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 자본시장에서 '행동주의'는 소버린이나 론스타 등 외국계 투기 자본의 전유물이자 '먹튀'의 동의어로 통했다. 하지만 최근 여의도의 룰이 바뀌고 있다. 단기 차익 좇기와 맹목적인 경영권 흔들기는 구시대의 유물로 저물어가고 있다. 정부의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에 힘입어 이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완화하려는 운용사들이 등판하고 있다. 저평가된 우량 기업을 발굴해 곳간에 잠든 잉여 자본을 유동화하고, 합리적인 자본 배치를 요구하는 게 뉴노멀이 되고 있다. 주주 자본주의의 새 판을 짜고 있는 'K-행동주의 2.0' 주역들을 집중 조명해본다.

"주주 제안의 핵심은 얼마나 강하게 요구하는지가 아니다. 실제로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렸다. 목적은 기업가치와 수익 제고에 두고, 수단은 상황에 맞춰 선택한다."
강대권 대표는 라이프자산운용의 투자 성향을 '가치투자에 기반한 전략적 인게이지먼트(주주관여)'로 규정했다. 시장과 사업, 밸류에이션을 분석하고 기대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투자 논리가 성립하는 기업을 고른다.
이후 회사와 모든 주주에게 실질적인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개선안을 얹는다. 주주총회 시즌이 끝나고 반년이 지난 시점에 강 대표에게 현장의 변화와 다음 행보를 물었다.
"패자가 없어야 기업이 움직인다"
라이프는 인게이지먼트 수준을 미리 정해두지 않는다. 기업과 협력을 원칙으로 하되 중대 사안과 회사 대응, 진전에 따라 공개 제안이나 주주권 행사를 선택한다. 캠페인 하나에 운용 전체를 걸지도 않는다. 강 대표는 "캠페인뿐 아니라 포트폴리오와 매매 전략도 유연하게 운용해 위험을 관리한다"고 설명했다.
강 대표가 여러 자리에서 언급해 온 '라이프의 행동주의에는 패자가 없다'는 표현도 같은 틀에서 나온다. 그는 "회사와 모든 주주가 함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는 의미"라며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얻는 경제적 가치가 충분히 커야 기업도 움직일 이유가 생긴다"고 말했다.
다만 이해관계나 의사결정 방식 때문에 이견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순간에 의견이 같다는 뜻은 아니다"라면서도 "장기 주주로 참여했던 기업들은 대체로 라이프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고 있다"고 했다.
이를 보여주는 지표로 투자 관계의 역전을 들었다. 과거 라이프가 투자했던 기업이나 대주주가 인게이지먼트를 직접 경험한 뒤 라이프 펀드에 출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강 대표는 "라이프와 협력한 기업이 자금을 맡기는 고객이 된다는 점은 의미 있는 신뢰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강 대표는 SK 자사주 소각 주주서한에서 라이프의 역할을 '촉매'로 한정했다. 그는 "경제적 근거와 실행 필요성을 전달하는 데 집중했고 서한이 회사가 결단을 내리기 쉽게 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게이지먼트는 기업의 의사결정이 더 빨리 이뤄지도록 돕는 것도 포함한다"며 "SK 사례 역시 회사의 결정을 뒷받침하고 실행 시점을 앞당기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 사례로 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싸다는 이유로 사서 기다리는 시대는 끝났다"
강 대표는 주주권 강화 이후 발생한 한계점도 언급했다. 주주는 기업의 펀더멘털을 고칠 수 없고, 기관투자자도 기업 경쟁력을 만들어낼 특별한 능력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투자의 출발점은 언제나 좋은 사업과 탄탄한 펀더멘털"이라며 "여기에 기업이 가치를 높이려는 의지가 있는지를 중요하게 본다"고 했다.
'가치투자 2.0'이라고 부르는 접근은 한 걸음 더 나간다. 강 대표는 "시장에서는 싸다는 이유로 매수한 뒤 기다리는 것만으로 저평가가 해소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며 "싸게 거래되는 이유와 그 이유가 바뀔 가능성까지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치투자 2.0에 대해 "합리적인 가격에 매수하고, 가치 제고 의지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주주가 기여하는 투자"라고 정의했다. 저평가를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국면까지 투자 판단에 넣는다는 뜻이다.
