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필드의 공기는 늘 무겁다. 붉은 깃발이 물결치고, ‘You’ll Never Walk Alone’이 끝나갈 즈음이면 대부분의 원정팀은 이미 한두 발 물러선다. 지난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그랬다. 2016년 루이스 판 할 시절 웨인 루니의 한 방 이후, 안필드에서 승리는 늘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 사이 리버풀은 우승과 트로피로 정점을 찍었고, 맨유는 감독 교체와 스쿼드 개편을 반복하며 길을 잃었다. 그래서 이번 2-1 승리는 점수 이상의 의미가 있다. ‘9년 9개월 만’이라는 문장이 주는 묵직함, 그리고 그 결승골을 해리 매과이어가 넣었다는 상징성까지. 여러 겹의 이야기가 한밤에 겹쳐졌다.

시작은 이례적일 만큼 빠르고 간단했다. 킥오프 2분이 채 되기도 전에 아마드 디알로가 오른쪽에서 찔러 넣은 패스가 라인을 가르자 브라이언 음뵈모가 속도를 올렸다. 수비를 앞에 두고도 주저 없이 오른발을 휘둘렀고, 공은 골키퍼의 다리 사이를 통과해 골망을 흔들었다. 안필드가 준비한 초반 압박과 서서히 고조되는 홈의 기세를 단숨에 끊어버린 선제골. 빠르게 앞선 팀은 버티고 찌르는 축구로 돌아간다. 맨유가 딱 그랬다. 중후반으로 갈수록 라인을 섣불리 올리지 않았고, 역습의 첫 두 터치를 최대한 단순하게 가져갔다.
리버풀은 내용을 놓치지 않았다. 사실 이날 경기는 ‘골대의 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디 각포가 전반 21분 감아 찬 슈팅이 골대를 울렸고, 10여 분 뒤 굴절된 공 역시 철망을 맞고 튕겨 나왔다. 후반 초반 프리킥 혼전에서도 또 한 번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운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맨유의 수비 블록이 박스 앞을 촘촘히 막아 ‘완벽한 타이밍’의 슈팅을 내주지 않은 점도 봐야 한다. 버질 판 다이크가 경기 후 “공간이 너무 열렸다”고 말했지만, 그 공간을 열리게 만드는 과정에서 리버풀의 전개가 얼마나 촘촘했는지, 반대로 맨유가 얼마나 ‘위험 구역’만 골라 막았는지가 함께 읽힌다.

그러나 홈의 파도는 끝내 한 번 넘어왔다. 후반 33분, 페데리코 키에사가 낮게 깔아준 크로스를 각포가 박스 안에서 마무리했다. 동점. 이 장면은 리버풀이 수차례 시도하던 ‘하프스페이스 침투+컷백’ 전형의 완성형이었다. 맨유가 박스의 중앙을 두텁게 지키자 리버풀은 풀백 뒤 어깨를 공략해 낮고 빠르게 공을 집어넣었다. 그 장면만큼은 맨유도 반보 늦었다.
여기서 경기의 향방을 갈라놓은 건, 의외로 ‘침착함’이었다. 동점 직후 보통의 맨유라면 라인을 내리고 버티는 데 급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브루노 페르난데스가 볼을 잡을 때마다 옆과 뒤를 먼저 확인했다.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왼쪽에서 살짝 뿌린 크로스는 각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어설픈 각도’를 해리 매과이어가 해결했다. 후반 39분, 수비수의 등에 가려진 채 기다리던 매과이어가 펄쩍 뛰어올라 헤더로 골문을 꿰뚫었다. 매과이어에게 이 골은 단지 결승골이 아니었다. 방출 대상, 주장 완장 반납, 주전 경쟁 실패… 낙인이 줄줄이 붙었던 그가, 가장 어려운 원정에서 팀을 구했다. 후벵 아모림 감독이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된다”고 치켜세운 이유다. 압박과 조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장점을 끌어올리는 법을 안 선수만이 넣을 수 있는 골이었다.

