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윤의 부티크] '좋아요' 9000여개 넘은 박서보 화백 게시글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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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한테 메시지가 왔습니다. “선배, 이거 보셨어요? 박서보 쌤이요!” 그녀가 전송한 캡쳐 파일은 박서보 화백님의 인스타그램 포스팅이었죠. “쌤께서 선배가 쓴 기사 캡쳐해 올리셨더라고요. 인터뷰하신 글이라면 쌤도 기사 나올 거라 예상하셨겠지만, 이건 그런 것도 아닌데 쌤이 직접 올리셨다니 더 의미 있게 느껴져 보내드려요!”
무려 박서보 화백님이라니! 추상 미술의 거장이자 전 세계에 단색화 열풍을 이끈 주인공이시죠. 24일 기준 4만 2700여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화백님께서 공유해주신 이 게시물엔 9000여건이 넘는 ‘좋아요’가 붙어 있었습니다. 포스팅의 내용은 지난 5월 독일 함부르크에 문을 연 몽블랑 하우스(Montblanc Haus)를 찾은 뒤 작성한 기사였습니다. 박물관 내부 모습과 니콜라 바레츠키 몽블랑 CEO 인터뷰 중에서 박서보 화백님에 관한 내용을 발췌해서 올려주셨더라고요.
사실 제가 해외 출장이다 뭐다 해야할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근 몇 달간 개인 소셜 미디어까지는 돌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구순(九旬)이 넘은 연세에도 열정적인 작업 활동을 하고 계신, 저보다 몇배는 바쁘실 화백님께서 직접 제 결과물을 올려주시다니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가 미술 담당이 아니라 화백님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제가 맡고 있는 럭셔리 브랜드 대부분이 갤러리·미술관을 운영하거나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후원하고 있어 미술 관련 이야기를 자연스레 접하게 되거든요. 어깨너머로 자주 마주한 작품의 주인공의 포스팅을 보니 왠지 ‘응답’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살아있는 전설’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구나…를 실감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화백님께서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유해주신 부분은 이랬습니다.
>>그중에 한글이 눈에 띄니, 바로 ‘단색화’의 대가 박서보 화백이 아내 윤명숙 작가에게 보낸 엽서였다. 박서보 화백이 아내 윤명숙 여사에게 1961년 파리에서 보냈던 엽서와 60년 뒤인 2021년 서울에서 보낸 엽서가 나란히 전시돼 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꾹꾹 눌러쓴 손 편지가 전하는 강한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의 안부는 곧 연서(戀書)였다.
평소 몽블랑 펜을 쓰는 박서보 화백의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된 몽블랑 본사 측에서 단번에 반해 이번 몽블랑 하우스에 친필 보관을 의뢰하게 됐다고. 세월이 닿아 곱게 색이 물든 피부와 작품에 혼을 쏟는 동안 솟은 핏줄이 몽블랑 산맥의 지지 않는 열정을 보는 듯했고, 박 화백의 손끝에서 말쑥한 몽블랑 펜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세대를 잇는 또 다른 인연의 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다시 한번 반했다고 한다.
바레츠키 사장은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박서보 화백이 아내에게 보낸 엽서에서처럼 글쓰기는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고, 누군가에게 외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며 실존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다양한 문화의 여러 글자를 전시함으로써 다양성을 표방하고 싶었다”면서 “동시에 미국과 유럽, 한국 등 동양 예술가의 그림이나 음악 다양한 작품뿐만 아니라 글씨를 통해서도 예술성이란 공통분모를 발견하고, 전 세계 방문객들이 많은 영감을 받길 바란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아흔 한살(신문 나이 기준)의 노장 중의 노장께서 꾸리시는 인스타그램 계정이라니! 젊은 ‘애들’이나, 혹은 연예인, 혹은 인플루언서를 자처하는 이들만의 매체라며 그 가치를 폄훼하던 몇몇 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던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인플루언스’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는 ‘인플루언서’도 있긴 하지만, 이렇게 ‘진정성 있는’ 인플루언서를 만났을 때의 파급력과 영향력을 새삼 깨닫습니다.
