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어떻게 알카라스를 키웠을까?

[최지윤의 스페인 이야기]
조코비치 등 빅3 장점 다 갖춘 알카라스
1만5천여 테니스 코트...클럽수 1천개 넘어
은퇴한 최고선수들, 아카데미서 후진양성
알카라스는 강한 정신력과 겸손함도 익혀

젊은 왕의 탄생인가

2년전, 만 19세의 나이로 US오픈 우승을 거머쥐고, 최연소 세계 1위에 올랐던 테니스 신성 카를로스 알카라스는 2024년 윔블던 대회에서 조코비치를 꺾고 또 한 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스물한 살의 젊은 선수가 작년에 이어 생애 두 번째 윔블던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조코비치는 무릎 수술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윔블던에 참가했지만, 노련한 플레이를 보이며 결승에 무사히 안착했다. 조코비치는 윔블던 7회 우승자로, 대회 최다 우승자인 로저 페더러(8회)와 타이기록을 가질 뻔했다. 그러나 무결점 테니스를 보여 준 알카라스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최상의 컨디션을 보이며 1, 2세트를 쉽게 가져온 알카라스는 3세트 타이브레이크(7-4) 끝에 정상에 올랐다.

윔블던 대회 우승을 차지한 카를로스 알카라스.  손목에는 롤렉스의 코스모그래프 데이토나라는 시계를 차고 있다. 에디션이라 가격은 9만 5천유로(약 1억원) 정도라고 한다. 알카라스는 롤렉스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사진=lasexta.com

최근 알카라스의 활약은 대단했다. 지난 6월에는 프랑스 오픈(롤랑가로스) 첫 우승을 차지했다. 반면, 열네 번의 우승 기록을 자랑하는 라파엘 나달은 팬들의 바람과는 달리 일찌감치 1라운드에서 즈베레프(0-3)에게 패하고 말았다. 나달의 안방과도 같은 롤랑가로스에서의 충격적인 탈락에 테니스 팬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엉덩이 부상으로 작년 한 해 투어에 참여할 수 없었던 라파엘 나달은 재활에 전념한 후 프랑스 오픈에 참가했지만, 자신의 기량을 뽐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스페인 현지에서는 “왕은 왕자를 위해 길을 터주고 떠났다”며 나달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후계자 알카라스의 선전을 응원했다.

'테니스 선진국' 스페인

스페인에서 축구 버금가는 인기를 얻으며 국민 스포츠로 여겨지는 테니스는 언제나 많은 국민의 관심을 얻는다. 스페인은 테니스 선진국이라고 불릴 만큼, 테니스 코트의 수와 동호인 수가 많다.

왕립 스페인테니스연맹에 따르면, 스페인 전국에는 1만 5천여 개의 테니스 코트가 있다. 연맹에 소속된 공식 클럽 수는 1천백여 개가 넘으며, 선수로 등록된 사람의 수는 남자 5만 8,784명, 여자 2만 4,737명이다. 아무리 작은 동네에 살아도 테니스 코트 하나쯤은 볼 수 있을 정도로 스페인에서는 남녀노소 테니스를 접할 기회가 많다. 자녀가 어릴 때부터 테니스를 가르치는 부모들이 많아 자기 키만 한 라켓을 휘두르며 레슨을 받는 어린아이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스페인에서는 방과 후 활동으로 스포츠를 배우는 데 시간을 대부분 할애한다.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는 테니스로 많은 학생이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테니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테니스를 배우기 최적의 기후와 인프라를 갖춘 스페인에는 선수를 양성하는 전문 아카데미도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마요르카에 있는 나달 아카데미, 바르셀로나의 브루게라 아카데미, 산체스 카살 아카데미, 알리칸테에 위치한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의 아카데미를 들 수 있다. 우수한 코치진과 최첨단 시설, 훌륭한 인프라는 선수들이 최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전 세계 테니스 유망주들이 많이 몰리기도 한다.

