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식 칼럼] 햇볕정책까지 내려놓고…대북정책, 백지서 다시 시작해야
이 글을 쓰면서 이전에 한겨레에 쓴 칼럼 몇 편을 복기해봤다. 2022년 7월에 쓴 ‘북한이 크게 달라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에선 조선(북한)이 가난과 고립에서 탈피하는 핵보유국이 되고 있다며 대북 인식과 정책의 총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올해 4월 22일자 칼럼에선 북한을 ‘조선’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한 달 뒤 칼럼에선 ‘유사시 무력통일론’의 황망함과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이에 쏟아 붓고 있는 막대한 유무형의 자원을 한국의 복합·다중 위기 대처에 쓰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8월 11일자 글에선 ‘우리 안의 북한’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조선’을 상대하자며, ‘탈북한의 상상력’과 ‘두 국가론의 공론화’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본 글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백지 상태에서 시작해보자’는 취지를 담았다. 대북정책의 대표적인 모범 사례로 일컬어져온 햇볕정책까지도.
먼저 이상(목표)과 현실 사이의 극단적인 불일치부터 짚어보자. 1991년부터 추구해왔던 한반도 비핵화는 북핵과 미국 핵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거의 불가역적인 핵시대’에 자리를 내주었다. 남북경제협력과 한반도경제공동체 건설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을 향해 한국 경제의 날개를 활짝 펼치자는 꿈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정전체제를 끝내고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목표 역시 정책은 물론이고 담론의 영역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북미·북일수교를 촉진해 한반도는 물론이고 동북아의 평화도 도모하자는 구상도 동북아의 신냉전 기운에 막혀 있다. 급기야 통일지향적인 특수관계론마저 적대적인 두 국가론에 자리를 내줄 위기에 처했다.
이렇게 폭망한 것이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과 2022년 5월에 출범한 윤석열 정부의 폭주 탓만 일까? 진영의 안경을 벗고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문재인 정부는 ‘북미관계만 잘 풀리면 될 것’이라는 생각과 기대에 경도된 나머지 본인의 언행이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에는 둔감했다. 이로 인해 2018년에 문재인 정부에 ‘역대급 환대’를 보였던 김정은 정권이 2019년 들어 근친증오를 품었던 사유를 몰라라 했다. 그래서 민주평화세력에겐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판과 저항 못지않게 성찰과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햇볕정책의 계승·발전을 자임했던 사람들의 통렬한 반성이 필요하다. 햇볕정책은 선경후정(先經後政), 선이후난(先易後難), 선민후관(先民後官), 선공후득(先供後得) 등의 사자성어로 표현되어왔다. 각기 개별적인 뜻도 있지만,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민간이 먼저 나서고 정부가 밀어줘 어려운 북한을 돕고 상대적으로 쉬운 경제협력을 통해 더 어렵고 까다로운 정치군사 문제 해결을 도모해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해소하자.’ 이를 “경제와 평화의 교환 전략”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김대중 정부 시기 남북관계와 한반도의 현실을 잘 반영해 적지 않은 성과를 내기도 했다.
‘후정’과 ‘후난’, 그리고 ‘후득’의 핵심은 군사 문제에 있었다. 그래서 디제이(DJ) 후임 정권은 군사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거나 이를 위한 토대를 닦았어야 했다. 하지만 대규모 군비증강을 선택해 군사 문제 해결의 문턱을 높이고 말았다. 전환의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0년대에 조선의 핵·미사일 개발과 대북 제제의 악순환이 강해지면서 남북경협 재개는 매우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난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선정후경’으로 방향을 틀었다. 4·27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공동성명에 군사 문제 해결이 경제협력보다 앞 순위에 배치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특히 정상회담 합의문에 처음으로 “단계적 군축” 추진이 포함되기도 했다. 하지만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문재인 정부는 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증강을 단행했다.
‘가난하고 고립된 북한’이라는 인식과 접근은 햇볕정책의 박제화로 이어졌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일시적 표현’으로 봐야 한다. 그의 철학과 정신은 화해협력과 평화정착, 교차승인의 완성과 점진적 통일에 있었다. 이것이 햇볕정책으로 표현된 이유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전에 흡수통일론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한미일의 대북정책이 관여보단 압박에 치중해 있었으며, 조선이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릴 만큼 대기근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원과 접촉을 통한 변화’가 성립할 수 있었고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햇볕정책에 대한 교조적인 접근은 달라진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도, 퇴행적인 현실을 바꾸지도 못했다. 그 중심에는 기존의 경제난과 식량난에 대북 제재 강화와 코로나 대유행까지 더해지면서 조선의 경제와 민생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인식과 ‘한국의 도움을 원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은 ‘달라진 조선’이 한국의 지원이나 남북경협을 더 이상 우선시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난관을 극복하겠다는 노선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북한이 어렵고 그래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자기확신은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에서의 합의 사항에 대한 둔감함으로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가 역대급 군비증강과 한미연합훈련을 지속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김정은 위원장이 코로나 백신 지원이나 개별 관광과 같은 경제협력사업을 “비본질적인 문제”라며 “근본 문제”, 즉 한국의 첨단무기 도입과 한미연합훈련의 문제를 제기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평화진영의 ‘가난하고 고립된 북한’의 소비 방식은 조선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들고 나와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흔히 조선이 핵과 미사일의 양적·질적 증강에 매달리고 한국과의 관계 단절을 계속하면 또 다시 경제난에 처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김정은 정권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거나 조선의 상황이 바뀔 것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선은 경제발전에 있어서도 만만치 않은 성과를 내고 있고 설사 다시 경제난에 처해도 과거로 돌아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런데도 조선의 경제난을 상수로 보면서 기회를 엿보는 태도는 정작 우리가 무엇을 성찰하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에 대해 나태하게 만든다.
