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약한 고객 이치로와 훈장을 포기한 김하성

조회수 2024. 4. 19.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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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 장인의 은퇴 계획

일본 중부에 하가(芳賀)라는 곳이 있다. 도쿄 북쪽 160㎞ 거리에 위치한 산골이다. 인구 6만 명 남짓의 작은 군(郡)이다. 마을 중심에는 제법 큰 공장이 하나 있다. 스포츠용품 브랜드 M사의 글러브 생산 라인이다.

2006년의 일이다. 공장 분위기가 숙연하다. 장인 쓰보타 노부요시의 은퇴 발표 때문이다. 1933년생인 그는 중학생 때부터 그곳에서 일했다. 작품 중에는 공전의 히트작이 많다. 덕분에 정부 훈장과 명인이라는 호칭도 얻었다. M사 글러브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ML과 일본에서 감독을 지낸 보비 발렌타인의 기억이다. “1977년이었나? 메츠에서 뛰던 시절이죠. 플로리다 스프링캠프 근처에 허름한 캠핑카가 있었죠. 일본에서 온 사람이 먹고 자고 하면서, 글러브를 수선해 준다는 거예요. 잘하더라구요. 거기서 얻은 걸 써봤어요. 마음에 들었죠.”

하지만 막상 실전에는 어려웠다. “그때 우리 팀 감독이 조 토리였어요. R사(스포츠용품사)의 임원을 겸직하고 있었죠. 그래서 다른 회사 글러브를 끼고 있으면 눈치가 보였어요. 결국 (M사의) 라벨을 떼 버렸죠. 그러고는 게임에서 사용했어요.”

M사의 글러브가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내력이다. 이후 피트 로즈 등이 사용하면서 더 많이 알려졌다. 그런 역사의 증인이 물러난다는 뜻이다. 회사 경영진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단 후임자 선정이 중요하다. 유력한 후보가 물망에 올랐다. 명인의 조수였던 기시모토 고사쿠라는 인물이다. 공장 바로 옆에 있는 고등학교 출신이다. 그곳 야구부 투수였던 선수 출신이다.

심혈을 기울인 6개…1분 만에 퇴짜

인수인계 작업은 순조롭다. 후계자 기시모토는 이미 업계 최고의 숙련공이다. 조수라고 하지만, 그 역시 생산 라인에서 30년을 보냈다. 달인의 경지가 가까운 전문가임은 물론이다.

다만 딱 하나 단계가 남았다. 가장 어려운 절차다. 까다롭고, 엄격하기로 유명한 고객을 만족시키는 일이다. VIP 중의 VIP 스즈키 이치로라는 손님이다.

명장은 후임을 위해 이렇게 당부한다.

“소(牛)는 반드시 미국산을 써야 한다. 생후 3~6개월 사이에 거세된 수컷이 좋다. 2살까지 키워서, 머리 뒤쪽의 등 부위에서 얻은 가죽을 재단하거라. 그럼 한 마리에서 글러브 0.5개, 운이 좋으면 1개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쉬운 편이다. 막막한 옵션이 하나 더 추가된다.
“자나 깨나, 늘 이치로 상의 플레이를 머릿속에 그려야 한다. 손과 손가락의 감촉을 상상하거라. 수비에 대한 기사는 모두 스크랩해서 읽고, 또 읽어야 한다. TV 속 장면도 놓치지 말거라. 가죽은 가볍고 부드러워야 한다. 그래야 미국처럼 타구가 강한 곳에서 버틸 수 있다.”

어쩔 수 없다. 반드시 통과해야 할 단계다. 만약 VIP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래서 뿔난 고객이 다른 회사 제품으로 바꿔버리면? 그건 자칫 회사의 근간이 흔들릴지 모를 재앙이다.

그날부터 후임자는 모든 업무에서 배제된다. 오로지 목표한 제품에만 몰두한다. 그렇게 한 달간 50개를 만들어냈다. 고르고 골라, 그중에 6개를 엄선한다. 그걸 가지고 시애틀행 비행기에 올랐다.

만남은 세이프코 필드에서 이뤄졌다. 간단한 인사 후에 심사가 시작됐다. 클럽하우스 테이블에 글러브 6개가 가지런히 올려졌다. 휙~ 둘러보고, 만져보고, 끼어 보기도 한다. 고객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진다. 이내 고개를 젓는다. “이건 아닌데요.” “이것도 못 쓰겠어요.” “왜 이렇게 무겁죠?”

후임자 기시모토 씨가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린다. “채 1분도 걸리지 않더군요. 가져간 6개 모두 이치로 상에게 불합격 판정을 받았어요.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군요.”

