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서기 vs 두 줄 서기

매일 전쟁터 같은 지하철 출퇴근길. 열차를 놓치거나 1분이라도 지각하진 않을까 에스컬레이터 위에서도 한국인들은 너무 바쁘다. 그런데 이렇게 에스컬레이터에서 걸어 다니는 게 합법이 아니라는데 유튜브 댓글로 “원래는 에스컬레이터에서 걷거나 뛰면 안 된다는데 왜 왼쪽 줄을 통행로로 비워두는지 알아봐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취재해봤다.

승강기안전관리법과 관련 규정을 보면 에스컬레이터에서 걷거나 뛰면 안 된다는 건 명확하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에서 오른쪽 줄은 서서 가고 왼쪽 줄은 비워놓는 ‘한 줄 서기’가 국룰인데, 왱 커뮤니티 설문조사 결과만 봐도 77%가 쪽은 통행로로 비워두는 게 매너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유독 에스컬레이터에서는 법과 현실이 따로 놀고 있다는 얘기다.

왜 이런 걸까. 일단 한국승강기안전공단에 물어봤는데 한 줄이든 두 줄이든 상관없으니 원칙은 걷지 않는 거라는 어중간한 답변이 돌아왔다.

한국승강기안전공단 관계자
“일단은 저희는 한 줄이든 두 줄이든 손잡이 잡고 걷거나 뛰지 말아 달라 이렇게만 지금 공식적으로 나가고 있거든요. 걸어가라 이렇게는 말 못 하고 그렇다고 한 줄로 서라 두 줄로 서라 이렇게 정확하게 말을 못 하는 거죠"

정말 에스컬레이터에서 걷는 걸 금지하려면 두 줄로 서서 가는 걸 강제하고 어기면 과태료를 세게 부과하거나 해야 할 거 같은데 딱 결론을 못 내리는 이유는 옛날부터 에스컬레이터 이용법을 두고 엎치락뒤치락 해온 역사가 있기 때문.

에스컬레이터가 도입된 이후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의외로 정석은 ‘두 줄 서기’였다. 이용객들이 바쁜 출퇴근길에는 두 줄 다 걷고, 널널할 때면 두 줄 다 서서 가는 식이었다. 그런데 2002 한일 월드컵 개최 몇년 전부터 선진국을 본받아 바쁜 사람을 배려하자며 한 줄 서기 운동이 전개됐다.

하지만 이게 2000년대 중반에 분위기가 또 한번 크게 바뀌는데 한 줄 서기에 익숙해졌을 때쯤 에스컬레이터에서 걷는 게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다시 두 줄 서기 캠페인이 시작됐다. 당연하게도 국민들은 혼란에 빠졌는데 정부나 지자체에선 두 줄 서기 캠페인을 하고, 이미 지하철 문화가 몸에 밴 국민들은 한 줄 서기를 하는 상황이 된 거다.

결국 2015년 당시 국민안전처는 “두 줄 서기는 폐지하지만 에스컬레이터에서는 걷지 말라”는 이도저도 아닌 입장을 낸다. 관련 법에 뛰거나 걷지 말라는 문구만 있을 뿐 이걸 어겼을 때 처벌한다거나 두 줄 서기를 해야 한다는 강제규정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하철역에선 관련 법을 근거로 ‘에스컬레이터에선 걷거나 뛰어서는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방송을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에스컬레이터에서 걷거나 뛰다가 사고가 발생하는 일은 생각보다 는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고 한다. 최근 5년간 에스컬레이터에서 발생한 사고 78건 중에 걷다가 넘어진 게 3건 밖에 안된다.

한국승강기안전공단 관계자
“이게 뭔가 나와야 저희도 근거를 가지고 홍보를 하든 계도를 하든 하는데 정확하게 근거를 제시를 못 하다 보니까…”

지금처럼 한 줄 서기를 하면 무게가 한쪽으로 쏠려 쉽게 고장이 난다는 얘기도 있는데 에스컬레이터는 기본적으로 한 계단에 수백 킬로그램 이상 버티게 설계돼있는 만큼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현대엘리베이터 관계자
“경험상 크게 한 줄 서게 한다고 해가지고 (에스컬레이터) 기계에 어떤 영향을 주거나 그러진 않고요. 법규상에는 3000뉴턴(약 300㎏)을 부하중을 주게 돼 있는데요. 저희가 제작할 때 5000뉴턴(약 500㎏) 이상을 반력(반작용힘)을 주고 있어서…”

한 줄 서기와 두 줄 서기 중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지도 논쟁거리다. 한 줄 서기를 채택하던 영국 런던 지하철은 2016년 홀본 역에서 두 줄로 서서 가는 실험을 했는데 결과는 의외였다. 한 줄은 걷고 다른 줄은 서서 가게 했던 때보다 혼잡도가 크게 줄어 같은 시간 에스컬레이터가 수송할 수 있는 인원이 30% 가까이 증가했다는 거다.

하지만 두 줄 서기가 전체적인 효율성은 높일지 몰라도 개개인에게는 비효율일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원래 서서 가는 경우라면 상관없지만 한 줄 서기를 할 때 선택적으로 빨리 걷던 승객들은 더 늦어지게 될 수밖에 없는데, 각자가 필요한 속도로 가지 못해 불만이 쌓이면서 다시 한 줄 서기로 회귀하게 된다는 거다.

우리나라 에스컬레이터 속도가 외국보다 느리기 때문에 한 줄 서기를 계속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한우진 교통평론가에게 의견을 구해봤는데 “에스컬레이터 속도가 느리니까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이동하고 싶어서 걷기 시작한다”며 “속도가 빨라지면 자연스럽게 에스컬레이터에서 걷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또 “안전하게 한다고 무작정 속도를 낮추는 건 혼잡이 심해지고 새로운 위험요소를 만드는 것”이라며 “교통약자의 경우 엘리베이터를 타면 되고, 그러면 느린 에스컬레이터 때문에 엘리베이터 타는 사람들도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론적으로는 아무리 법이랑 따로 논다 해도 보행문화로 자리 잡은 에스컬레이터 한 줄 서기를 바꾸는 건 쉽지 않을 거 같다. 한 줄 서기가 미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호주 등에서 자리 잡은 걸 보면 빨리빨리 움직이려는 인간 본성에 맞는 게 아닌가 싶긴 한데 어쨌든 웬만큼 급하지 않으면 에스컬레이터에서 서서 가고, 걸어야 한다면 손잡이 잡고 조심조심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