당시 출장은 일명 몽블랑 펜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몽블랑 하우스’를 찾아서 발굴(?)한 내용입니다. 박서보 화백님 손 글씨가 브랜드 역사를 대표하는 서른 명 정도의 위인들 사이에서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까짓 글자가 뭐...라고 할지 몰라도 글자로 그들의 습성이나 성격 같은 것을 파악하는 요즘, 기록 유산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어 보였습니다.
박서보 화백이 아내에게 쓴 엽서는 왜 독일 몽블랑 하우스에 전시됐을까
18세기 프랑스 문호 볼테르의 정석 같은 단정한 글자는 가장 오래된 시기인데도 여전히 마르지 않는 샘 같이 펄떡였고요, 죠지 버나드 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찰스 디킨스,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토마스 만, 애거서 크리스티, 버지니아 울프 같은 철학자·대문호들과 세계적 산업 디자이너 지오 폰티, 탐험가 로널드 아문센, 스파이크 리 영화감독 등의 필체도 독일 현지에 보존돼 있었습니다.





또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우아하고도 빽빽한 필기체와 당대 미남으로 소문났던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가 자신의 ‘콧날’을 사인으로 썼다는 흥미로운 장면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디자이너 칼 라커펠트는 누가 디자이너 아니랄까 봐 편지지를 꽃 모양으로 꾸며놨더군요.
박서보 화백님이 2021년 아내에게 보낸 엽서엔 국립현대미술관이란 글자가 박혀있었습니다. 한글로 된 국립현대미술관이 독일 함부르크에도 남아있게 되다니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속 타임슬립처럼 시공간을 넘어 한국과 독일을 잇는 특급 우편을 날으는 양탄자 삼아 타고 온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요.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이면서도 지난 2019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The untiring endeavorer)’라는 제목으로 박서보 화백님의 전시회를 열기도 했죠.
현장은 몽블랑 펜의 애용 116년 역사의 브랜드를 대표하는 마이스터스튁을 비롯하여 여러 필기구를 제작하는 매뉴팩처와 몽블랑 본사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유명 건축 사무소 니에토 소베하노 아키텍토스가 몽블랑의 유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브랜드의 컬러인 블랙과 흰색을 조합해 설계한 3600㎡(약 1089평) 면적의 3층 건물입니다.
몽블랑 펜 가격은 여느 펜이라고 하기엔 비싼 편이지만, 왜 그렇게 비쌀 수밖에 없는 가를 박물관의 여정을 통해 꽤나 설득력 있게 조명합니다. 잉크가 새지 않는 펜을 발명하는 데서 시작해 100년 넘는 역사 속 글쓰기의 위대함을 보존하기 위해 각종 도전을 하죠. 18K 금을 재료로 펜촉(닙)을 만들면서 갈고 다듬는 모든 일일이 사람 손으로 작업하죠. 필기감을 위해 수백번 실험을 하고 수천번 닙을 굴리고 다듬는 작업은 물론입니다. 그 덕분에 몽블랑 하우스에 글씨가 보존된 인사들 뿐만 아니라 앤디 워홀 같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등이 마니아를 자처하고 나섰죠.





몽블랑 하우스에 들어서면 글쓰기에서 영감 받은 각종 미디어 아트 작품과 함께 전 세계 정상들이 세계를 뒤흔들만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사용했던 몽블랑 펜과 당시 사인 모습이 눈에 띕니다. 또 형상화, 절단, 연마 등 몽블랑 펜이 제조되는 150여개 과정을 압축한 12가지 주요 단계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몽블랑 하우스에선 보는 것에 이어 몽블랑 필기구를 테스트해 볼 수도 있고, 자신의 생각이 담긴 엽서를 세계 어디에나 보낼 수 있습니다. 니콜라 바레츠키 몽블랑 CEO는 “글쓰기는 사람의 발자취를 담는다”면서 “글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는 인간 고유의 유구한 문화유산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설립 취지를 말했습니다.
