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치 조망 "세속에 물들지 않은 시인이 되고 싶었다"
2001년 실천문학사에서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를 출간한 이후 오랜 부침의 시간을 거듭해온 광주 출생 나종영 시인(전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이 23년만에 세번째 시집 ‘물염勿染의 노래’를 문학들 시선 두번째 권으로 펴냈다.
강산이 두번 바뀔 동안 그는 시의 자리에 있었으나 다만 시집만 내지 않았을 뿐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랜 침잠의 시간들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며 세상에의 관조를 위한 샘을 깊이 파내려가고 있었을 뿐이다. 다작으로 시의 가치를 손상하는 시풍이 많은 가운데 그의 긴 호흡은 어떠한 삶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현자같은 모습이 아닐까 싶다. 다분히 현실 속 참여적 경향을 띄지만 어느덧 지역 진보문단의 모호해졌다. 하지만 거대한 물살을 바로잡는 중추로서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그가 1985년 창비에서 펴낸 첫 시집 ‘끝끝내 너는’을 통해 정치적 사건들로 인해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투쟁적인 면모만을 강조하던 민중시와는 궤를 달리하는, 그만의 독특한 심상을 충분히 녹여냈고, 두번째 시집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에서는 그의 맑고 순정한 시정신이 그대로 노정됐었다. 그는 계간문예지를 통해 문학과 지속적으로 수신호를 주고 받아왔던 것은 사실이다.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 간 출간 햇수는 무려 16년차가 난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최소한의 시집 발간을 통해 독자들에게 깊은 파동을 안겨주는 데 더 골몰하는 듯하다.
이번 시집은 그가 후반기로 접어든 삶의 시간들을 어떤 자세로 임해가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시집 제목인 물염은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시인 자신이 자신을 향해 그런 염원으로 행하며 나아가되, 결기를 다지는 의지의 표상으로 읽힌다.
시인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지 않고 경제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늘 은행인의 삶을 살아오면서 정신적 본업인 진보문학의 마당에서 한번도 떠나지 않고 그 길을 확신을 가지며 걸어왔다. 1980년대 ‘5월시’ 동인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땅의 진보와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을 갈구하며 문학적 행간을 다하려 노력을 했다. 물론 거기까지 도달하기까지 16년이나 혹은 23년이 소요되는, 장거리 마라톤과 같은 시적 페이스를 보여줬다. 보통 시인들의 출간과는 다른 형태다. 시인은 거의 40년 동안 두 권의 시집밖에 안낸 것이니, 시집 권수로만 보면 독자들에 대해 인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시편들을 읽으면 그의 삶이 실핏줄처럼 모두 드러나 보여 그 긴 행간에 대한 보상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다.
<@1><@2>그러나 시인은 ‘왜 그렇게 오래 걸렸냐’는 물음에 첫번째로 게으른 탓을 꼽았고, 두번째는 시인으로서의 삶은 평생 쓰는 것이니 시집이 빨리 나오고 늦게 나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시각을 내비쳤다. 시인을 5년만 하고 말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깨달은 자로서 쓴 시로 봐주면 좋겠다는 반응이다.
고희 기념 시집이라고 하는 시인은 칠십이 돼서 낸 시집이 아니라 시집을 내다보니 어느덧 삶이 칠십 고희가 됐다고 일갈한다. 다시 한번 ‘물염’을 시제로 택한데 대해 겸손한 삶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한쪽으로는 치우치지 않는 지성의 삶에 차용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화순 물염정이 갖는 의미를 생각했다.
송정순이 16세기 중엽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물염마을에 건립한 정자인데 어지러운 시대, 권력을 버리고 낙향해 세상의 부조리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했다. 최산두나 조광조 김삿갓 등 모두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세상의 온갖 욕망을 버리며 자기를 닦는 공간으로 활용됐기에 여기서 시제를 차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 빈 속의 대나무도 몇 번은 둥글게 휘어져야 제 몸의 마디를 지킨다’(‘청죽靑竹’ 일부)거나 ‘그대는 바람 소리를 놓아두고 떠났다/ 하얀 눈길 위로 발자국 하나 없이/그대 가는 길이 훤히 보여 눈이 아프고 시리다’(‘물염정에 가서’ 일부)는 그가 얼마만큼 일흔의 나이에 접어들어 삶의 시간들을 깊이있게 천착하고 있는 가를 드러낸다.
시집은 ‘물염의 시’를 비롯해 ‘편백 숲에 들다’, ‘무등산은 어디서 보아도’, ‘어머니와 초승달’, ‘길은 멀어도’ 등 제5부로 구성됐으며, 그동안 푹 익혀온 시편 90여편이 수록됐다.
시인의 서문은 그가 이번 시집을 생각하는 문맥이 모두 드러난다. 시인은 “그동안 나는 그냥 시를 쓰는 사람보다도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시대를 살아오기를 염원해 왔다. 사물과 사람에 사랑, 겸손, 겸애와 더불어 이 훼절의 시절에 세속에 물들지 않은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전했다.
한편 출판기념회는 26일 오후 4시 저자 사인회(오후 3시)와 함께 동구 금남로 소재 5·18민주화운동기록관 7층 다목적 강당에서 열린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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