이 단숨에 회복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전설을 설계한 이상국 단장. 훗날 KBO 사무총장을 역임한다. ⓒ스포츠서울

시즌 종료 후 한대화는 11월 24일 광주 시티호텔에서 이상국 단장을 만나 “다른 팀에 보내달라”며 공식적으로 트레이드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한대화는 해마다 이 단장과 연봉협상을 할 때면 트레이드를 요구하곤 했다. 당시엔 타지역(대전) 출신이어서 그런지 연봉이나 대우 면에서 호남 출신 간판스타들에게 밀리고 있다는 느낌을 스스로 받으면서 협상 전술용으로 꺼내들곤 하던 카드였다.

해태도 그래서 예년에는 한대화가 트레이드를 요구해도 “연례행사”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1993년 시즌 후엔 장난이 아니라고 받아들였다. 어정쩡하게 김응용 감독과 한 배를 타고 가더라도 팀 분위기만 어수선해질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구단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트레이드를 추진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김응용과 한대화의 관계는 훗날 2004년 삼성 감독 김응용이 한대화를 1군 타격코치로 부르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팔순잔치 때 한대화가 축하연에 참석하자 “한대화한테도 미안한 일이 많아”라며 오래 전 사건에 대해 뒤늦은 사과를 하기도 했다.)

어쨌든 한대화의 팀 이탈 사건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상 해태의 한대화 트레이드는 더 이상 뭍밑에서 이뤄지는 비밀 협상이 될 수 없었다. 언론에서 해태의 동향을 시시각각 체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3년 11월 25일자 스포츠서울 1면. 이 보도로 인해 한대화의 트레이드 요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스포츠서울

◆판 커진 트레이드 물밑협상…김상훈 이름이 거론되다

한대화는 대전고 출신. 이 단장에게 “고향에 계시는 노부모님을 곁에서 모시고 싶다”며 “특히 몇 년 전부터 고혈압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께서 함께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 객지인 광주생활을 정리해야겠다”며 트레이드를 성사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해태 이상국 단장은 그래서 먼저 빙그레 이글스 측에 트레이드 의사를 타진했다. 하지만 빙그레에는 26세 젊은 주전 3루수 강석천이 있기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트레이드의 방향이 서울로 향했다. 한대화도 “반드시 빙그레가 아니더라도 대전과 가까운 수도권 팀도 상관없다”고 했다.

해태는 과거부터 좌타자에 대한 갈망이 컸다. 주력 타자가 김일권 김성한 김봉연 김종모 김준환 등 거의 ‘우타자 김 씨’로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1991년 구단 차원에서 마운드 강화를 위해 한양대 투수 오희주(진흥고 출신)를 1차지명할 때도 사실 김응용 감독은 아마추어 최고 강타자인 인하대 좌타자 김기태(광주일고 출신)를 원하기도 했다. 김기태가 쌍방울에 입단하자마자 맹활약을 펼치자 김응용 감독과 해태 구단은 땅을 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1루수 간판타자 김성한도 1993년 홈런 6개로 장타력이 급감한 터라 ‘포스트 김성한’ 시대를 준비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상국 단장은 좌타자 1루수 김상훈이 있는 LG를 접선처로 선회했다.

LG 최종준 운영부장. 훗날 LG 트윈스 단장에 오르게 된다. ⓒLG트윈스

특히 이상국 단장과 LG 최종준 운영부장은 성균관대 동문. 최 부장은 1951년생이며, 이 단장은 빠른 1952년생(1월생)으로 사실상 동년배였다.

최 부장이 1990년 LG 트윈스 프런트로 입사한 뒤 해태에서 잔뼈가 굵은 이 단장을 찾아가 구단 운영에 대한 조언을 듣기도 했고, 빠듯한 해태 구단 살림을 쪼개 억센 해태 스타들과 연봉협상을 벌이는 모습을 직접 곁에서 관전하며 노하우를 배우기도 했다. 야구계에서 만났지만 거의 친구처럼 가까워진 사이였다.

LG 역시 1993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2승3패로 패퇴한 터라 강한 팀을 만들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LG는 선수층이 두꺼운 서울을 프랜차이즈로 삼고 있었기에 기량이 빼어난 선수들은 많았지만 당시 ‘모래알 군단’이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이런 팀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는 승부근성이 강하고 선수단을 휘어잡고 끌어갈 수 있는 한대화 같은 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대화는 찬스에 강한 ‘해결사’로 검증된 선수. 1986년 OB 베어스에서 해태로 이적한 뒤 1992년까지 7년 중 무려 6차례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국내 최고의 3루수였다. 특히 한대화가 해태 유니폼을 입자마자 1986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시리즈 4연패에 성공했고, 1991년과 1993년에도 우승 고지를 밟았다.

