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비용, 생밤 5개”…힙한 왕십리 미용실, 어르신들 줄서는 이유

정채빈 기자 2022. 12. 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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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25년차, 사근동 미용사 이재광씨
취약계층에 무료 미용 봉사하게 된 사연
매월 넷째주 월요일 자신의 미용실에서 취약계층에게 '무료 미용 봉사'를 하고 있는 원장 이재광(44)씨/정채빈 기자

“나처럼 없는 사람도 착한 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형형색색 반짝이는 알전구에 흰 페인트로 갈겨쓴 문구들이 가득한 인테리어. 이 개성 넘치는 미용실에 매월 넷째주 월요일이면 어르신들이 줄을 잇는다. 바로 무료 미용을 받기 위해서다.

서울 성동구 사근동 사근고개에 위치한 미용실 '덤앤더머'./정채빈 기자

‘남성 커트 5000원’으로 동네에서 유명한 미용실 덤앤더머의 원장 이재광(44)씨는 지난 9월부터 취약계층을 위한 무료 미용 봉사를 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과 일요일은 해당 미용실 휴무일이지만 그는 매달 휴무일 중 하루를 반납하고 취약계층 손님들에게 ‘공짜 헤어 커트’를 하고 있다.

9월, 처음 무료 미용을 시작했을 때 온 손님들은 단 7명이었다고 한다. 그다음 달에는 10명이 넘게 찾아오더니 이후 입소문이 나면서 지난달에는 30명이 넘는 손님들이 머리를 다듬고 갔다. 이씨는 “정신없이 머리카락만 쳐다보고 일했다”면서도 “그렇게 일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개성있는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덤앤더머 미용실./정채빈 기자

올해로 미용 경력 25년차인 이씨가 이처럼 봉사를 하게 된 데에는 깊은 사연이 있다. 올해 초 한 아주머니가 미용실에 찾아와 “집에 아예 움직일 수 없는 아저씨가 있다”며 “집에 와서 머리를 잘라 달라”고 이씨에게 부탁했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간절히 부탁하는 모습에 결국 이씨는 미용 약속을 잡았다.

이씨는 “하필 당일이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아주머니 집에) 가보니 정말 거동이 안 되는 분이 계셨다”며 “바닥에 누워계셨는데 그대로 엎드려서 머리를 잘라드렸다”고 말했다. 미용사로서 생전 아버지 머리도 제대로 감겨드린 적이 없던 그는 갑자기 미안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었는데 몇 년전 돌아가셨다. 그는 “안 좋은 일이 겹치기도 했고, ‘우리 아빠도 이렇게 못해드렸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바꿨다. 이전에 아버지와 꼭 닮은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타고 미용실에 왔지만 돌려보내야만 했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당시 코로나로 모든 직원을 정리하고 홀로 미용실을 운영하며 전면 예약제로 바꾼 바람에 그는 할아버지의 머리를 다듬어 줄 수 없었다. 이씨는 “멀리서 찾아오신 분이었는데 예약 손님이 15분 단위로 있어서 (미용을) 해드릴 수가 없어 너무 안타까웠다”며 “이런 취약 계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미용 봉사를 마음먹게 됐다. 모르는 사람에게 베풀다 보면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재광(44)씨가 손님의 머리를 다듬고 있다./정채빈 기자

이후 이씨는 주민센터에 찾아가 취약계층에게 쿠폰을 발급해 무료 미용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봉사를 하면서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다”며 “봉사 첫날 오신 한 할아버지는 (무료 미용을 받은 후) 주머니에서 생밤을 5개 꺼내 주시더라. ‘줄 게 이것밖에 없다’며 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다음날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서 다시 오시더니 가방에서 밤을 세 봉지를 꺼내주셨다. (감동받아서) 그때 눈물이 났다”며 웃어 보였다.

모스부호를 사용할 줄 알아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할머니도 무료 미용을 받으러 왔다고 한다. 이씨는 “어르신들이 오시면 미용실에 평소 틀던 노래 말고 트로트를 틀어 놓는데 마침 보릿고개라는 노래가 나왔다. 그 노래를 듣고 할머니가 옛날 생각이 나신다며 우셨다”고 말했다. 집에서 장녀인 할머니는 어렸을 때 집에 쌀이 없어지는 속도를 보며 본인은 굶었다고 한다. 이씨는 “(할머니가) 지금은 살기 좋은 세상이 왔지만 나이가 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하시더라. 착한 일도 많이 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이 하고 살라고 하셨다”며 “정말 기억에 남는 손님”이라고 했다.

미용 봉사 대상자들에게 발급한 쿠폰이 카운터에 놓여 있다./정채빈 기자

이씨는 무료 미용 쿠폰 정비 등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봉사 지역 범위도 확대할 계획이다. 그는 “미용실 앞에 설치된 ‘무료 미용’ 배너만 보고 쿠폰이 없는 사람들도 우르르 와서 무료 미용을 받고 가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또 “주변 다른 동네의 미용 봉사가 필요하신 취약계층 분들도 행정구역에 관계없이 미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그는 조만간 향후 구청 등과 논의해 봉사 방식을 재정비할 예정이다.

이씨는 “잘 나가던 미용실 두 곳도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으로 정리하고, 벌려 놓았던 일도 코로나로 주춤하는 등 실패를 겪어봤다. 죽고 싶었고 외국으로 훌쩍 떠나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하면 더 나쁜 사람이다”라며 “그런 마음을 극복하려 오히려 도전을 선택해봤다. 나 같은 사람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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