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박 '야구 덕질'…아재 응원과 아이돌 팬덤의 결합은 어떻게 진화할까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10. 2. 09:03
[취향저격] 야구, 그리고 아이돌 팬덤 (글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2024년 대중문화 최고의 히트 상품은 무엇이었을까. 몇 달 후에나 할 법한 질문임에도 나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바로 프로야구였다고.
극장과 한국 영화는 팬데믹 사태가 끝난 이후에도 과거의 명성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팬데믹 시절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OTT도 예년만 한 히트작이 없었다. 음악? 2024년 대중음악계의 1순위 키워드는 민희진-하이브 분쟁이었다. 이건 산업이지 음악은 아니다. 영화, 드라마, 음악 모두 핫이슈가 될 만한 히트작이 없었다는 얘기다. 반면 프로야구는 사상 최초로 1,000만 관중 시대를 맞이했다.
오랫동안 야구팬으로 살았던 나에게는 썩 달가운 소식만은 아니다. 평일 저녁, 생각이 복잡할 때마다 한적한 잠실야구장을 찾곤 했다. 조명 아래 푸르게 빛나는 잔디 위에서 공을 쫓아 달리는 흰 유니폼의 선수들을 보면 가슴은 뜨거워졌고 머리는 차가워졌다. 27살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쿄 진구구장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우즈의 시합을 보며 '이제 소설을 써야겠다'라고 생각을 한 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집필했다는 전설적 에피소드를 이해할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한적한'이라는 형용사다. 정규 시즌 주말에나 포스트 시즌에는 적용되지 않는 이 단어는 이제 평일 정규 시즌에도 마찬가지가 됐다. 사람이 정말 많아졌다, 젊은 여성 관객들이 많아졌다는 체감이 1,000만 돌파라는 숫자로 구체화했다.
도대체 왜 프로야구의 인기가 급등했는지를 두고 여러 분석이 있다. KBO도 긴급히 여론조사 및 연구를 거쳐 자료를 내놨다. 전통적인 인기 구단이었던 기아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높은 순위, 시즌 말까지 치열했던 역대급 순위 경쟁, 김택연과 김도영 같은 젊은 스타들의 탄생 같은 요인이 제기됐다. 슈카 같은 경제 유튜버들은 IMF 때도 프로 스포츠의 인기가 높았다며 현재의 프로야구 흥행을 경제 불황과 연결 짓기도 한다. 다 일리가 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이려고 한다. 원인보다는 결과, 그 결과가 만들어내거나 만들어낼 현상에 대해서 말이다.
프로야구 인기에 대한 모든 분석에서 가장 확실한 건 20~30대 여성 팬의 증가다. 시대를 막론하고 대중문화 시장의 주 소비자이자 여론을 이끄는 계층이다. 또한 '덕질'에 가장 많은 시간과 돈, 그리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계층이기도 하다. 요컨대 한국에서 '팬덤'이라고 하는 집단을 구성하는 계층이라는 얘기다. 팬덤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운영되는 산업 분야는 아이돌이다. 1990년대 중반 H.O.T., 젝스키스 같은 1세대 아이돌의 등장과 함께 형성된 팬덤은 최소 30년간 대를 물려가며 성장하고 확산했다. 나름의 관행과 불문율이 생겨나고 유형에 따른 분류 체계도 형성됐다. 강력한 조직을 갖추고 문화를 파생시켰다. 이런 팬덤 문화는 아이돌뿐만 아니라 여러 산업과 영역에 영향을 끼쳐왔다. 프로야구도 마찬가지다.
아이돌과 스포츠의 공통 키워드가 있다면 '응원'이다. 일반적 리스너는 자기의 취향에 따라 음악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A라는 가수의 B라는 노래는 좋아하지만, 신곡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멀어지게 된다. 그런데 특정 아이돌을 '응원'하는 팬덤은 다르다. B라는 노래에 꽂혀서 A에 '입덕'했다면 더 이상 신곡의 퀄리티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A가 좋을 뿐, 더 이상 무슨 노래를 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 결과 A의 신곡이 나올 때마다 스트리밍을 돌리고 팬덤 차원에서 총공을 펼친다. 팬 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해 수십 장, 수백 장의 CD를 산다. 이것이 아이돌 팬덤의 응원 방식이다.
