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하는 보상은 이제 그만 [세상에 이런 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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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맞이해 윤석열 대통령은 일선 군부대와 경찰서를 방문해 장병들과 경찰관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군인과 경찰관을 '제복 영웅'이라고 칭송하기 전에 이 부끄러운 역사를 먼저 청산해야 하지 않을까? 헌법 개정은 어렵더라도 최소한 유족들의 위자료 청구라도 보장하는 국가배상법 개정안이 하루빨리 국회를 통과하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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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맞이해 윤석열 대통령은 일선 군부대와 경찰서를 방문해 장병들과 경찰관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제복 입은 영웅들에게 무조건적인 충성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보상 등을 통해 뒷바라지하겠다.” 윤 대통령이 남긴 ‘정당한 보상’이라는 말에는 우리나라의 부끄러운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현행 헌법과 법률상 군인과 경찰관은 복무 중 국가의 잘못으로 사망하거나 다쳐도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수 없고 국가가 주는 ‘보상’만 받을 수 있다. 국가의 잘못으로 피해를 본 국민이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국가배상청구권은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다. 하지만 유독 군인(군무원 포함)과 경찰관만 누리지 못하도록 규정해둔 것이다. 이 규정에는 유신정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베트남전쟁 파병 이후 전사와 부상 군인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던 1967년, 박정희 정권은 국가배상법 개정으로 군인의 국가배상청구를 막았다. 그 당시 국회 회의록에는 부당하게 지급되는 국가배상금을 가능한 한 절약하고 국고 손실을 막는 것이 법 개정 취지이며, 국가배상청구 중 약 90%가 군인 관련 사건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군인 및 유족들은 이 조항이 평등권, 인간의 존엄성 등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1971년 당시 위헌심사권을 가진 대법원은 이 국가배상 조항을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박정희 정권은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위헌 의결 정족수를 높이는 무리수를 두었지만, 대법원은 최후의 보루 역할을 감당했다. 국가가 주는 보상과 불법행위로 인해 발생한 손해를 전보하는 국가배상은 상이한 측면이 있어서 이중 배상이라고 할 수 없으며, 국가 부담이 크다는 것이 국가배상 책임을 제한할 근거가 되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 조항을 아예 헌법에 넣으면서 경찰공무원까지 국가배상을 금지했다. 16명 대법관 중 위헌 의견을 낸 9명은 유신헌법에 따라 1973년 3월 진행된 재임용 절차에서 모두 탈락했다. 1977년 대법원은 국가배상법 조항에 대해 합헌으로 판례를 변경했다. 이 규정에는 기본권의 최후 보루로서 사법부의 역할을 포기한 굴욕적 역사도 새겨져 있다.
말뿐인 ‘제복 영웅’ 칭송
2016년 3월24일 대한민국 육군 홍정기 일병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제때 치료받지 못해 입대 7개월 만에 사망했다. 유족들은 소속 부대가 환자를 상급 병원에 빨리 보내지 않고 며칠간 부대 안에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며 2019년 3월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서울중앙지법은 2023년 10월13일 원고 패소 판결했다. 군인의 국가배상청구를 금지한 조항이 유족들의 국가배상까지 막고 있다.
법무부는 2023년 5월 전사·순직한 군경의 유족이 재해보상금 등 보상과 별개로 국가에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도록 국가배상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제대로 된 논의를 거치지 못한 채 21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다. 22대 국회에서 같은 취지의 법안이 발의되어 있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자 홍정기 일병의 유족들이 9월10일 3당 대표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유신정권의 어두운 그림자와 사법부 굴욕의 역사가 담긴 군인 및 경찰공무원 국가배상 금지 조항은 아직도 최고법인 헌법에 박혀 있다. 군인과 경찰관을 ‘제복 영웅’이라고 칭송하기 전에 이 부끄러운 역사를 먼저 청산해야 하지 않을까? 헌법 개정은 어렵더라도 최소한 유족들의 위자료 청구라도 보장하는 국가배상법 개정안이 하루빨리 국회를 통과하길 기원해본다.
최정규 (변호사·⟨얼굴 없는 검사들⟩ 저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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