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하이닉스의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은 단순한 주식거래 시장 확장을 넘어 투자자 구성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자본이 집중된 미국 시장에 편입되면서 투자자 저변이 확대되고 기업가치 평가 방식도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ADR 상장을 기점으로 SK하이닉스가 국내 증시 중심의 투자구조에서 벗어나 글로벌 인공지능(AI) 인프라 기업으로 평가받는 기반을 마련할 것으로 보고 있다.
외국인투자자 상당수가 패시브 자금
30일 기준 SK하이닉스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주요주주 명단에는 국민연금공단(7.50%)을 필두로 블랙록 계열(5.00%), 캐피탈리서치앤매니지먼트(4.98%) 등이 올라 있다. 겉으로 보면 글로벌 투자자의 비중이 높은 구조지만 세부 내역에서는 양상이 다소 다르다.
블랙록 계열 지분 중 상당 부분은 블랙록펀드어드바이저스(2.19%)와 블랙록인스티튜셔널트러스트컴퍼니(1.00)를 통해 보유하고 있다. 이들 법인은 상장지수펀드(ETF)와 인덱스펀드 등 시장 지수에 포함된 종목을 그대로 따라 투자하는 상품을 운용한다. 여기에 블랙록펀드어드바이저스(UK) 리미티드(0.86%), 블랙록재팬(0.07%) 등 지역법인의 보유 물량이 더해진 구조다.
이들 자금은 특정 기업을 선별해 투자하기보다 미리 정해진 지수 구성에 따라 종목을 자동으로 담는 ‘패시브 자금’의 성격이 강하다. 패시브 자금은 투자자가 개별기업을 분석해 선택하기보다 코스피지수나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코리아지수처럼 시장을 대표하는 지수에 포함된 종목을 따라 투자하는 자금이다.

예를 들면, 지수에서 SK하이닉스의 비중이 높아지면 그에 맞춰 주식을 더 사고 반대로 비중이 낮아지면 자동으로 매도하는 방식이다. 즉 SK하이닉스의 실적이나 기술경쟁력을 보고 투자했다기보다는 한국 시장 전체를 구성하는 종목 가운데 하나로 편입한 성격이 짙다. 당연히 환율이나 지정학적 이슈, 원화가치 변동에 극도로 민감하며 지수 비중이 조정될 경우 기업 실적과 무관하게 자금이 빠져나갈 위험을 안고 있다.
반면 ADR 상장으로 유입되는 자금은 성격이 다르다. 미국 증시에서 거래가 가능해지면 현지에서 반도체나 기술기업에 투자하는 글로벌 펀드의 접근성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글로벌 펀드는 국가 단위가 아니라 산업과 기업의 성장성을 기준으로 투자하는 성격이 강하다. 즉 국내 증시에 상장된 상태에서는 거래시간, 환전, 규제, 지정학적 이슈 등의 장벽으로 참여가 제한됐던 자금이 ADR을 통해 유입되는 구조다.
‘한국 시장 비중에 따라 편입되는 자금’에서 ‘기업 경쟁력을 기준으로 투자하는 자금’ 중심으로 투자자의 구성이 바뀌는 흐름으로 한국이라는 국가 변수와 무관하게 SK하이닉스가 안정적으로 투자재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TSMC 효과 재연…마이크론과 밸류 격차 축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1위인 대만 TSMC도 ADR 상장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ADR이 단순 자금조달이 아니라 투자자 구조를 바꾸는 수단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TSMC는 1997년 뉴욕증권거래소에 ADR을 상장했다. 당시 대주주였던 필립스는 반도체 사업을 접고 보유 지분 매각을 추진했지만 대만 증시만으로는 거래 규모와 유동성 한계로 대규모 물량을 소화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TSMC는 이를 미국 시장으로 옮겨 해결했다. 일부 물량은 국내 기관에 배분하고, 나머지는 신주 발행 없이 기존 주식을 ADR 형태로 상장해 글로벌 투자자들을 흡수했다. 대주주 지분 매각 물량은 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고 소화됐으며, 동시에 미국 기관투자가들이 새 주주로 유입되며 TSMC 투자자의 기반은 대만 로컬 중심에서 글로벌 투자자로 빠르게 재편됐다.
상장 이후 TSMC는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SOX)와 나스닥100 등 주요 지수에 편입되며 안정적인 수급 기반을 확보했다. 미국 본토에서 반도체ETF를 사는 모든 투자자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TSMC 주주가 되는 식이다. 현재 미국에 상장된 TSMC의 ADR은 전체 시가총액 기준으로 약 20%를 차지한다. ADR 상장 당시 절반에 미치지 못했던 TSMC의 외국인 지분은 70%를 넘어서게 됐다.

SK하이닉스 역시 ADR 상장으로 유사한 효과가 기대된다. 주요 반도체지수 편입이 현실화할 경우 글로벌 자금이 구조적으로 유입되는 기반이 마련되고, 투자자 구성과 기업가치 평가 방식도 변화할 수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엄격한 공시 기준을 충족하며 얻게 되는 지배구조의 투명성 역시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믿고 담을 수 있는 우량주’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ADR 상장은 투자자 구성 변화를 넘어 글로벌 자금흐름을 바꾸는 변수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증시에 상장할 경우 글로벌 투자자들이 동일한 시장 환경에서 마이크론 등 경쟁사와 실시간 비교투자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 기준이 국가가 아닌 산업과 기업 경쟁력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동일 업종 간 상대가치 비교가 본격될 수 도 있다. 금융투자 업계는 이번 상장이 SK하이닉스의 고질적인 가치평가 격차를 해소하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로 SK하이닉스는 세계 1위 고대역폭메모리(HBM) 제조사임에도 경쟁사 대비 낮은 평가를 받아왔다. 올해 예상 실적 기준 주가수익비율(PER)은 약 5.9배로 미국 마이크론(7.8배)에 못 미친다. 즉 같은 1달러의 이익을 내더라도 마이크론은 약 7.8달러, SK하이닉스는 약 5.9달러의 가치로 평가된다는 말이다. 반면 실적 지표는 훨씬 우위에 있다. 지난해 SK하이닉스의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은 약 57%로 마이크론(21%)을 크게 웃돌고 영업이익 역시 47조2063억원으로 마이크론(161억3500만달러, 약 24조4500억원)을 상회한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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