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현장] "40년 농사 지었지만… 이런 여름 처음입니다"

'당근 주산지' 제주 구좌읍 월정리 가 보니
계속되는 폭염에 농가마다 물 구하기 전쟁
매일 밤 늦게까지 물 주며 싹 틔우기 '진땀'
"당근 재파종했는데 싹 나올지…" 노심초사

[한라일보] "40년 농사를 지었는데 이런 여름은 처음입니다." "24시간 물을 줘도 다음 날이면 물이 말라버립니다. 당근이 싹을 틔울 수 있겠습니까."

12일 바짝 마른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의 한 밭에서 당근이 이제야 막 발아하고 있다. 이상국기자

12일 이동식 물탱크(물백)가 설치된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에서 만난 주민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토로했다. 계속되는 폭염으로 바로 인근에 있는 농업용 관정에서도 '물 부족' 현상이 발생하면서 이곳에선 물 구하기 전쟁이 치러지고 있다.

트럭에 물통을 싣고 온 강모(67) 씨는 "원래 물이 잘 나오던 관정이었는데 사용량이 워낙 많아 오후 8~9시면 물 공급이 끝나버린다"며 "물이 있으면 무조건 받아야 하니 하루 스무 번은 (이 길을) 왔다 갔다 한다"고 말했다.

김경찬 월정리 이장은 "전시 상황이나 다름없다. 관정 물탱크에 물이 있으면 밸브를 열어주고 없으면 다시 물이 찰 수 있게 잠그고 있다"면서 "(행정에서) 물백에 물을 날라주고는 있지만 지금으로선 답이 없다"고 했다.

12일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에 설치된 이동식 물탱크를 찾은 오영훈 제주지사가 급수 지원 상황을 보고 받고 있다. 이상국기자

앞서 제주도는 지난 8일부터 구좌읍에 가뭄대책 상황실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농업용수 부족 사태에 급수 지원 대책도 가동 중이다. 월정리를 비롯해 김녕, 행원, 평대, 한동 등 구좌읍 8개 지역에 1곳당 10t짜리 공용 물백 2개를 두고 20t씩 공급하고 있는데, 이 역시 수요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폭염에 바짝 마르는 대지처럼 농민들의 속도 타들어가고 있다. 당근 주산지인 구좌읍은 파종기를 맞았지만, 푸른 싹이 튼 밭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뙤약볕 아래에서 물을 주다 끊기면, 땅속에서 싹 틔울 준비를 하는 씨앗이 자칫 고온에 익어버릴 수 있어 농가마다 노심초사다.

당근 재배 농가인 김상용(70) 씨는 "햇볕이 뜨겁고 기온이 높다 보니 낮에 물을 주다가 (물이 부족해) 못 주면 역효과가 난다"면서 "그래서 새벽 4~5시부터, 밤에는 오후 11~12시까지 플래시를 켜 가며 물을 주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7월 23일 첫 파종을 했는데 싹이 나오지 않아 지난주에 재파종을 했다"며 "계속 물을 주니 싹이 나올 기미는 보이는데 아직 싹이 트진 않았다. 자연이 하는 일이니 어쩔 수가 없지만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김은섭 (사)제주당근연합회장(사진 가운데)이 12일 오영훈 지사에 당근 재배 농가의 현재 상황을 설명하며 장단기적인 지원 대책을 요청하고 있다. 이상국기자

현장에서 만난 농가들은 역대급 폭염으로 전에 없던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대책 마련을 요청했다. 기후 변화 등으로 피해가 반복될 우려가 있는 만큼 장기적인 대비책도 강조하고 있다.

김은섭 (사)제주당근연합회장은 이날 구좌읍 가뭄 현장을 찾은 오영훈 제주도지사에 "농업용수 관이 노후화하고 관 크기도 작다 보니 서로 물을 쓰려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스프링클러로 물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앞으로의 물 사용량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농가별로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물탱크 지원 사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오영훈 지사는 "내년에도 (올해와 같은) 가뭄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생산자단체, 농협 등과 협의해 검토해 볼 뜻을 내비쳤다. 올해부터 당근 보험가입 기준이 출현율(발아 후 지표면 위로 싹이 올라와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비율) 50%로 변경되며 피해 보장이 어려운 것에 대해선 "농작물재해보험 가입 문제는 향후 월동채소 전체에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농림축산식품부와의 협의를 통해 개선방안을 찾겠다"고 했다.

김지은기자 jieu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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