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사진을 보라. 최근 X에서 화제였던 욕탕인데, 수염 난 남자 머리 석상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다. 부산의 한 목욕탕에 있다는 이 욕탕의 이름은 자그마치 철학탕.

‘소크라테스 머리에서 물이 나오는 이상한 부산 목욕탕이 있다던데 도대체 왜 그런 걸 지었는지 알아봐 달라’는 의뢰가 들어와서 직접 현지 취재했다.

사진 속 욕탕이 있는 곳은 부산의 초대형 목욕탕 ‘허심청’이다. 부산 사람이라면 모르는 게 이상한 관광명소라고 한다.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 부산 현지인들은 이곳을 ‘알몸테마파크’라 부른다고 한다. 하일권 작가의 네이버웹툰 <목욕의 신>의 배경 ‘금자탕’이 이 목욕탕을 모델로 했다는 설도 있다.

이런 목욕탕이 생긴 건 부산 자체가 목욕에 진심인 ‘목욕탕 도시’라는 점과 관련있다. 전국 광역지자체 중 면적 대비 인구가 적은 전남·제주를 빼면 부산·경남, 즉 PK 지역은 인구 대비 목욕탕이 가장 많다.

코로나19 사태 때도 부산 확진자들 이동경로는 죄다 ‘목욕탕↔돼지국밥집’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동래온천이 있는 허심청 인근은 역 이름도 ‘온천장’역이고, 이 동네 이름도 ‘온천동’이다.

부산에 목욕 문화가 발달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 이 지역에 설치된 왜관, 오늘날로 치면 재패니즈타운에 살던 일본인들이 만든 료칸 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많다.

[김승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
"목욕(탕) 문화 자체가 사실 우리 문화는 아니거든요. 알음알음 이래가지고 동래 온천을 초량왜관 때부터 일본인들이 이용을 해요. 일본인들이 온천을 많이 이용하는데 조선인들도 (영향을 받아) 온천을 이용을 많이 하거든요."

일본인들은 동래온천에 ‘봉래관’이라는 료칸을 만들었는데, 이게 해방 이후 ‘동래관광호텔’이 됐다가 1985년 농심에 인수된다. 농심은 6년 뒤 호텔 옆 인공호수 터에 온천공을 추가로 개발해 허심청을 세웠다.

왜 레저업체도 아닌 라면회사 농심이 초대형 목욕탕을 지었을까. 이건 ‘라면왕’으로 불리는 농심 창업주 고(故) 신춘호 회장의 뜻이었다고 한다. 온천 애호가로 유명했던 신 회장이 고향 울산 인근에서 부산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부산 동래온천을 눈여겨보다 국내 최대 규모인 목욕탕을 지은 거다.

이를테면 신 회장 본인의 드림 테마파크를 만든 셈인데, 마음을 비운다는 뜻의 ‘허심(虛心)’이라는 이름도 직접 지었다고 한다.

허심청 내부엔 고객 신발 라커만 수천개라 직원이 라커를 안내해준다. 여탕에는 세신사만 10명이고, 남탕도 3명이나 된다. 지금도 주말 하루방문객이 4000~5000명, 명절연휴엔 6000명 정도는 된다고 한다.

그럼 도입부에서 본 ‘철학탕’처럼 희한한 디자인은 어디서 나온 걸까. 허심청은 건축 당시 롯데월드, 롯데타워, 롯데호텔 등을 설계한 일본의 거물 건축가 오쿠노 쇼를 초청해 내부를 설계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는 허심청의 어마어마한 시설은 90년대의 독특한 감성과 일본식 호화 온천 디자인이 결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동식 부산대 실내환경디자인학과 교수]
"인테리어 디자인에 대한 정립이 잘 안 되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실내 디자인적으로) 어떤 깊이있는 해석보다는 다양한 고급스런 장식품을 가지고 와서 공간의 격조를 보이려 노력하다 보니까 뭔가 공간을 좀 더 사치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했다는 것으로"

참고로 철학탕의 이 석상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설도 있고 소크라테스라는 설도 있다. 직원들도 정확히 석상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모른다고 한다. 이곳에서 20년째 근무 중인 직원의 말이다.

[허심청 관계자]
"얼굴 보면 소크라테스가 아닐까, 좀 안 닮았나. 한 번씩 학생들이 장난을 치거든요. 양머리 해갖고 한 번씩 씌워놓으면 엄청 귀여운데."

철학탕은 이렇게 동굴처럼 생긴 구조물 안에 있는데, 옆에는 TV를 볼 수 있는 ‘영상탕’이 있다.

롯데 야구를 하거나 국가대표 축구경기를 할 때면 여기에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경기를 본다. 허심청은 프로스포츠팀들도 자주 방문하는데, 김병현이나 박찬호 같은 유명 야구 선수도 허심청에 몸을 담그고 갔다고 한다.

[허심청 관계자]
"박찬호 선수가 다시 한화로 다시 돌아왔을 때 허심청에 선수들하고 같이 야구 경기 마치고 같이 들어왔는데 탕에 들어왔는데 (보통) 슈퍼스타들도 그 정도는 아닌데 박찬호만큼은 탕에 사람들이 이 탕 들어가면 따라 들어가고 저 탕 들어가면 따라 들어가고 그래서 탕에서 내려올 때 사람들이 계속 기다리고 있어요. 박찬호 선수도 자신도 옷을 다 벗고 있으니까 좀 민망하고 또 사인도 해달라고 하면 좀 민망하고…. 실제로 보면 진짜 엄청(?!)납니다."

부산 젊은 세대에게 허심청은 어린 시절 가족과 놀러갔던 추억의 장소다. 2000년대만 해도 허심청 인근은 부산을 대표하는 번화가 중 하나였다. 하지만 부산 동부터미널이 노포동으로 이전하면서 점차 유동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해, 현재 허심청 인근은 과거와 비교하면 한산해진 편이다.

비단 부산만 겪는 일은 아니지만 온 가족이 함께 목욕탕을 찾던 부산의 목욕탕 문화는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 2004년 1363개였던 부산 목욕탕은 지난해 말에는 666개로 줄었다.

시대의 흐름까지는 막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혹시 부산에 놀러갈 일이 있다면 허심청을 비롯해 부산인들의 추억이 담긴 부산 목욕탕을 경험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