야구팬의 응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많을 때도 저녁 6시 반이 되면 스포츠 채널을 틀거나 직관 티켓을 산다. 8회 말까지 2점 차로 이기고 있던 9회 초, 마무리투수가 연속 2안타와 홈런을 맞아 역전당하고, 9회 말 상대 마무리투수를 상대로 선두 타자가 살아 나갔지만, 다음 타자가 병살을 쳐서 결국 역전패당하는 혈압 오르는 날조차, 내일 6시 반이면 어김없이 TV 앞에 앉아 있는 이 불쌍한 사람은 많은 야구팬의 응원 방식이다. 음악의 좋고 나쁨보다는 가수 때문에 응원하고, 성적보다는 팀 때문에 응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인생의 태도다.
그러나 같은 응원이라도 결은 완전히 다르다. 아이돌 팬은 회사와 미디어에 의해 가공된 콘텐츠를 소비하기 마련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영상과 사진, 인터뷰 등 팬을 위한 부가적인 콘텐츠가 쏟아진다. 이 과정에서 팬을 분노케 할 콘텐츠는 없다. 사소한 어그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열애설을 포함한 온갖 가공되지 않은 사적 이슈가 터질 때 팬덤은 흔들린다. '만들어진 신'의 몰락까지 이어진다.
반면 스포츠, 특히 야구는 어떤가. 아무리 잘하는 팀이라도 10게임 중 4번은 진다. 이기는 게임에서조차 위기 상황은 나온다. 그래서 야구팬은 늘 분노한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운전할 때 쌍욕을 하는 것처럼, 야구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돌 팬에게 대상에 대한 욕이 금지돼 있다면, 야구팬에게 응원팀에 대한 욕은 필수인 것이다. 드라마로 비유하자면 아이돌의 세계가 악역 없는 로맨스라면, 야구의 세계는 욕하면서 보는 막장극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2024년 대중문화 최고의 히트 상품은 무엇이었을까. 몇 달 후에나 할 법한 질문임에도 나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바로 프로야구였다고.
극장과 한국 영화는 팬데믹 사태가 끝난 이후에도 과거의 명성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팬데믹 시절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OTT도 예년만 한 히트작이 없었다. 음악? 2024년 대중음악계의 1순위 키워드는 민희진-하이브 분쟁이었다. 이건 산업이지 음악은 아니다. 영화, 드라마, 음악 모두 핫이슈가 될 만한 히트작이 없었다는 얘기다. 반면 프로야구는 사상 최초로 1,000만 관중 시대를 맞이했다.
오랫동안 야구팬으로 살았던 나에게는 썩 달가운 소식만은 아니다. 평일 저녁, 생각이 복잡할 때마다 한적한 잠실야구장을 찾곤 했다. 조명 아래 푸르게 빛나는 잔디 위에서 공을 쫓아 달리는 흰 유니폼의 선수들을 보면 가슴은 뜨거워졌고 머리는 차가워졌다. 27살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쿄 진구구장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우즈의 시합을 보며 '이제 소설을 써야겠다'라고 생각을 한 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집필했다는 전설적 에피소드를 이해할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한적한'이라는 형용사다. 정규 시즌 주말에나 포스트 시즌에는 적용되지 않는 이 단어는 이제 평일 정규 시즌에도 마찬가지가 됐다. 사람이 정말 많아졌다, 젊은 여성 관객들이 많아졌다는 체감이 1,000만 돌파라는 숫자로 구체화했다.
