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글·AI 주목해야”···세계 중앙은행 총재들의 이유 있는 오지랖[★★글로벌]
빅테크 출현, 통화정책 흡수에 걸림돌
강남 편중화는 경제 전반에 ‘나쁜 균형’
물가·고용 중앙은행 역할과 무관치 않아
인플레이션, 실업률과 같은 딱딱한 데이터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요즘 미국 연방준비제도, 유럽중앙은행, 한국은행, 캐나다은행 등 주요국 통화 정책 결정자들의 입에서 인공지능과 강남 집값, 구글 등 현실 밀착형 단어들이 자주 언급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AI로 대변되는 폭발적 기술 진보로 인해 과거 중앙은행의 금리 결정 과정에서 크게 고려되지 않았던 이슈들이 통화 정책에서 불확실성을 키우거나 혹은 정반대로 정책 효과를 키우는 변수로 고려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남 집값으로 대변되는 과열 경쟁의 폐해는 통화 정책이 추구하는 물가 안정을 어렵게 하고 노동시장의 불균형을 가속화할 수 있습니다.
최근 공개된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티프 맥클렘 캐나다은행 총재, 리사 쿡 미 연준 이사의 발언을 통해 왜 중앙은행 인사들이 사회 현안에 보폭을 넓히고 있는지 그 속내를 들여다 봅니다.
지난달 20일 라가르드 총재는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에 참석해 기술 진보가 가져오는 경제 구조의 변화에 통화 정책이 어떻게 함께 진화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연설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그녀의 발언 중 “세계 경제가 1920년대 대공황과 비슷한 압력에 직면해 있다”는 자극적인 부분만을 뽑아 보도했는데, 그녀의 핵심 메시지는 이게 아닙니다.
바로 기술 진보와 구글 등 초거대 디지털 플랫폼 기업의 출현이 통화 정책의 시장 반응 속도를 지연시키는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죠.
예컨대 디지털 플랫폼과 클라우드 서비스를 지배하는 글로벌 3대 기업인 구글, 메타, 아마존을 일명 ‘하이퍼스케일러’라고 부릅니다.
이 3개 기업이 클라우드 시장의 65% 이상을 지배하고 있고, 구글이 검색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한 현실에서 그녀는 시장 지배력이 큰 빅테크들이 중앙은행의 금리 변동에 덜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지적합니다.
예컨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더라도 고(高)마진 사업구조를 가진 빅테크들은 현금 보유량이 풍부해 금리 인상으로 불리해진 외부 자금 조달 여건에 덜 구속된다는 것입니다.
기업이 고금리 환경에 대응해 대출을 자제하고 생산과 투자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인플레이션 완화에 기여하는 공식이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이죠.
라가르드 총재는 디지털 경제로 세계 경제의 구조가 변화하면서 ‘승자다식(Winner Takes Most)’ 방식으로 높은 수익과 풍부한 현금 보유량을 자랑하는 빅테크들이 많아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녀는 이런 빅테크들을 ‘슈퍼스타 기업’이라고 지칭하며 “슈퍼스타 기업의 우월한 효율성과 규모는 수익에서 고용이 차지하는 비중을 크게 줄여 통화 정책의 전달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통화 정책이 현실 생활에 영향을 미쳐 인플레이션에 변화를 가져오는 데 18~24개월이 소요됐지만, 기술이 경제 구조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만큼 통화 정책도 이 같은 구조 변화에 대응해 새로운 정책 툴킷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평가입니다.
티프 맥클렘 캐나다은행 총재는 지난달 20일 토론토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AI 투자가 경제 수요를 확대하고 있으며 이는 물가 상승 압박을 키울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맥클렘 총재는 “AI로 인해 더 빠른 생산성 향상을 통해 공급이 늘어나는 것보다 수요가 더 많이 증가할 수 있다”며 “이렇게 되면 단기적으로 AI 도입이 인플레이션 압박을 확대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AI 관련 기업의 빠른 성장으로 주가가 오르고 고용이 확대되면서 소비가 증가함에 따라 수요가 증대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AI 산업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수요 증가가 공급 측면의 생산성 증대를 넘어서게 되면 물가 상승 속도가 높아지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AI 관련 팽창하는 전력 수요도 인플레를 부채질하는 요인입니다.
