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의 시대 저무나…UAE의 OPEC 탈퇴가 던진 질문[천조국 리포트]

염현석 기자 2026. 5. 4.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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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 원유보다 오늘의 현금"…산유국도 포스트오일 경쟁
산업의 중심축, 원유에서 전력·AI 인프라·핵심광물로 이동
원전·LNG·구리·배터리·데이터센터가 다음 투자 키워드
트럼프 "유가·휘발유 가격 낮추는 데 좋은 일"

(뉴욕=머니투데이방송) 염현석 특파원= 아랍에미리트(UAE)의 OPEC(오펙) 탈퇴는 단순한 산유국 갈등을 넘어, 근 100년 동안 세계 경제를 움직여온 석유 중심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원유는 여전히 항공, 해운, 석유화학, 군수 산업의 핵심 자원이지만, 미래 산업의 주도권은 점차 전력과 데이터, 핵심광물로 이동하고 있다. 20세기 산업의 혈액이 원유였다면, 21세기 인공지능(AI) 산업의 혈액은 전기이기 때문이다.

UAE가 오펙을 탈퇴한 배경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원유 정책을 둘러싼 시각 차이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사우디는 고유가를 통해 재정 여력을 유지하려는 쪽에 가깝다. 인구 증가와 복지 비용, 대형 미래도시 프로젝트 등을 감당하려면 높은 유가가 필요하다. 반면 UAE는 원유를 미래에 남겨두기보다 지금 현금화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석유 수입을 바탕으로 다음 산업의 성장 엔진을 선점하겠다는 계산이다. 더 높은 가격을 기다리며 원유를 땅속에 오래 묻어두기보다는, 지금 더 많이 팔아 현금을 확보하고 이를 데이터센터, 금융, 첨단기술, AI 인프라에 투자하려는 전략이다.

이 같은 원유에 대한 시각 차이는 실제 정책의 차이로 나타났다. 사우디는 감산을 통해 가격을 방어하려 했고, UAE는 생산능력을 키운 만큼 더 많이 팔기를 원했다. UAE는 2010년 이후 원유 생산능력 확대에 대규모 투자를 해왔지만, 오펙의 생산 제한 때문에 이를 충분히 현금화하지 못했다. UAE는 이미 하루 약 370만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있으며, 실제 생산능력은 450만배럴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2027년 말까지는 하루 500만배럴 생산능력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UAE의 OPEC 탈퇴를 두고 "OPEC이 창설된 이후 가장 큰 실존적 위기"라고 평가했다. UAE는 이전에 OPEC을 떠난 카타르, 에콰도르, 앙골라와 달리 막대한 생산 여력과 투자 자금, 증산 의지를 동시에 갖춘 핵심 산유국이기 때문이다.

다만 UAE의 오펙 탈퇴를 곧바로 '석유의 종말'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원유는 여전히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핵심 에너지원으로, 항공과 해운, 석유화학, 군수, 중장비 산업에서 석유를 단기간에 대체하기는 쉽지 않다. 중동 전쟁이나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이 제기될 때마다 국제유가가 급등하는 것도 석유가 여전히 세계 경제의 핵심 변수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산유국 내부에서조차 석유를 바라보는 계산법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산유국의 힘은 원유를 얼마나 오래 쥐고 가격을 통제하느냐에서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원유를 팔아 확보한 자본을 어디에 투입하느냐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UAE가 오펙의 감산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것도 석유 자체보다 석유 이후의 산업 지형을 더 크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UAE가 주목하는 분야는 전통적인 에너지 산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데이터센터, 금융, 인공지능, 첨단기술, 물류 인프라 등 비석유 산업이 핵심이다. 이는 석유 수출로 번 돈을 다시 석유 산업에만 묶어두지 않고, 전력과 데이터 중심의 산업 구조로 옮기겠다는 의미다. 원유가 20세기 산업의 기반이었다면, AI와 디지털 산업의 기반은 안정적인 전력과 데이터 처리 능력이다.

이 지점에서 원전과 LNG, 전력망, 구리, 배터리, 데이터센터가 다음 투자 키워드로 떠오른다.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한다. 반도체 공장과 전기차, 배터리, 클라우드 인프라도 모두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전제로 한다. 전기를 얼마나 싸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가 제조업과 기술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특히 전기 에너지가 향후 산업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UAE에서는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와 함께 원자력발전도 주목받고 있다. 재생에너지는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발전량이 달라지지만, 원전은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저전원이다.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업이 24시간 전력을 요구하는 만큼 원전의 역할이 다시 부각되고 있고, UAE 역시 SMR 등 다양한 형태의 원전에 주목하고 있다.

에너지원의 변화와 함께 소재 쪽에서도 변화가 크다. 구리와 배터리 핵심광물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리는 전력망, 데이터센터, 전기차, 재생에너지 설비에 모두 들어간다. 전기화가 진행될수록 구리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리튬과 니켈, 희토류는 배터리와 전기모터, 방산, 첨단 전자산업에 필수적인 소재다. 과거 석유가 산업의 전략자원이었다면, 앞으로는 전력망과 핵심광물이 그 역할의 일부를 나눠 갖는 구조다.

결국 UAE의 오펙 탈퇴는 단순히 원유를 더 팔겠다는 결정이 아니다. 석유를 둘러싼 산업의 무게중심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UAE는 더 높은 유가를 기다리며 생산을 묶어두기보다, 원유를 현금화해 다음 산업으로 이동하려 한다. 이는 산유국조차 석유 이후의 경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실효성을 두고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UAE가 오펙을 탈퇴하면 추가 공급을 통해 현금 흐름을 키울 수 있다. 하지만 증산이 곧바로 수익 확대로 이어진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UAE의 증산이 사우디와의 가격 경쟁으로 번지거나, 호르무즈 해협 재개 이후 이란산 원유까지 시장에 돌아오면 유가가 낮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생산량은 늘어도 배럴당 수익성은 낮아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UAE의 오펙 탈퇴를 공개적으로 반긴 것도 주목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29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궁극적으로 휘발유 가격과 유가를 낮추는 데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UAE의 독자 증산이 사우디 중심의 감산 질서를 약화시키고, 국제유가를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기대가 곧 UAE의 이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UAE는 오펙을 벗어나 생산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동시에 가격 방어 장치 밖으로 나오는 위험도 떠안게 된다. 증산이 유가 하락으로 이어지면 미국 소비자와 트럼프 행정부에는 호재가 될 수 있지만, UAE는 더 많이 팔고도 배럴당 수익성이 낮아질 수 있다.

결국 이번 탈퇴가 트럼프만 웃게 할 카드로 끝날지, UAE가 원유 수익을 전력·데이터센터·AI 인프라·핵심광물 중심의 산업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출발점이 될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염현석 머니투데이방송 MTN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