1992년 LG 송구홍이 서울팀 최초 20-20클럽 가입을 앞세워 황금장갑을 가로채면서 3루수 한대화 독주 시대를 마감시켰지만, 한대화는 1993년에도 가장 유력한 3루수 골든글러브 후보로 평가받고 있었다.

(실제로 한대화는 1993년 해태에서 활약했지만 12월 1일 LG로 트레이드되면서 LG 소속 선수로 호명되며 생애 7번째 황금장갑을 받았다. 1994년까지 8차례 3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무엇보다 LG는 내야의 핵인 송구홍이 군복무를 위해 입대한 상황이라 당시 한대화를 영입한다면 안성맞춤이었다.

LG는 1993년 유격수가 마땅치 않아 골든글러버 3루수 송구홍을 유격수로 이동시키고, 고졸 3년생 스위치히터 이종열에게 주전 3루수 자리를 주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종열은 수비와 주력에 비해 2할을 갓 넘는 약한 방망이가 다소 아쉬웠다.

게다가 해태가 먼저 나서서 구매자를 찾는 격이니 협상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LG는 1993년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직후 팀의 유일한 3할타자 송구홍이 군입대를 하자 내야 보강의 필요성을 느꼈다. ⓒLG트윈스
“이종범을 줄 수 있소?”

최 부장은 협상을 시작하며 동쪽의 북을 두들겼다. 탐색전 개념으로 슬쩍 떠 본 것이었다. 그해 신인으로서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바람의 아들’ 이종범은 당연히 ‘트레이드 불가’ 선수였다.

“이상훈하고 유지현이를 합쳐주면 가능하지.”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단장은 한 술 더 떠 서쪽의 피리를 불었다. 1993년 역대 신인 최고 몸값 2억 원을 받고 입단한 좌완 파이어볼러 유망주와 1994년 1차지명한 루키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상국 단장 역시 LG에서 "트레이드 불가"를 외칠 카드를 슬쩍 꺼내며 멍군을 불렀다.

이때부터 이 선수, 저 선수 어지럽게 카드들이 오갔다. 해태에서는 신동수 윤재호 문희수 박철우 정성룡 김병조 등등, LG에서는 박종호 이병훈 박준태 최훈재 등등….

하지만 협상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2시간쯤 지났을까.

“허허 참. 이러다 날 새겠소. 이제 안 될 카드는 빼고 될 카드만 골라 봅시다. 한대화 신동수에 윤재호를 묶을 테니까 김상훈 이병훈을 주소.”

이 단장은 본론으로 들어가 한대화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마치 LG의 간판스타 김상훈도 대수롭지 않은 선수처럼 가볍게 이름을 거론했다. 협상의 귀재다웠다.

김상훈은 깔끔한 외모와 부드러운 타격으로 '미스터 LG'로 불리며 팀 간판스타로 자리잡고 있었다. ⓒLG트윈스
“김상훈을?”
“그렇지. 김상훈!”

LG는 이 트레이드 협상에서 김상훈 이름을 올릴 계획은 없었다. 당연했다. 별명이 ‘미스터 LG’일 정도로 구단의 얼굴이자 간판스타였다.

김상훈은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를 지낸 엘리트 선수 출신. 1984년 MBC 청룡에 입단한 뒤 줄곧 잠실의 1루수 자리를 지켜온 터줏대감이었다. 김재박과 이광은이 떠난 뒤 선수단의 맏형 노릇을 하고 있었다.

1988년에는 타격왕에 올랐고, 1990년에는 LG의 첫 우승을 이끌며 1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기량도 출중했다.

잘 빠진 몸매에 핸섬한 마스크. 부드러운 타격폼만큼이나 온화한 성품에 친화력도 좋아 선수단과 프런트 구성원들 모두 좋아하는 선수였다. LG의 남녀노소 팬들이 두루두루 사랑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MBC 청룡 시절 김상훈이 몰려든 어린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그는 청룡 시절부터 LG 시절까지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스포츠서울

하지만 해태의 목표는 김상훈이었다. LG로선 김상훈을 내주지 않으면 한대화를 영입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최 부장 혼자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위의 트레이드 협상 대화는 최종준 운영부장이 훗날 단장이 된 뒤 쓴 책 ‘최단장의 LG 야구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과 최근 최 전 단장과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한 것이다.)