마요르카에 있는 라파엘 나달 테니스 아카데미. 40개 넘는 하드 및 클레이 코트가 있다.

클레이 코트에 강한 선수들

나달이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스페인 국민은 나라를 대표하는 테니스 선수의 탄생을 열망했다. 특히 알카라스의 롤랑가로스 우승은 스페인 국민에게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역대 프랑스 오픈 우승자를 보면, 스페인 선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스페인 선수의 프랑스 오픈 우승은 20회였다. 1993, 94년도 우승자 세르지 브루게라는 14번의 ATP 투어 타이틀을 획득했는데 그중 13번이 클레이 코트였고, 클레이 코트에서의 전적은 205승 65패였다. 스페인 선수로는 처음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던 카를로스 모야(나달의 현재 코치) 역시 ATP 투어 우승 20번 중 16번이 클레이 코트였다.

스페인에는 유독 '앙투카'를 사용한 클레이 코트가 많다. 앙투카는 롤랑가로스의 상징인 붉은색 코트를 구성하는 인공토이며, 불에 구운 벽돌을 갈아 물과 흙을 섞어 만든다. ‘어떤 경우에도(En-Tout-Cas)’라는 뜻을 지녔듯, 다양한 기상 조건 속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경기 후 신발과 양말에 붉은 흙이 묻어 빨래하기가 힘들다는 점을 빼고는, 앙투카 코트에서 테니스를 치는 건 진짜 매력적이다! 하드코트에 비해 무릎에 부담이 덜 간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강렬한 색깔의 앙투카 코트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는 스페인의 뜨겁고 건조한 여름과 참 잘 어울린다. 스페인에서 열리는 ATP 마스터스 시리즈인 마드리드 오픈과 바르셀로나 오픈 역시 클레이 코트다.

클레이 코트가 가장 보편적인 스페인이다 보니, 아무래도 선수들에게도 가장 익숙한 코트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클레이 코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세계적인 선수들이 은퇴 후 후배 양성을 위해 힘쓰며 자연스럽게 클레이 코트에서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유망주들은 클레이 코트에 특화된 전략과 기술을 배우며 성장한다.

테니스뿐만 아니라 축구, 농구 등 각종 구기종목에 강한 스페인 선수들은 민첩하고 빠른 풋워크와 발재간 능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공의 바운스가 크고, 속도가 느려지는 클레이 코트에서 스페인 선수들의 이런 능력은 더욱 빛난다. 넓은 코트를 효율적으로 커버하며 도저히 리턴이 불가능할 것 같은 공을 빨리 쫓아가 그림 같은 샷을 만든다. 빠른 움직임과 견고한 수비는 스페인 테니스의 묘미이다. 특히, 나달의 경우 베이스라인에서 높고 스핀이 많이 걸린 볼을 쳐서 상대의 리턴을 어렵게 한다. 특유의 집요함과 체력을 뽐내며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데, 스페인 선수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알카라스가 박3보다 뛰어난 점은

이런 이유로, ‘스페인 테니스’ 하면 클레이 코트가 떠오르기 마련이었는데 알카라스는 그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선수가 되었다. 많은 전문가는 “알카라스는 빅3의 장점을 합쳐놓은 선수”라며 극찬했고, 조코비치도 한 인터뷰에서 이에 동의했다.

알카라스는 나달의 끈질기고 집요한 베이스라인 플레이, 페더러의 영리한 네트 플레이와 조코비치의 코트 적응력과 탁월한 리턴 능력을 모두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강인한 체력과 빠른 풋워크를 바탕으로 탑스핀, 드롭샷, 발리 등 자유자재로 원하는 플레이를 구사한다.