또 디지털 집약적인 기업의 서비스 가격은 일반 상품보다 더 자주 가격이 변경된다는 점에서 AI는 시장의 가격 책정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의 평가를 빌리면 AI는 비단 물가 뿐 아니라 고용 측면에서도 중앙은행을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기술 진보가 장기간에 걸쳐서 확산돼 노동력이 조정될 시간 여유가 있었던 반면, 지금은 AI라는 혁신 기술의 도입 속도가 워낙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고용 시장에 갑작스런 충격을 줄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는 지난달 24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서울 집값을 잡기 위해 서울 강남 등 부유한 지역 출신 학생에 대한 대학 입학 상한선을 둬야 한다고 밝혀 주목을 받았습니다.
주요국 중앙은행이 금리 인하에 나선 가운데 한은 총재가 향후 통화 정책에 대한 힌트를 주기 보다는 엉뚱한 강남 집값과 대입 상한선 문제로 이슈를 몰고 다니는 게 정상적이냐는 비판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의 강남 집값·대학 입학 상한 화두는 고용 촉진과 물가 안정이라는 중앙은행의 책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서울 명문대 진학을 위해 가계가 쓰는 천문학적 사교육비와 강남·서초구 주거 노력은 가처분 소득을 악화시키고, 고용 시장에서 노동력의 사회 진입 속도를 늦추는 악순환을 유발합니다.
한국은행과 이창용 총재는 이를 게임이론에서 파생된 ‘나쁜 균형’이라는 단어로 염려하고 있는데,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계층 간 이동성이 약화돼 중산층이 얇아지고 저출산에 따른 인구 소멸 위기라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기술 진화와 관련해 이창용 총재가 던지는 화두도 흥미롭습니다. 바로 ‘돈이 움직이는 속도’입니다.
그는 최근 FT 인터뷰에서 지난 8월 글로벌 증시 대폭락과 엔캐리트레이드 청산 위험을 거론하며 이 사태가 주는 교훈으로 ‘돈이 움직이는 속도’에 대해 평가하고 있죠.
이 총재는 8월 초 대폭락 장을 주도한 주체가 ‘기관 투자자’였던 반면, 다음날 급반등을 이끈 주체가 스마트폰을 이용해 대출을 한 ‘개미투자자’였음을 환기시킵니다.
한국 시장의 강력한 디지털 기반 금융 서비스로 인해 개미투자자들이 빠르게 돈을 빌려 주식 매수에 나섰고, 이것이 한국 증시 안정성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고 긍정 평가합니다.
반대로 그는 작년 블룸버그통신과 인터뷰에선 또 다른 의미로 ‘돈이 움직이는 속도’의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미국에서 터진 실리콘밸리은행(SVB) 뱅크런이었죠.
그는 “만약 한국에서 SVB 파산과 같은 은행 위기가 터지면 미국보다 예금 인출 속도가 100배는 빠를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예컨대 디지털 뱅킹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에서는 소셜미디어로 페이크 뉴스가 퍼지면 사람들이 번개와 같은 속도로 돈을 인출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뱅크런 속도로 한국의 금융시장을 위기로 몰고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지난 1일 한 콘퍼런스에서 “AI 발전에 힘입은 생산성 증대가 가격 압력을 줄여 인플레이션 촉발 없이 근로자 임금이 인상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발언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AI의 급속한 발전이 생산성 증대를 가속화할 수 있고, 이는 기업이 보다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보다 상품과 서비스 생산에 투입되는 비용이 적어지는 만큼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상품과 서비스에 굳이 가격을 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가운데 높은 생산성을 이끄는 노동력에 대한 보상(임금 인상)이 활발해지면서 인플레 없는 경제 성장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선순환 작용이 국가 경제의 수준 전반을 향상시킬 수 있고, 생산성이 높은 기업과 산업 분야를 많이 보유한 국가는 지정학적 분쟁이나 기상 이변, 팬데믹 등 재앙적 상황에서도 더 강한 대응 능력과 회복력을 발휘합니다.
각국 중앙은행들은 인플레이션을 2% 내외로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책무를 통해 이처럼 기업이 보다 과감하게 혁신을 위해 투자하고 생산성이 높은 기업으로 변모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구글과 같은 빅테크를 언급하는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부터 강남 집값의 이창용 한은 총재에 이르기까지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하드 데이터가 아닌, 현실 밀착형 단어들을 언급하며 사회 현안에 오지랖을 넓히는 데는 이처럼 급변하는 경제구조 변화와 중앙은행의 당면한 의무가 분리되지 않고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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