LG 트윈스 이광환 감독. 1994년부터 LG 선수단의 모자챙이 검정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스포츠서울

◆이광환 감독의 반발과 재협상

휴대폰이 없던 시절. 여의도 본사 사무실로 들어온 최 부장은 잠실구장의 이광환 감독 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해태와 진행한 트레이드 협상 내용을 알렸다. 평소 온화한 성격의 이 감독이 펄쩍 뛰었다.

“나는 반대요. LG 간판 4번타자인데 상훈이를 보내는 건 무리인 것 같소. 그리고 한대화는 허리가 안 좋아서 불안한 구석도 있고.”

강경한 목소리였다.

사실 이광환 감독은 한대화와 오래 전 사제의 인연을 맺었고, 개인적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이였다.

한대화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에서 '약속의 8회'에 결승 3점홈런을 날리면서 국민적 영웅이 된 뒤 1983년 OB에 입단했을 때 타격코치가 바로 이광환이었다.

1986년 초 한대화가 OB 김성근 감독과 불화 속에 해태로 트레이드되려는 시점에 이광환은 코치직을 내려놓고 일본 세이부 라이언스로 연수를 떠났다. 연수를 가기 전 한대화에게 “절대 다른 팀으로 가지 마라”며 자신이 돌아올 때 OB에서 함께하자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이광환은 한대화를 아꼈고, 한대화는 이런 과정 속에서 인생 선배이자 야구인 선배 이광환에 대해 더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하지만 공과 사, 과거의 약속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 감독은 OB에서 한대화를 지키려고 했던 것처럼, 이번엔 김상훈을 LG 프랜차이즈 스타로 지키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LG 구단은 고민에 빠졌다. 김상훈이 좋은 선수, 좋은 사람인 건 맞지만 팀 체질 개선을 위해 강단있는 한대화의 영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미 팀의 체질개선을 위해 이종도 수석코치를 비롯한 코칭스태프도 대거 물갈이한 마당에 팀의 강력한 변화를 추구해 긴장감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다고 봤다.

LG 트윈스 김상훈이 타격하는 장면. 포수는 삼성 이만수. ⓒLG트윈스

LG가 고민하는 지점은 또 있었다. 김상훈이 1993년 전반기(4~6월 타율 0.322)에 맹활약하다 후반기(7~9월 0.244)에 매우 부진했다는 점이었다.

LG가 시즌 중‧후반 상승세로 선두 해태를 1게임차까지 뒤쫓으며 1위 경쟁을 했지만, 막판 급격한 부진 속에 2위는 물론 잠실 라이벌 OB에 3위 자리마저 내주고 4위가 되고 말았다.

팀 내부적으로는 4번타자인 김상훈의 부진이 컸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특히 김상훈은 플레이오프 5경기에서 18타수 2안타로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삼성에 2승3패로 물러난 결정적인 요인이 김상훈의 부진이었다고 분석했다.

LG로선 김상훈에 대한 영양가 논란까지 일어나면서 찬스에 강한 ‘해결사’ 한대화 카드에 더욱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김상훈과 한대화는 1960년생으로 동기. 하지만 [엘팬알백] ⑪화에서 설명했듯이 김상훈은 동대문상고 시절 대학 진학이 1년 유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연세대로 진학하려다 동대문상고 측의 내부 문제(선수 끼워팔기)가 꼬이면서 원서 발급이 안 돼 1년을 허송세월했다. 결국 1년 후 부산의 동아대로 진학하는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

그래서 둘은 대학 학번과 프로 입단에서 1년 차이가 난다. 하지만 고교 시절 청소년대표를 함께하면서 알게 돼 동기처럼 말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어쨌든 이번 트레이드 논의는 한대화와 김상훈을 축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LG 구단 수뇌부는 회의를 통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프랜차이즈 스타인 김상훈을 트레이드 ‘불가’에서 ‘가능’ 카드로 결론 내리고, 해태 측에 제시할 수정 카드까지 들고 트레이드 2차 협상 테이블로 나갔다.

1993년 11월 30일자 스포츠서울 1면. LG와 해태의 트레이드가 불발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트레이드 2차 교섭…허문회 때문에 협상 불발?