도대체 왜 프로야구의 인기가 급등했는지를 두고 여러 분석이 있다. KBO도 긴급히 여론조사 및 연구를 거쳐 자료를 내놨다. 전통적인 인기 구단이었던 기아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높은 순위, 시즌 말까지 치열했던 역대급 순위 경쟁, 김택연과 김도영 같은 젊은 스타들의 탄생 같은 요인이 제기됐다. 슈카 같은 경제 유튜버들은 IMF 때도 프로 스포츠의 인기가 높았다며 현재의 프로야구 흥행을 경제 불황과 연결 짓기도 한다. 다 일리가 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이려고 한다. 원인보다는 결과, 그 결과가 만들어내거나 만들어낼 현상에 대해서 말이다.
프로야구 인기에 대한 모든 분석에서 가장 확실한 건 20~30대 여성 팬의 증가다. 시대를 막론하고 대중문화 시장의 주 소비자이자 여론을 이끄는 계층이다. 또한 '덕질'에 가장 많은 시간과 돈, 그리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계층이기도 하다. 요컨대 한국에서 '팬덤'이라고 하는 집단을 구성하는 계층이라는 얘기다. 팬덤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운영되는 산업 분야는 아이돌이다. 1990년대 중반 H.O.T., 젝스키스 같은 1세대 아이돌의 등장과 함께 형성된 팬덤은 최소 30년간 대를 물려가며 성장하고 확산했다. 나름의 관행과 불문율이 생겨나고 유형에 따른 분류 체계도 형성됐다. 강력한 조직을 갖추고 문화를 파생시켰다. 이런 팬덤 문화는 아이돌뿐만 아니라 여러 산업과 영역에 영향을 끼쳐왔다. 프로야구도 마찬가지다.
아이돌과 스포츠의 공통 키워드가 있다면 '응원'이다. 일반적 리스너는 자기의 취향에 따라 음악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A라는 가수의 B라는 노래는 좋아하지만, 신곡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멀어지게 된다. 그런데 특정 아이돌을 '응원'하는 팬덤은 다르다. B라는 노래에 꽂혀서 A에 '입덕'했다면 더 이상 신곡의 퀄리티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A가 좋을 뿐, 더 이상 무슨 노래를 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 결과 A의 신곡이 나올 때마다 스트리밍을 돌리고 팬덤 차원에서 총공을 펼친다. 팬 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해 수십 장, 수백 장의 CD를 산다. 이것이 아이돌 팬덤의 응원 방식이다.
야구팬의 응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많을 때도 저녁 6시 반이 되면 스포츠 채널을 틀거나 직관 티켓을 산다. 8회 말까지 2점 차로 이기고 있던 9회 초, 마무리투수가 연속 2안타와 홈런을 맞아 역전당하고, 9회 말 상대 마무리투수를 상대로 선두 타자가 살아 나갔지만, 다음 타자가 병살을 쳐서 결국 역전패당하는 혈압 오르는 날조차, 내일 6시 반이면 어김없이 TV 앞에 앉아 있는 이 불쌍한 사람은 많은 야구팬의 응원 방식이다. 음악의 좋고 나쁨보다는 가수 때문에 응원하고, 성적보다는 팀 때문에 응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인생의 태도다.
그러나 같은 응원이라도 결은 완전히 다르다. 아이돌 팬은 회사와 미디어에 의해 가공된 콘텐츠를 소비하기 마련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영상과 사진, 인터뷰 등 팬을 위한 부가적인 콘텐츠가 쏟아진다. 이 과정에서 팬을 분노케 할 콘텐츠는 없다. 사소한 어그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열애설을 포함한 온갖 가공되지 않은 사적 이슈가 터질 때 팬덤은 흔들린다. '만들어진 신'의 몰락까지 이어진다.
반면 스포츠, 특히 야구는 어떤가. 아무리 잘하는 팀이라도 10게임 중 4번은 진다. 이기는 게임에서조차 위기 상황은 나온다. 그래서 야구팬은 늘 분노한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운전할 때 쌍욕을 하는 것처럼, 야구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돌 팬에게 대상에 대한 욕이 금지돼 있다면, 야구팬에게 응원팀에 대한 욕은 필수인 것이다. 드라마로 비유하자면 아이돌의 세계가 악역 없는 로맨스라면, 야구의 세계는 욕하면서 보는 막장극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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