글쓰기는 사람의 발자취를 담는다는 바레츠키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박서보 화백님의 계정을 다시 살피게 됐습니다. 제가 미리 화백님의 발자취를 알아보지 못하고 따라잡지 못했다는 생각에 냉큼 ‘팔로우’를 눌렀죠. 일상은 물론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짧은 소회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뿐만 아니라 생활 태도에 ‘좋아요’를 누르고 공감하는 이들이 상당하다는 걸 알게 됐죠. 화백님을 가리켜 흔히 ‘치유의 예술 작가’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같은 수식어가 붙는 데요. ‘수행자’ 같은 화백님의 말씀과 보는 자체로 ‘치유’인 포스팅을 잠깐 보고 가실까요.

“매화가 고개를 들었다. 봄이 왔다.”
“내 그림을 보고 마음이 평온해졌다는 사람이 많은데, 소통으로 평온을 전하는 오은영 선생이 기지를 찾았다. 평온이 배가 되는 오후다.
“작은 아들 내외가 중정에 그늘막과 쉼터를 만들었다. 아내는 거기서 책을 읽는다. 나도 모처럼 햇볕 아래 신문을 펼쳤다. 마스크 없이 정원에 나오니 코로나 시대가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곧 그리 되기를 바란다.”


기부를 항상 실천하시는 대로 우크라이나 참상에 대해서도 기꺼이 기부를 하시면서 쓴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그린 나의 원형질 시리즈는 한국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외친 외마디 절규였다. 전쟁은 혹독하고 비참했다. 나를 가장 어둡고 깊은 나락으로 떨구었다. 이후 70년간 전쟁이 멈춘 적은 없다. 총성은 도처에서 이어졌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오늘은 실시간으로 내 휴대폰으로 전해지고 24시간 텔레비전 화면을 채운다. 보지 않아도 될 비극에 아이들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전쟁을 멈춰야 한다. 침략전쟁은 범죄다. 나는 비극적인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5천만 원을 우크라이나 정부에 지원하였다.
“My <Primordialis> Series, drawn from the late 50s to the early 60s, was a scream while experiencing the horrors of the Korean War. The war was harsh and miserable. It plunged me into the darkest and most bottomless abyss. The war has never stopped in the next 70 years. Gunfire continued everywhere. However, today in Ukraine, it is delivered to my cell phone in real-time and fills the screen of television 24 hours a day. Children are being exposed to tragedies that should not be seen. The war must be stopped. War of aggression is a crime. I donated 50 million Won to the Ukrainian government to end this tragic war.”
몽블랑 바레츠키 CEO는 지난 5월 저와의 만남에서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박서보 아내에게 보낸 엽서에서처럼 글쓰기는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고, 누군가에게 외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며 실존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했는데요. 그 뜻을 박서보 화백님께서 게시물 ‘공유’를 통해 또 하나의 담론의 장을 만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위의 게시물에서도 보셨지만 박서보 화백님께서 아내 윤명숙 작가님께 보냈던 엽서 내용을 한 번 다시 보실까요? 그의 글을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여보
얼마 전에 당신 책이 출판되었지.
내가 쓴 축하편지가 책의 서문으로 나왔고
내가 외국에 나가기만 하면 엽서를 잔뜩 사서 거이
매일 당신한테 소식 전하곤 목이 빠져라 답장을
기다리던 기억이 났소.
그런대 이제 내 나이가 90세, 당신이 82세
편지할 새도 없이 매일 붙어 있는 처지가 되었구려.
이 편지가 마지막 편지가 되려나?
그럼 이 말을 꼭 해야 겠네. 오랜 세월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2021.8.29, 박서보가”
‘최보윤의 부티크’는...
전 세계 럭셔리 트렌드부터 국내 대중문화와 라이프스타일 소식 등을 이해하기 쉽고, 심도 깊게 짚어 드리는 ‘뉴스레터’입니다. 또 여러분에게 감동을 준 이들을 만나는 코너도 꾸립니다.
부티크는 ‘富’(부)를 이야기하는 ‘부티크’이자, 프랑스어로 ‘당신’이란 뜻의 ‘VOUS’(부)를 모시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1920년대 전 세계를 대표하는 예술문화계 인사들과 석학들이 모였던 프랑스의 ‘살롱’이자 우리네 ‘사랑방’을 표방합니다. 직접 발로 뛴 기사들과, 기사에서 못다 전한 이야기를 부티크에서 차 한잔 마시며 대화하듯 풀어낼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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