11월 29일 서울 마포 가든호텔. 1차 협상을 했던 장소에서 LG 최종준 운영부장과 해태 이상국 단장이 3일 만에 다시 마주앉았다.

여기서 전문에 설명한 대로 최 부장이 이 단장에게 새로운 카드를 내밀었다. 1차 협상에서 거론된 윤재호 대신 허문회 신인 지명권을 양도해 달라는 요구였다.

LG로선 김상훈이 해태로 떠날 경우 새로운 1루수 주인이 필요한데 팀 내부적으로 마땅한 후보가 없었다. 국가대표 출신의 허문회를 받아온다면 키워볼 만한 재목이라고 판단했다.

트레이드 추진에 대해 마뜩잖아하던 이광환 감독에게도 이 같은 계획을 알리며 어느 정도 양해를 구한 상태였다. 만약 허문회 카드가 성사되지 않으면 트레이드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때만 해도 신인드래프트에서 2차지명 마지막 순번인 6라운드에 찍은 단국대 1루수 서용빈은 존재감이 없었다.)

아마추어 강타자 출신의 허문회는 1993년말 해태에 지명된 뒤 곧바로 LG로 트레이드됐다. 훗날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된다. ⓒ스포츠서울
“윤재호 대신 허문회로 바꿔 주면 어떻겠소.”

LG 최 부장의 수정 제안에 이번엔 이 단장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허문회? 허문회는 안 되지.”
“아니, 김상훈이 가면 1루수가 겹칠 텐데 어떨지도 모르는 지명신인도 줄 수 없다니요.”
“어쨌든 허문회는 절대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걔가 어떤 선순데. 다시 생각해 보고 연락주소. 더 이상 진전이 안 되면 한대화는 도중하차시키는 수밖에 없겠구먼.”

도중하차라는 말은 한대화를 다른 구단에 보내겠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당시 쌍방울과 태평양 등 다른 팀에서도 한대화가 트레이드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구체적인 맞교환 선수 이름까지 거론하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고향팀 빙그레와도 협상을 재개할 가능성은 열려 있는 상황이었다.

이번엔 김상훈 때문이 아니라 아직 해태에 입단도 하지 않은 허문회로 인해 두 구단의 트레이드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최 부장과 이 단장은 그렇게 다시 헤어졌다.

이튿날 언론에서는 ‘트레이드 불발’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이광환 감독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트레이드가 무산된 것으로 확신한 이 감독은 잠실 실내연습장에서 훈련 중이던 김상훈을 감독실로 불렀다.

“이제 모든 게 끝났으니 운동에만 전념해라. 넌 영원한 미스터 LG야.”

이 감독은 그동안 트레이드설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던 김상훈을 다독였다.

김상훈과 한대화는 1960년생으로 1978년 청소년대표를 함께하며 알게 된 동기 사이였다. 그로부터 15년 후 맞트레이드 상대가 되는 운명을 겪는다. ⓒ스포츠서울

◆“트레이드 그대로 진행합시다”…LG와 해태 초대형 트레이드 성사

‘한대화라는 대어가 왔다면 우리 팀은 어떻게 달라질까. 아니, 프랜차이즈 스타 김상훈을 지킨 게 그래도 나은 건가?'

LG 최종준 운영부장도 해태와 트레이드가 무산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속으로 이런저런 가정법을 쓰며 트레이드 협상 불발의 손익계산서를 곱씹고 있었다.

달력이 한 장 더 넘어갔다. 12월 1일이었다.

이때 구단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렸다. 앞서 설명한 대로 해태 이상국 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단장은 특유의 능청스러운 화법으로 변죽을 울렸다.

“한대화가 서울 가면 잘할 텐데 참 아쉽게 됐구먼요.”

트레이드가 최종적으로 불발된 것처럼 얘기했다. 이에 최 부장은 허허롭게 웃었다.

“이 단장하고 좋은 작품 하나 남기나 했는데 어쩔 수 없게 됐네요. 다음에 멋지게 한번 합시다.”

그러자 이상국 단장은 “내가 졌소”라면서 껄껄 웃었다.

"허문회도 줄 테니 김상훈하고 한대화하고 트레이드를 합시다. 신동수 이병훈도 그대로 묶어서."