그의 창의적이고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상대 선수가 예측하지 못하게 경기를 영리하게 풀어나가는 것은 알카라스만의 재능이다. 강력한 포핸드와 백핸드로 상대를 한쪽으로 몰아놓은 상태에서 띄우는 드롭샷은 그의 주특기다.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한 움직임과 함께 보여주는 재치 있는 리턴샷은 예술이다. 더불어 어린 나이의 선수라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한 정신력과 겸손함을 가져 메이저 대회에서도 흔들림 없는 경기를 운영하고 있다.

스페인 남동쪽에 위치한 무르시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알카라스는 4살 때부터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 테니스 선수로, 스페인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선수의 길을 계속 걷지 못했다. 대신 그는 알카라스의 고향 엘 팔마르 지역의 테니스 클럽에서 선수들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되어 30년 넘게 활동했다. 점점 재능을 보였던 알카라스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스페인 테니스 선수였던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의 아카데미에 가서 본격적으로 훈련하게 되었다.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는 2003년 롤랑가로스에서 우승한 전적이 있으며, 카를로스 모야 이후 두 번째로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던 두 번째 스페인 선수였다. 2012년에 은퇴한 그는 아카데미를 개설해 선수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는 알카라스를 맡기 전 약 1년간 알렉산더 즈베레프의 코치로 활동했고, 즈베레프가 몬트리올에서 열린 로저스컵 대회에서 페더러를 꺾고 우승하는 위업을 달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코치인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왼쪽)와 알카라스. 사진=claytenis.com

알카라스는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를 만난 이후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빠르고 강력한 투핸드 백핸드와 네트 플레이 능력을 향상시켰으며, 상대의 플레이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전략과 융통성을 익혔다. 또한, 심리적 압박감을 이겨내고 침착하게 경기를 운영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늘 겸손함을 유지하고 프로페셔널한 선수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가르침도 늘 머릿속에 새겼다. 그 결과, 2021년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우마그 대회에서 ATP 투어 첫 우승을 차지했다. 2022년에는 마이애미 오픈에서 우승하며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경쟁자들도 급속 성장하는 중

빅3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실력이 비등비등한 젊은 선수들이 활약하며 남자 테니스는 춘추전국시대가 되었다. 나달과 조코비치는 여전히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젊은 선수들을 노련하게 상대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쉽지 않아 보인다. 현재 남자 테니스는 알카라스를 비롯해 야닉 시너, 치치파스, 즈베레프, 메드베데프, 무세티 등의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다. 쟁쟁한 경쟁자가 많지만, 알카라스는 현재까지 총 네 번의 그랜드 슬램을 차지하여 다른 선수들보다 우위에 있다. 많은 사람은 알카라스가 앞으로도 크게 활약할 것으로 예측한다.

혜성처럼 나타난 어린 선수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이유는 뭘까? 큰 감정 기복 없이 경기에 임하고 늘 상대 선수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며칠전 윔블던 결승전에서도 우승이 확정된 순간, 관중석으로 뛰어가 조코비치 가족과 코치진을 먼저 위로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가족과 코치진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는 모습이 중계되었다.

야닉 시너(왼쪽)와 카를로스 알카라스. 사진=dazn

뛰어난 실력에 인성까지 갖춘 선수로 거듭나고 있는 알카라스의 미래는 밝다. 나달의 뒤를 이을 차세대 주자로 꼽혔던 알카라스는 더 이상 테니스의 왕자가 아니다. 다시 한번 윔블던 왕좌에 올랐고, 앞으로도 메이저 대회를 휩쓸 잠재력을 가진 선수가 되었다.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는 같은 시대에 선의의 경쟁을 하며 테니스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세웠다. 20대 선수를 중심으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남자 테니스는 과연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까? 빅3 시대의 끝이 보여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밤잠을 설치며 그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선수들의 경기를 보는 것도 테니스 팬으로서 참 행복한 일이다.


최지윤 칼럼니스트는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을 전공했고, 국외 한국어 교육 사업을 담당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인 ‘세종학당(멕시코)’과 스페인 살라망카대학교 한국학과에서 교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스페인어권 국가의 한국어 교육 전문가가 되기 위해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