이 장면을 중심으로 경기를 다시 보면, 맨유의 플랜은 단순하지만 효율적이었다. 첫째, 초반 선제골로 게임의 틀을 바꿨다. 둘째, 중원에서 무리한 전진 드리블 대신 측면으로 방향을 틀어 시간을 벌었다. 셋째, 수비는 숫자보다 위치를 우선했다. 다 같이 내려앉는 대신 박스 앞 두세 명이 공의 진행 경로를 먼저 잘랐다. 넷째, 세트피스와 크로스의 질을 끌어올려 ‘한 방’을 준비했다. 이 네 가지가 반복될수록 리버풀의 공격은 정면 충돌을 피하고 측면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동점골은 리버풀의 집요함이 만든 결실이었지만, 그 직후 맨유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게 가장 컸다.
개인으로 좁혀보면, 매과이어의 서사는 더 길게 써도 모자라다. 텐 하흐 시절 그는 늘 첫 번째 비판의 화살을 맞았다. 결정적인 실수 한 번이면 하이라이트는 늘 그의 얼굴로 마감됐고, 여름마다 이적설이 꼬리를 물었다. 그런데 잔류를 택했고, 주장 완장을 내려놓았고, 벤치에서 기다렸다. 이번 시즌 초반에도 마타이스 더 리흐트에게 밀리는 듯했지만, 기회가 왔을 때 경합 하나, 클리어링 하나, 그리고 어제의 헤더 하나로 흐름을 돌렸다. 선수 경력에서 가장 무거운 순간을 통과하는 법을 보여준 셈이다. 맨유 팬들이 그를 다시 박수로 부르는 이유가 단지 결승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모림 감독의 표정도 눈에 띄었다. “크리스마스 전에 경질될 일은 없겠다”며 웃었지만, 그가 이 승리를 ‘가장 큰 승리’로 꼽은 데는 맥락이 있다. 맨유는 시즌 초부터 기복이 심했다. 감독 스스로 “지금의 맨유는 역사상 가장 나쁜 팀일지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이 바닥을 찍은 적도 있다. 하지만 최근 구단의 신임을 확인했고, 그 직후 리그 첫 2연승을 만들었다. 안필드에서 9년 만의 승리라면, 결과 이상의 에너지 전환이 가능하다. 게리 네빌이 “이제 감독이 선수들을 믿기 시작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뢰는 계획을 단단하게 만든다. 신뢰가 있어야, 다음 주 브라이턴·포레스트·토트넘이라는 현실적인 시험대에서도 같은 원칙으로 뛸 수 있다.
리버풀 쪽에서는 판 다이크의 인터뷰가 마음에 남는다. “겸손함이 필요하다. 잘못된 결정을 반복했다.” 사실 이 팀은 여름에 돈을 많이 썼고, 전력으론 여전히 상위권이다. 하지만 연패가 길어질수록 선수들은 더 급해진다. 급해지면 쉬운 패스를 버리고, 당연한 위치를 놓친다. 이날 리버풀은 세 번이나 골대를 때렸다. 운이 따랐다면 다른 결과였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판 다이크가 ‘결정’과 ‘공간’을 언급한 건, 스스로의 문제를 안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반등의 여지는 충분하다. 다만, 프리미어리그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10월, 아직 갈 길은 멀다. 하지만 4연패라는 단어는 무거운 현실이고, 바로 다음 경기에서 디테일을 바꿔야 한다.

순위표를 놓고 과장할 필요는 없다. 맨유는 9위로 올라섰고, 아직 윗자리와의 격차는 크지도 작지도 않다. 유럽 대회도, 리그컵도 없으니 리그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스쿼드를 봐도 ‘톱6’ 싸움을 못 할 전력은 아니다. 브루노가 컨디션을 찾았고, 마운트가 리듬을 올리면 중원은 달라진다. 전방에서는 음뵈모의 직선성과 다른 공격수들의 움직임이 맞물리면 옵션이 늘어난다. 무엇보다 수비 라인의 구성과 라인 간격이 최근 두 경기에서 눈에 띄게 안정됐다. 이런 팀은 ‘안 질 경기’를 만들어낸다. 안 지는 경기 수가 쌓이면, 어느새 표의 오른쪽 위로 올라가 있다.
그렇다고 들뜰 일도 아니다. BBC가 말했듯 진짜 시험은 다음 세 경기다. 맨유는 최근 두 시즌 동안 브라이턴, 포레스트, 토트넘에게서 단 1점도 못 건졌다. 익숙한 약점과 익숙한 상대를 상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지가 기준이 된다. 안필드 원정 승리는 가치를 만들어줬다. 이제 그 가치를 ‘패턴’으로 바꾸는 일만 남았다. 압박을 견디는 첫 패스, 전환 속도, 세트피스 루틴의 다양화, 교체 타이밍과 교체 후 전술의 미세 조정. 승리는 디테일의 총합이고, 연승은 그 디테일을 습관으로 만들 때 온다.

마지막으로, 이 경기는 ‘이야기’가 살아 있는 밤이었다. 매과이어의 재기, 아모림의 표정, 판 다이크의 자성, 골대를 때린 공들, 추가시간 8분을 버티는 원정 벤치의 숨소리. 축구는 결국 사람의 스포츠다. 비난 속에서 고개를 들고, 의심 속에서 동료를 믿고, 어려운 장소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순간들이 모여 시즌을 만든다. 안필드의 밤은 맨유에게 그 순간을 선물했다. 중요한 건 다음이다. 오늘의 환호가 내일의 자만으로 바뀌지 않도록, 오늘의 약점을 내일의 수정으로 연결할 것. 그 작업을 해내면, 맨유는 진짜로 위를 본다. 그리고 리버풀에게도 이 패배는 좋은 거울이 될 수 있다. 한 시즌은 길고, 10월의 연패는 5월의 결론을 결정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무거움을 인정하고, 다시 기본으로 돌아갈 때, 그들의 봄도 또 온다.
안필드에서의 2-1. 스코어는 짧았지만, 문장은 길었다. 맨유는 오랜만에 그 문장의 주어가 됐다. 이제 문장을 이어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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