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비용, 생밤 5개”…힙한 왕십리 미용실, 어르신들 줄서는 이유
취약계층에 무료 미용 봉사하게 된 사연

“나처럼 없는 사람도 착한 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형형색색 반짝이는 알전구에 흰 페인트로 갈겨쓴 문구들이 가득한 인테리어. 이 개성 넘치는 미용실에 매월 넷째주 월요일이면 어르신들이 줄을 잇는다. 바로 무료 미용을 받기 위해서다.

‘남성 커트 5000원’으로 동네에서 유명한 미용실 덤앤더머의 원장 이재광(44)씨는 지난 9월부터 취약계층을 위한 무료 미용 봉사를 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과 일요일은 해당 미용실 휴무일이지만 그는 매달 휴무일 중 하루를 반납하고 취약계층 손님들에게 ‘공짜 헤어 커트’를 하고 있다.
9월, 처음 무료 미용을 시작했을 때 온 손님들은 단 7명이었다고 한다. 그다음 달에는 10명이 넘게 찾아오더니 이후 입소문이 나면서 지난달에는 30명이 넘는 손님들이 머리를 다듬고 갔다. 이씨는 “정신없이 머리카락만 쳐다보고 일했다”면서도 “그렇게 일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올해로 미용 경력 25년차인 이씨가 이처럼 봉사를 하게 된 데에는 깊은 사연이 있다. 올해 초 한 아주머니가 미용실에 찾아와 “집에 아예 움직일 수 없는 아저씨가 있다”며 “집에 와서 머리를 잘라 달라”고 이씨에게 부탁했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간절히 부탁하는 모습에 결국 이씨는 미용 약속을 잡았다.
이씨는 “하필 당일이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아주머니 집에) 가보니 정말 거동이 안 되는 분이 계셨다”며 “바닥에 누워계셨는데 그대로 엎드려서 머리를 잘라드렸다”고 말했다. 미용사로서 생전 아버지 머리도 제대로 감겨드린 적이 없던 그는 갑자기 미안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었는데 몇 년전 돌아가셨다. 그는 “안 좋은 일이 겹치기도 했고, ‘우리 아빠도 이렇게 못해드렸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바꿨다. 이전에 아버지와 꼭 닮은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타고 미용실에 왔지만 돌려보내야만 했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당시 코로나로 모든 직원을 정리하고 홀로 미용실을 운영하며 전면 예약제로 바꾼 바람에 그는 할아버지의 머리를 다듬어 줄 수 없었다. 이씨는 “멀리서 찾아오신 분이었는데 예약 손님이 15분 단위로 있어서 (미용을) 해드릴 수가 없어 너무 안타까웠다”며 “이런 취약 계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미용 봉사를 마음먹게 됐다. 모르는 사람에게 베풀다 보면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이씨는 주민센터에 찾아가 취약계층에게 쿠폰을 발급해 무료 미용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봉사를 하면서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다”며 “봉사 첫날 오신 한 할아버지는 (무료 미용을 받은 후) 주머니에서 생밤을 5개 꺼내 주시더라. ‘줄 게 이것밖에 없다’며 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다음날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서 다시 오시더니 가방에서 밤을 세 봉지를 꺼내주셨다. (감동받아서) 그때 눈물이 났다”며 웃어 보였다.
모스부호를 사용할 줄 알아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할머니도 무료 미용을 받으러 왔다고 한다. 이씨는 “어르신들이 오시면 미용실에 평소 틀던 노래 말고 트로트를 틀어 놓는데 마침 보릿고개라는 노래가 나왔다. 그 노래를 듣고 할머니가 옛날 생각이 나신다며 우셨다”고 말했다. 집에서 장녀인 할머니는 어렸을 때 집에 쌀이 없어지는 속도를 보며 본인은 굶었다고 한다. 이씨는 “(할머니가) 지금은 살기 좋은 세상이 왔지만 나이가 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하시더라. 착한 일도 많이 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이 하고 살라고 하셨다”며 “정말 기억에 남는 손님”이라고 했다.

이씨는 무료 미용 쿠폰 정비 등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봉사 지역 범위도 확대할 계획이다. 그는 “미용실 앞에 설치된 ‘무료 미용’ 배너만 보고 쿠폰이 없는 사람들도 우르르 와서 무료 미용을 받고 가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또 “주변 다른 동네의 미용 봉사가 필요하신 취약계층 분들도 행정구역에 관계없이 미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그는 조만간 향후 구청 등과 논의해 봉사 방식을 재정비할 예정이다.
이씨는 “잘 나가던 미용실 두 곳도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으로 정리하고, 벌려 놓았던 일도 코로나로 주춤하는 등 실패를 겪어봤다. 죽고 싶었고 외국으로 훌쩍 떠나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하면 더 나쁜 사람이다”라며 “그런 마음을 극복하려 오히려 도전을 선택해봤다. 나 같은 사람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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