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강…낡지 않아, 대답 없는 질문으로 소설 끌고 가
주류 남성 가부장 ‘계몽적’ 세계 속
근대 합리성의 폭력, 맹렬히 거부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한국 문학 전문가들이 이번 수상의 의미를 짚고 이를 계기로 한국 문학의 나아갈 바를 진단하는 연쇄 특별기고를 싣는다.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훌륭한 번역을 통해 세계의 독자들이 비로소 한국 문학이라는 두꺼운 책의 한 페이지를 열어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강은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난 작가이지만 그의 성취는 한국 근현대 문학이라는 풍요로운 토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풍요로운 토양’이라는 말은 반어이다. 한국 문학의 풍요로움이란 ‘식민지-전쟁-분단-냉전-군사독재-압축성장-민주화-극한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관통한 완강한 가부장주의’라는, 근대 세계가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역경을 다 거쳐온 한국 현근대사가 만들어낸 역설적인, 문학적 풍요이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의 남한의 소설문학으로만 한정하더라도 최인훈, 이청준, 조정래, 황석영, 김원일, 현기영, 조세희 등의 남성 작가들과 박경리, 박완서, 오정희 등의 여성 작가들은 그 자체로 세계사의 모순과 질곡의 현장이기도 한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맞서서 혼신의 투쟁을 벌여왔으며 그들의 문학적 성취는 세계 근대문학의 지형에서 영미권이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제3세계 어떤 곳의 문학적 성취와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 중 누구라도 한국어라는 핸디캡이 없었다면 벌써 노벨상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되었거나 수상을 했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한국어라는, 서구어로 번역되어야만 하는 소수어로 쓰였다는 것, 게다가 노벨상의 국제정치학상 한국의 배당률이 워낙 낮았다는 것 등 작품 외의 악조건들만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런데 마침내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것은 한국의 문화적 위상과 한국어의 국제적 소구력이 높아짐에 따라 번역 보급의 문제가 극복되기 시작했고 노벨상위원회에서의 위상과 주목도 역시 높아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 적절한 때에 한강이라는 뛰어난 작가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부커상, 메디치상 등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아온 ‘준비된 후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작가적 경륜이 앞서는 원로 남성 거장 황석영이 있는데 왜 그보다 젊은 여성 작가 한강에게 먼저 이 상이 돌아갔을까? 황석영이 오랫동안 한국 소설의 성취와 위엄을 대표해온 대작가로서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자격을 갖추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황석영은 한강에 비해 분명히 낡았다. 그는 정통 리얼리즘 작가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근대소설의 문법에 충실한 작가라는 뜻이다. 근대소설은 루카치 이후 오래도록 ‘성숙한 남성성의 형식’이라 불린 것처럼 강인하고 문제적인 남성 주체의 탐험서사였다. 황석영의 대표작인 ‘객지’나 ‘삼포 가는 길’의 주인공들의 방황은 사실은 계산된 방황. 여행이 끝날 줄 알고 떠나는 여행이다. 주인공들은 내일을 모르나 작가는 그들이 내일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근작들인 ‘손님’과 ‘철도원 삼대’에 이르면 죽은 자들이 등장하여 산 자들을 이끄는 ‘초현실’이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 속 인물들의 운명은 ‘선험적 진리’가 견고하게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19세기 이래 근대소설의 전형적 상황이다.
하지만 한강의 소설들은 이와 다르다. 그의 소설들에는 질문들은 무성하나 대답은 없다. 쓰고 있는 작가 역시 대답을 모른 채 질문의 형식으로 소설을 끌고 간다. 이것은 탈근대, 혹은 후기 근대적 글쓰기의 전형이다. 게다가 한강 소설들의 여성 인물과 여성 화자들은 오래도록 근대 남성들이 구축한 계몽적 이성의 세계에서 밀려나 있던 주변인, 소수자, 타자들의 형상으로 그들의 언어는 늘 이성과 진리에서 비켜난 형식으로 발화되고 전달된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육식의 세계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탈락한 소수자 여성으로서의 존재성을 스스로 식물이 됨으로써 겨우 지켜낸다. 그리고 이처럼 주류의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여성 등 희생제의의 대상일 뿐인 벌거벗은 자들, 즉 호모 사케르들이 거대한 국가폭력을 만났을 때 어떻게 자기를 보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소설들이 바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이다. 이 작품들에 가득한 초현실과 비의와 주술성은 근대 합리성의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자 지혜이다.
한강의 소설세계는 루카치가 단편소설에 한정하여 인정해준 서정성이 절대 우세한 세계로 분명 근대장편소설의 본령에서 비켜나 있다. ‘채식주의자’나 ‘소년이 온다’가 하나의 장편서사라기보다는 사실상 작은 서사들의 연쇄로 이어지고,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사실과 몽환의 교직이 내면에 주는 시적 울림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객관적 진리에 의해서는 보증될 수 없는 ‘미숙한 주체’들의 산문 형식이다. 하지만 그 ‘미숙성’에서 새로운 언어가, 형식이, 사상이 탄생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 소설은 이런 형식들이 대세를 이루고 그 대부분이 젊은 여성 작가들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오래도록 민족 민중 계급 등의 대문자 주체에 숨어 세상을 지배하는 남성 가부장의 목소리에 대한 결연한 거부이며 나는 이것이 어느덧 21세기 한국 소설의 주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노벨문학상이 이러한 당대 주류 한국 여성 소설가들의 맏언니의 자리에 있는 1970년생 한강에게 주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 문학은 아마도 한 10년 후를 전후해서 다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영광의 기록이 아니라 고통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토록 사람들을 들들 볶아서 유지되는 한국 사회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역량이 충분히 확대재생산 가능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역설과 반어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노벨문학상의 수상은 한국이 만든 또 하나의 1등으로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맹목의 한국 사회에 아직도 멈추어 돌아보고 기억하고 성찰하는 힘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남아 있음을 증거하는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김명인 문학평론가, 인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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