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배드민턴 여제' 안세영(삼성생명·세계 1위)이 "두려운 상대"라고 공개적으로 꼽았던 선수가 있다. 중국 배드민턴의 간판, 2020 도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천위페이(세계 4위)다. 그러나 2026년 5월, 그 이름에 따라붙는 수식어가 달라지고 있다. 세 번 연속 결승에 올랐고, 세 번 연속 고개를 숙였다. 숫자는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맥락은 복잡하다. 중국 현지 매체들조차 "전성기 기량을 되찾기 어려워 보인다"고 쓰기 시작했다. 천위페이에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천위페이의 2026시즌은 순탄하게 출발했다. 연초 인도네시아 마스터스에서 월드투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컨디션에 문제가 없음을 알렸다. 그러나 4월, 자국에서 열린 2026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부상으로 기권하면서 균열의 조짐이 보였다. 그리고 5월 초, 결정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2026 BWF 세계여자단체배드민턴선수권대회(우버컵) 한국과의 결승전. 천위페이는 중국의 2단식 주자로 나섰다. 상대는 세계랭킹 15위 김가은. 수치상으로는 천위페이가 압도적으로 우위인 매치업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0-2 완패. 이 한 패배가 중국의 우버컵 우승을 가로막았다. 중국은 매치스코어 1-3으로 한국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경기 직후 천위페이는 극심한 부담감과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우버컵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천위페이는 개인전 무대로 복귀했다. 5월 17일 태국 오픈(슈퍼 500) 결승에서는 준결승까지 4경기를 전부 2-0으로 완승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정작 결승에서 야마구치 아카네(일본·세계 3위)에게 0-2로 완패했다. 1번 시드의 위용은 토너먼트 중반까지만 유효했다. 그리고 불과 일주일 뒤, 말레이시아 마스터스 결승에서 또다시 준우승 자리를 차지했다.
5월 24일(한국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2026 BWF 월드투어 말레이시아 마스터스(슈퍼 500) 여자단식 결승. 천위페이는 세계 7위 라차녹 인타논(태국·2번 시드)을 상대했다. 결승 이전까지 두 선수의 통산 맞대결 전적은 천위페이 19승 3패. 수치만 보면 게임이 되지 않는 대결이었다. 심지어 2022년 10월 이후로는 천위페이가 인타논을 상대로 4연승을 달리고 있었다.

경기는 달랐다. 1게임 초반부터 인타논은 랠리 템포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천위페이가 강점으로 삼아온 긴 랠리 장악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다. 10-11 상황에서 인타논이 4연속 득점으로 흐름을 가져갔고, 17-16으로 천위페이가 추격하자 각도 큰 하프스매시로 상대를 코트 바닥에 쓰러뜨렸다. 1게임은 17-21로 끝났다.
2게임은 일방적이었다. 인타논이 시작과 동시에 5-0으로 달아났고, 인터벌 전까지 14-6의 격차를 벌렸다. 천위페이가 후반 공격 템포를 높였지만 역전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다. 최종 스코어 15-21. 경기 시간은 50분이었다. 천위페이가 인타논에게 패한 것은 2022년 7월 말레이시아 오픈 결승 이후 약 4년 만의 일이다.

이로써 천위페이는 5월 한 달 동안 치른 세 차례 국제 대회(우버컵, 태국 오픈, 말레이시아 마스터스) 모두 결승 혹은 단체전 결승에서 패배했다. 마지막 월드투어 타이틀은 연초 인도네시아 마스터스로, 이후 4개월 가까이 우승이 없는 상태다.
천위페이의 부진을 단순히 기량 저하로만 읽기엔 패턴이 너무 뚜렷하다. 준결승까지는 상위 랭커들을 제압하면서 1번 시드답게 움직인다. 그런데 결승이라는 무대에 서는 순간, 경기 운영 방식이 바뀐다. 중국 매체 소후닷컴이 지적한 것처럼 "지나치게 수비적이고 공격성이 부족한" 경기 스타일이 결승에서 두드러진다.

이는 기술이 퇴보한 것과는 구별된다. 천위페이는 여전히 세계 4위다. 체력이 완전히 무너진 것도 아니다. 문제는 결승이라는 압박 상황에서 자신의 강점을 끌어내지 못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에 있다. 베이징청년보는 직접적으로 썼다. "우버컵 결승에서 김가은에게 당한 패배가 직간접적으로 이후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통상 엘리트 선수가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했을 때, 특히 그 패배가 팀 전체의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때 느끼는 죄책감은 이후 중요한 국면에서 무의식적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천위페이의 상황이 지금 더 주목받는 이유는 타이밍 때문이다. 2026년은 올림픽 비시즌이면서도 내년 파리 사이클을 위한 세계랭킹 포인트 경쟁이 본격화되는 시기다. 결승에서 연거푸 패하는 패턴이 굳어지면 랭킹 하락은 물론, 중국 대표팀 내 포지션마저 흔들릴 수 있다. 실제로 왕즈이 등 중국의 다른 여자단식 선수들이 꾸준히 성과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천위페이가 결승 문턱을 반복해서 넘지 못한다면 국제대회 출전 우선순위에서도 밀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이번 말레이시아 마스터스의 진짜 수혜자는 두 명이다. 첫째는 라차녹 인타논. 31세의 베테랑은 지난해 11월 일본 마스터스 이후 6개월 만에 월드투어 타이틀을 되찾으며 여전히 빅 무대에서 통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압도적 체력보다 각도와 완급 조절로 이기는 노련함이 건재하다. 둘째는 직접 출전하지 않은 안세영이다. 경쟁자들이 서로 흔들리는 사이 세계 1위의 입지는 더욱 견고해진다. 천위페이가 우승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려 했던 말레이시아 무대에서 또 좌절한 것은 안세영 입장에서 나쁘지 않은 시나리오다.
3연속 준우승. 숫자가 이미 말하고 있다. 천위페이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한 번의 결승 진출이 아니라, 결승에서 이기는 경험이다. 과연 그가 이 심리적 굴레를 스스로 끊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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