그럼 햇볕정책을 버려야 할까? 사즉생(死卽生)의 정신으로 철학과 의지를 빼곤 명칭을 포함해 모두 버려야 한다. 디제이의 대표적인 어록인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은 현실타파적 문제의식도 냉철한 현실인식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는 대북정책의 조건과 환경이 햇볕정책을 추진했던 시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대북정책의 상대인 조선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햇볕정책을 버리면 대안이 있을까? 앞서 언급한 ‘탈북한’과 더불어 나부터 이롭게 하면서 관계도 이롭게 할 수 있는 ‘이기이관(利己利關)’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러한 신조어는 몇 가지 문제의식의 발현이다. 첫째, 우리는 “북한의 변화”를 위해 너무나도 많은 유무형의 자원을 소비해왔는데, 정작 조선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변했다는 ‘냉정한 현실’이다. 둘째, 한국이 ‘내 코가 석자’일 정도로 너무나도 심각한 복합·다중 위기에 처하고 있다는 ‘우울한 현실’이다. 셋째, 이 두 가지가 맞물리면서 햇볕정책이든 강풍정책이든 기존의 대북정책이 종언을 고했다는 ‘정책적 현실’이다. 넷째, 그렇다고 이대로는 살 수 없으니 뭔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이다.
이들 네 가지를 관통하는 문제가 있다. 맹목적인 군사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대북정책의 핵심적인 목표가 비핵화를 포함한 “북한의 군사적 위협 해소”인데, 정작 한국은 비약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해왔다. 민생 수요가 크게 증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고, 방위 산업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극히 저조함에도 불구하고 ‘K-방산’에 도취되어있다. 진보와 보수의 대북정책이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간주되지만, 햇볕정책을 계승한다던 정권들이 군비증강에 더 몰두했다. 한국의 군사력은 역대 최강으로 강해지고 있는데 정작 안보 불안은 더 커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면 문제의 해법도 도모할 수 있다. 그 출발점은 여러 위기가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에 있다. 이러한 자각은 한국의 위기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융합적 사고’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융합적 사고의 중심에는 군비 통제와 축소를 두어야 한다. 대규모 군비증강을 하면서 군사적 신뢰구축을 도모했던 과거의 ‘이중 사고’와 결별하고, 이제는 군비 통제와 축소가 ‘연결된 위기’를 완화·해결하는 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60조원에 달하는 국방비를 제한할수록 나날이 악화되는 민생 분야에 투입할 수 있는 재원은 늘어난다. 50만에 달하는 병력수를 줄일수록 인구 급감 시대에 대처하고 적응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다. 압도적으로 세계 최대 규모인 한미연합훈련을 비롯한 군사연습을 줄이면 탄소 배출과 환경오염도 줄어든다.
‘이게 우리에게 이로운 줄 알겠지만, 북핵이 있는데 가능하겠냐’는 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북한급변사태’ 발생시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생각, 전쟁이 벌어지면 무력으로 통일하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기실 이러한 통일몽이 얼마나 자해적이고 소모적인 발상인지는 차분히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또 이러한 선택은 대북 억제력을 굳건히 하면서도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잉태하고 있다.
‘접촉을 통한 변화’를 도모했던 햇볕정책의 유효기간은 지났다. 이제는 ‘변화를 통한 접촉’으로 바꿀 때이다. ‘북한을 변화시키겠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고 우리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변화부터 모색할 때이다. 그 변화가 나부터 이롭게 하면서 관계에도 이로울 수 있다면 공론화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다른 분야들은 꽉 막혀 있으면서 정치군사적 긴장만 고조되고 있는 현실은 군사 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 있는 역설적인 기회이기도 하다. 세계 5위권에 도달한 한국의 군사력은 이기이관의 정신으로 군비 통제와 축소를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물리적인 토대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용기와 지혜라는 뜻이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wooks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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