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철의 집짓기에 도움 되는 설계 제안 (11) 의존형 건축주와 검증형 건축주
진행 이형우 기자 │ 글 사진 최재철(제이초이 건축디자인연구소 소장)
8년 전 필자는 생애 첫 번째 집을 지었다. 하지만 그 집은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가족과 충분히 대화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생긴다. “내가 전문가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렇게 나만의 설계도를 서둘러 완성했다. 설계를 충분히 검토할 시간도 없이 공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가족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집이 완성됐다. 건축 전문가의 의견만 반영된 집은 완성됐지만, 정작 우리 가족은 오랜 시간동안 집에 대한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가족의 삶의 이야기가 집 안에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 족의 마음이 그러했으니, 필자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처럼 가족 간의 대화는 반쪽짜리 집을 온전한 집으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다.
지금까지 경험한 건축주들을 관찰해 보면, 크게 두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궁금한 점이 있을 때마다 철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을 통해 검증을 요구하는 ‘검증형’이다. 두 번째 유형은 ‘의존형’이다.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기보다는 설계자나 시공 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건축주가 의존형에 속한다. 집을 짓기 위해 계획 중인 사람들 은 자신이 어느 유형에 더 가까운지 고민해 보는 것이 좋다. 본인의 유형을 파악하면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는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유형의 건축주들과 다양한 집짓기 프로젝트 경험이 있다. 이번 호에서는 두 가지 유형의 건축 주 사례를 소개 하고자 한다.
검증형 건축주
검증형 건축주는 때때로 협업하기 어려운 인물로 여겨질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설계자나 시공자의 전문 분야에까지 세세한 부분을 체크하고 검증하려 하기 때문이다. 설계자나 시공자로서는 건축주가 설계나 시공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 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원활하게 프로젝트를 이끌어 왔다고 느낀다. 하지만 검증형 건축주와 작업할 때는 설계와 시공에 소요되는 시간
과 노력이 증가한다. 검증형 건축 주 는 설계와 시공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며 전문적인 지식 범위를 넘나들기도 한다. 심지어 전문가도 사소하게 여길 수 있는 사항까지 질문하며 답변을 기다린다.
기술적인 내용의 질문도 하기 때문에 설계자는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배경 지식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건축주에게 답변을 제공하지 않으면 건축주로 하여금 무시를 당한다는 느낌을 받게 할 수도 있어 이 역시 고민이 된다. 내가 경험한 검증형 건축주는 준비과정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서 친환경 재료를 사용한 건축 방식을 고민하던 끝에 결국 목조주택을 짓기로 결정했다. 나무로 집의 뼈대를 세우 는 방식 중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흔히 사용되는 경량목구조 방식이었다. 그는 건설회사 임원을 포함해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목조 주택에 대한 의견을 수집했다. 주변에서는 철근콘크리트의 내구성과 시공상의 장점을 들며 콘크리트 집을 추천했지만, 이러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목조주택을 지어 잘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콘크리트 집이 더 낫다고 조언한 사람 중 목조주택에 대해 제대로 알거나 거주해본 경험이 있는 이는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하 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그 의견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만약 조언을 주는 사람이 해당 부분에 대해 경험이 없다면 아예 무시해도 된다. 경험도 하지 않은 의견을 따르는 것은 득(得)보다는 실(失)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 다니는 청년이 높은 연봉을 포기하고 1인 창업을 준비한다고 하자.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의 험난한 길을 택하려 하느냐며 만류할 게 분명하다.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대기업 근무나 1인 창업의 경험이 있다면 그들의 의견을 어느 정도는 참고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반대의 경우다. 집을 짓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집을 짓겠다는 예비 건축주에게는 항상 자의적 조언자들이 붙는다. 전문가가 아니거나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는 이들의 의견은 듣고 흘려보내는 것이 나 을 수 있다. 궁금한 점이 있을 경우, 건축주가 스스로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에 넘쳐나는 불확실한 정보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설계나 시공 과정에서 의문이 들면, 설계자나 시공자에게 직접 질문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현명하다. 설계자나 시공자가 부담을 느낄 수 있으나 집을 완성한 후 문제가 발생하는 것보다는 사전에 해결하는 것이 훨씬 낫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도 다른 전문가의 검증 없이 넘어가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면 문이나 창문을 주문할 때 많은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는데, 설계 도면에는 창문이나 문이 어떻게 열리는지 나타나 있다. 창문의 스타일이나 열리는 방향은 건축주와 설계자가 충분히 논의를 거쳐 결정했더라도 창호회사가 도면의 방향을 잘못 이해해 의도와 정반대로 제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렇게 잘못 제작된 창문은 설치하거나 다시 주문해야 하며, 이는 디자인과 기능 을 손상시키거나 공사 기간 을 연장시킬 수 있다. 집짓기 과정에서 검증해야 할 부분은 이것뿐만 이 아니다. 검증형 건축주는 이 모든 과정에 신경을 쓰기를 자처한다. 하지만 건축주의 전문 분야가 아니어서 놓칠 수 있는 부 분도 많다. 사실, 전문가에게 일을 맡기는 이유는 그들이 건축주 대신 이러한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검증 과정은 일반적으로 불신 때문에 이루어지지만, 건축주가 집짓기 과정에서 의문점을 검증한다는 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상호 신뢰가 있으면 공사를 행복하게 마칠 확률이 높아진다. 따라서 행복한 집짓기를 위해서라도 건축주, 설계자, 시공자 간의 신뢰 관계를 강화하고 유지하 는 노력이 필요하다.