갑자기 늘어난 어썸 킴의 실책

지난 8일(한국시간)이다. 파드리스의 자이언츠전 때다. 6회 말 선두 타자는 이정후였다. 투수 맷 왈드론의 4구째에 반응했다. 88.2마일(141.9km)짜리 싱커를 따라붙었다. 하지만 타구는 평범하다. 유격수 앞으로 가는 손쉬운 땅볼이다.

수비는 급할 게 없다. 넉넉하고 여유로운 타이밍이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나온다. 김하성의 송구가 턱없이 높다. 1루수가 점프도 포기할 만큼 어림도 없다. 결국 이 주자(이정후)는 후속타에 홈을 밟았다. 2-0이던 스코어는 2-1로 급해졌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8회에 또다시 실책이 나온다. 이번에는 주자를 태그하다가 공을 빠트렸다. 이닝을 끝내려던 병살 플레이는 물거품이 된다. 동점을 헌납하고, 역전패의 결정적 빌미를 제공했다.

김하성의 ML 데뷔 첫 2실책 경기였다. 치밀어 오르는 화가 역력히 나타난다. 표정을 숨기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이후로도 진정되지 않는다. 올 시즌 21게임 동안 벌써 4개(47이닝당 1개)의 에러가 기록됐다. 지난해 152경기에서 7개(180이닝당 1개)를 범한 것에 비해 4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물론 주 포지션이 2루수에서 유격수로 바뀌었다. 부담이 훨씬 큰 위치인 점은 분명하다. 그걸 감안해도 걱정할 수준이 분명하다.

금딱지 글러브는 당분간 포기

결국 특단의 조처가 내려졌다. 지난 15일 다저스전 때다. 2회 키케 에르난데스의 땅볼을 못 잡았다. 시즌 4번째 실책을 범했다. 그러고는 다음 이닝 수비에서 변화가 생겼다. 개막 초반부터 쓰던 글러브를 다른 제품으로 바꿔 끼고 나왔다.

올해 사용한 것은 미국 R사 제품이다. 메이저리그 골드글러브를 주관하는 회사다. 수상자에게는 별도로 제작한 글러브를 선물한다. 손목 부분에 특별한 골드 패치, 그러니까 금딱지가 번쩍이는 디자인이다. 왠지 금메달 같은 느낌이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매니 마차도(2013, 2015년 수상자)가 그 글러브를 끼고 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 아닌가. 내심 부러웠다. 그걸 꼭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작년 수상 직후에 어썸 킴이 했던 말이다.

R사의 선물이 전달된 것은 올봄 캠프 때였다. 검은색에 금딱지가 붙은 멋진 제품이 배송됐다. 번쩍이는 트로피와 함께였다. 아시아 출신 내야수 중 최초의 수상자라는 점에서 특별한 자부심을 느낄 만하다.

그런데 개운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쓰던 것보다 조금 무거운 것 같다”는 당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무게, 촉감, 크기 모든 것에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길들이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짧아도 6~7개월은 소요된다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연장을 탓해서야 되겠나. 본인도 잘 안다. “글러브 잘못만은 아니다. 마음에 들 정도로 완전하게 길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게 약간 신경 쓰였다. 그때까지는 작년에 쓰던 것을 사용하겠다. 아마도 여름쯤이면 괜찮아질 것 같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골드글러브 수상자의 자부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새출발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김하성은 작년까지 일제 W사의 제품을 사용했다.)

“기시모토 씨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시 2006년 이치로 얘기로 돌아간다.

그는 고약하고(?) 까탈스러운 고객이다. 적어도 제조업자에게는 그렇다.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온 첫 대면에서도 냉정하게 돌아선다. “수고하셨다”는 말 한마디도 남기지 않는다.

결국 M사 글러브 라인의 책임자 교체는 무산됐다. 쓰보타 명인의 은퇴도 미뤄졌다. 이후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후임자 기시모토 씨의 잠 못 이루는 밤은 계속됐다.

이듬해(2007년) 7월. 조마조마한 두 번째 만남이 이뤄졌다. 비로소 고객의 표정이 풀린다. “이건 좀 가능성이 보이는군요.” 그때서야 어렵게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 해 11월이다. 골드글러브 수상자 발표가 있었다. 아메리칸 리그 외야수 부문 한 자리는 역시 그의 차지였다. 8년째 연속 수상이다. 당시 소감이 인상 깊다.

“올해는 특별히 긴장이 많이 했습니다. 만약 내가 이 상을 받지 못했다면 (새로 글러브를 만들어준) 기시모토 상이 자기 책임이라고 낙담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늘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 이치로는 골드글러브 수상자에게 주는 R사의 골드 패치 제품을 실전에 사용하지 않았다. 활동기간 내내 M사의 것을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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