해태 측에서 허문회 카드를 받아들여 트레이드를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최 부장은 곧바로 구단 수뇌부에 이 같은 사실을 알렸고, 이광환 감독을 다시 설득해 마침내 트레이드에 방점을 찍게 됐다.

그 이후 최종적으로 해태가 2차 5라운드에 지명한 신인 내야수 김봉재(성남고-계명대) 지명권까지 추가로 넘겨주는 걸로 합의하면서 3대2 트레이드는 결국 4대2 트레이드로 수정됐다. KBO는 LG와 해태의 양도양수 계약서를 전달받은 뒤 12월 4일 트레이드를 승인해 역사적인 빅딜이 완성됐다.

(김봉재는 LG 유니폼을 입었지만 2군에서 뛰다 군복무 기간 방출돼 KBO 1군 기록은 없다.)

1993년 LG와 해태의 3대2 트레이드에 포함돼 유니폼을 갈아입은 우타거포 이병훈(왼쪽)과 좌완투수 신동수. ⓒ스포츠서울

'미스터 LG' 김상훈과 해태 '해결사' 한대화의 운명이 바뀐 순간이었다.

이 트레이드에 엮인 해태 좌완 신동수와 LG 외야수 이병훈도 주전급 선수여서 두 구단이 단행한 1993년 12월의 '3대2 트레이드'는 그야말로 야구계에 초대형 태풍을 몰고 왔다. 1988년 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롯데 최동원 김용철과 삼성 김시진 장효조 트레이드에 버금가는 폭발력을 낳았다.

양 구단 팬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프랜차이즈 스타를 보냈다는 사실에 화가 난 팬들은 구단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온갖 욕설과 함께 울분을 토해냈다. 구단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트레이드를 추진한 해태 이상국 단장과 최종준 부장에게 전화가 연결되면 직접적으로 “집을 폭파해버리겠다”거나 “죽여버리겠다”며 협박을 하는 극성팬들도 있었다.

언론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줬다’는 식으로 해태가 이익을 본 거래로 평가했다. 1993년 우승을 한 해태가 팀의 숙원이던 왼손 1루수 강타자를 얻어 다시 왕조 건설이 가능하다는 견해였다.

LG 유니폼을 입고 배트로 타이어를 치며 훈련을 하고 있는 한대화. ⓒ스포츠서울

'LG가 손해라고?'

이 같은 세간의 평가에 KBO리그 최고의 3루수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한대화로선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죠. LG 가서 성적이 안 좋으면 내가 죽겠구나 싶어 긴장을 풀지 못했어요. 무조건 (김)상훈이보다는 잘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죠. 오히려 저한테는 동기부여가 됐어요. 그러면서 1994년 저도 개인적으로 더 반등을 하게 됐죠.”

한대화는 해태의 ‘검빨 유니폼’에서 LG의 '줄무늬 유니폼'으로 갈아입게 된 32년 전 겨울날을 차분하게 회상했다.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뒤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김상훈. ⓒ스포츠서울

잠실이라는 정든 둥지를 떠나 광주로 내려가게 된 김상훈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김상훈은 1984년 MBC 청룡에 입단해 10년간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93년 연봉도 6000만 원으로 그해 LG 구단 내 최고연봉 선수였다. 그동안 구단과 큰 마찰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서운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현재 경기도 시흥시청 인근에서 ‘장현족발’을 운영하고 있는 김상훈은 트레이드 당시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트레이드 소문은 계속 있었고, 언론에서도 이런저런 기사가 연일 흘러나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긴 했어요. 하지만 막상 트레이드가 됐다는 소식을 접하니 섭섭하더라고요. 길거리에서 지나가다 만나는 LG 팬들 중에서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굉장히 화를 내시기도 하고…. 하지만 주변 선후배들이 ‘어디로 가든 야구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조언을 해줘 마음을 잡고 광주로 갈 수 있었죠.”

LG는 ‘해결사’ 한대화를 영입하면서 팀 전력의 틀을 다시 짜게 된다. 더군다나 1994년에는 해태에서 데려온 허문회뿐만 아니라 굵직한 신인들이 대거 가세하기에 새로운 희망을 안고 새 출발을 준비할 수 있게 됐다.

[엘팬알백] ㉟편에서 계속

1994년 혜성처럼 등장해 LG의 '신바람 야구' 돌풍을 이끈 신인 삼총사. 김재현, 서용빈, 유지현(왼쪽부터)이 활짝 웃고 있다. ⓒ스포츠서울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