계약서 상에서 건축주는 ‘갑’, 설계자와 시공자는 ‘을’로 표기된다. 갑은 프로젝트 의뢰인이고, 을은 의뢰를 받아 수행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계약서에 표기된 수직 관계와 달리 갑과 을이 수평적 관계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태도가 상호 신뢰를 쌓는데 도움이 된다. 수직적 관계를 지향하면 신뢰에 금이 가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손해를 보는 구조가 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설계자나 시공자가 전문 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건축주를 무시하는 태도 또한 버려야 한다.
의존형 건축주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집을 짓기 위해 계획을 세울 때 ‘검증형’보다는 ‘의존형’에 더 가깝게 행동하는 경향이있다. 설계나 시공이 전문 분야에 속하기 때문에 전문가에게 의존하려는 것이다. 많은 건축주들이 설계는 설계자에게, 시공은 건설사에게 맡긴다. 전문적인 분야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 실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집짓기는 전문적인 분야에 속하면서도 모든 것을 전문가 에게만 맡길 수 없는 독특한 분야이다.
모르니까 의존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필자가 만나는 예비 건축주에게는 늘 일관되게 조언해준다. 의존형 건축주가 되지 말 것을 말이다. 모든 것을 맡기면 분쟁의 소지가 없을 것 같지만, 내가 경험한 의존형 건축주들은 대체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아주 전문적인 부분은 의존하되 건축주로서의 역할도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의존형 건축주들은 일이 진행되는 동안 신경쓸 일이 적어 상대적으로 마음은 편할 수 있다.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당장은 편할 수 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나서면 일을 망칠까 걱정하는 마음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아무리 유능하고 경험 많은 설계자라 할지라도 자신이 지으려는 집에 대한 생각, 라이프 스타일,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자신만큼 잘 알지는 못한다.
계약 상에서는 갑과 을이 존재하지만,일을 진행할 때는 건축주, 설계자, 시공자가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수직 구조가 아닌 수평적인 구조를 유지해야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들이 공유될 수 있다. 한 사람이 군림하려 하면 수평적인 구조의 균형이 무너진다. 균형이 무너지면 한쪽으 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마치 무게가 더 나가 는 쪽으로 시소가 기우는 것처럼 말이다. 의존형 건축주는 스스로 균형을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다. 설계나 시공 쪽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에 언뜻 보면 잘하는 행동처럼 보일 수 있다.
전문가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지나치면 탈이 나듯, 균형이 깨질 정도로 한쪽에 힘을 실어주다 보면 최종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몇 년 전, 양평 인근에 집을 지으려고 찾아온 건축주는 전형적인 의존형이었다. 바쁜 회사 생활 때문에 미팅 시간을 내기조차 어려웠지만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더 늦으면 못 지을 거 같아서였다. 설계 과정에서는 어렵게나마 건축주와 가족의 의견을 도출시켜 겨우 기본설계안 을 확정해 전달해주고 나머지 절차는 건축주가 별도로 진행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시공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현장을 직접 확인할 시간조차 없었던 건축주는 모든 것을 시공사에 맡겼다고 한다. 시공이 진행되는 동안 현장을 방문하지 못했고 시공 은 계속 진행 되었다. 시공사가 건축주의 의도를 잘 파악했다면 좋았겠지만 사전에 세부적인 미팅을 하지 않는 한 그것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론적으로 건축주가 본업에 충실하고 시공사가 불필요한 지적 없이 일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지만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양평 집 사례는 안타깝게 후자에 속한 경우였다.
‘건축주를 위해서’ 아닌 ‘건축주와 함께’ 일해야
지금까지 다양한 성격과 성향을 가진 건축주들과 일하면서 얻은 교훈은 설계자는 ‘건축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건축주와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축주와의 갈등은 설계자와의 관계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현장이 평화롭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건축주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예비 건축주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정보를 찾고 가족들과 충분히 대화하며 설계자와 건설사에게 궁금한 점이 생기면 물어보고 넘어가야 한다. 설계자와 건설사는 건축주가 모르는 것을 전제로 상세히 설명해줄 준비가 돼 있다. 단순히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신뢰는 쌓일 수 없다. 깐깐하게 서로의 영역에 관여하되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격을 해치는 행동은 삼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