강 대표는 자본배분의 효율성을 높이고 기업이 창출한 이익이 주주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신뢰를 회복하는 작업을 재차 강조했다. 지난 20년간 기업이 성장하더라도 신주 공급과 주식 수 증가로 기존 주주의 몫이 희석되는 문제가 반복됐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최근 자사주 매입·소각과 주주환원이 확대되면서 주당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강 대표는 주주로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의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해 장기적인 가치를 숫자로 제시하는 역할이다.
그는 "성장에 필요한 투자는 충분히 하되 남는 자본은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주주에게 돌려주는 원칙을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실적에 더해 성과가 주주의 몫이 된다는 신뢰까지 쌓이면 기업의 평가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내년 주총, 개정 상법 시험대
올해 주총 이후 변화에 대해서는 평가를 아꼈다. 외부 주주의 개선 요구가 늘고 기업이 수용하는 사례도 많아졌지만 변화가 본격화된 시점으로 보기는 이르다는 것이다.
수용 사례로는 BNK금융지주의 주주 추천 이사 제도를 꼽았다. 강 대표는 "주주의 의견을 단순히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도와 의사결정에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주총을 지목하는 근거는 제도 일정이다. 독립이사 제도와 이사회 구성, 주주권 행사에 관한 개정 상법이 단계적으로 적용된다. 강 대표는 "이사회가 주주의 의견을 어떻게 반응하고 실질적인 독립성을 확보하는지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기업의 변화도 체감했다. 실제 라이프 측에 연락하는 기업이 늘었고 자문 주제도 넓어졌다. 주제는 밸류업 준비부터 자금조달, 행동주의 대응, 상장폐지 기준까지 다양하다.
강 대표는 "기업들도 주주와의 소통이나 자본배분을 기업가치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경영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투자자의 시각에서 무엇이 설득력 있고 시장이 어떤 부분을 우려하는지 먼저 확인하려는 수요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제도가 개선되더라도 작동시킬 사람이 없으면 이사회의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라이프가 이화여대 여성 독립이사 전문과정과 협력하는 이유다.
강 대표는 "기업을 이해하고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는 일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며 "수료생이 이사회에 진출한 사례가 이미 나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내년 주총부터 독립이사 후보 수요가 커질 것으로 보고 기업별로 필요한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인사를 추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관이 70%…다음은 공모펀드와 해외"
라이프의 운용자산(AUM)은 2021년 6월 말 1000억원에서 현재 5조원을 넘어섰다. 5년 남짓한 기간에 50배 이상 늘어난 규모다. 자금 구성은 기관투자자가 70%, 기업과 개인투자자가 30%다.
강 대표는 기관투자자들이 지배구조 변화가 만드는 투자 기회뿐 아니라 참여 방식과 위험 관리까지 함께 본다고 설명했다. 기업과 주주의 공통 이익을 바탕으로 변화를 추진하고 불필요한 법적 분쟁이나 논란을 최소화하면서 성과를 만드는 접근이 운용성과와 하락장 방어력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투자하면서도 가치투자의 원칙과 위험관리 규율을 유지한다는 점이 기관의 신뢰를 쌓는 기반이 됐다"고 설명했다.
지난 5년간 시장 대비 초과성과를 낸 배경으로는 세 가지를 들었다. 가치투자에 기반한 안정성, 유연한 포트폴리오 운용과 선제적 위험관리, 지배구조가 개선되는 기업을 선별해 변화를 앞당기는 역량이다. 시장의 방향성에만 의존하지 않는 수익 동력을 만들기 위해서다.
운용규모가 커지면서 자본시장 내 영향력과 투자·분석 역량, 인력 기반도 함께 확대되는 선순환에 들어섰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3차 상법 개정 이후 라이프가 준비하는 다음 단계는 제도 변화를 기업가치 개선으로 연결하는 기회를 포착해 고객에게 성과를 제공하는 일이다. 하반기 공모펀드 출시와 홍콩 등 해외 지사 설립, 해외 고객 유치를 함께 추진하고 있다.
강 대표는 "기업의 변화를 읽고 투자하는 전문성을 해외에 제공해 자산운용업이 국내 시장을 넘어선 수출산업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신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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