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건축] 세 가지 얼굴의 도시 변천사, 뉴욕 '소호'

2025. 10. 1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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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형 남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지난 기고의 리틀 이탈리에 이어, 이번에는 발걸음을 뉴욕의 또 다른 얼굴 '소호(SoHo)'로 옮겨본다. South of Houston Street의 머릿글자를 딴 이름처럼, 소호는 언제나 뉴욕의 남쪽에서 새로운 변화를 주도해온 공간이다. 주철로 만들어진 캐스트 아이언(Cast Iron) 건물이 늘어선 거리에는 명품 부티크와 세련된 레스토랑, 갤러리가 어우러져 있다. 오늘날 화려한 쇼핑·문화 지구로 뉴욕의 아이코닉한 스타일로 상징되는 이곳은, 사실 19세기의 산업, 20세기의 예술, 그리고 21세기의 소비문화가 켜켜이 겹쳐진 도시 진화의 압축판이다.

소호의 풍경을 규정 짓는 캐스트 아이언 건축은 19세기 중반 등장해 뉴욕의 건축 문화를 혁신했다. 강한 주철은 정교한 장식의 대량생산과 대형 창호의 설치도 가능케 했다. 그 결과, 소호 거리에는 고전주의 장식의 기둥과 파사드가 줄지어 들어서며 세계 최대의 주철 건축 박물관이라 불리게 됐다. 대표적 건물인 하우아웃 빌딩은 세계 최초의 승객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혁신적 쇼핑공간이자 현대적 소비문화의 상징이었다. 특히 장식재였던 주철을 구조재로 확장한 이 실험적 구법은 훗날 강철 프레임 구조로 발전하며 20세기 뉴욕 마천루 시대의 문을 열었다. 흥미롭게도 이 건물은 영화 '첨밀밀'의 마지막 장면에도 등장한다. 가수 등려군의 부고가 전해지는 쇼윈도 앞에서 주인공 이교와 소군이 재회하는 순간, 유리창에 비친 그 파사드는 그들이 지나온 시간과 도시의 기억이 겹쳐지는 또 하나의 무대로 다가온다.

20세기 초·중반, 소호는 봉제공장과 인쇄소, 기계공장이 빽빽이 들어선 산업지대였다. 넓은 바닥면적, 높은 층고, 거대한 창과 견고한 구조는 제조업에 이상적이었으나 2차 대전 이후 섬유산업이 쇠퇴하며 대다수 공장이 문을 닫았다. 일부 건물은 창고나 인쇄소로 바뀌었고, 차량 정비소나 주차장을 위해 철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산업의 공백은 역설적으로 예술가들에게 기회가 됐다. 버려진 건물들은 작업과 생활을 겸하기에 이상적인 공간이었고, 자연스럽게 예술가들의 불법 점유가 확산됐다. 이 불법 거주는 오랫동안 묵인되다가 1971년 뉴욕시가 아티스트 로프트법을 제정하며 합법화 됐다. 이어 1973년 뉴욕시 랜드마크 보존위원회가 소호를 캐스트 아이언 역사지구로 지정하면서 버려진 산업지대는 창작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이 시기 화가 로버트 드니로 시니어가 소호에 거주했고, 그 영향을 받은 아들 드니로는 훗날 트라이베카를 거점으로 로어 맨해튼의 문화적 재생을 이끌었다.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과 그래피티를 회화로 끌어올린 장 미셸 바스키아 역시 소호를 세계 예술의 최전선으로 만들었다. 이 시절 소호의 풍경은 영화 '사랑과 영혼'(Ghost, 1990)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주인공 샘과 몰리의 집은 전형적인 소호의 로프트이다. 특히 새벽녘 몰리가 도자기를 빚는 명장면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한 시대 소호 예술가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러나 소호의 성공은 곧 또 다른 변화를 불러왔다. 1980년대 후반, 급등한 임대료는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갤러리를 밀어냈고 소호는 예술을 소비하는 거대한 상업지구로 변모했다. 그 결과 뉴욕의 예술 산업은 소호 북쪽의 첼시로, 다시 브루클린과 퀸즈로 밀려났다.

오늘날 소호는 쇼핑, 미식, 나이트라이프가 공존하는 도시적 무대다. 루이 비통, 샤넬, 프라다 같은 명품 부티크가 거리를 채우고, 프렌치 비스트로 발타자르와 도미니크 안셀 베이커리가 미식가들을 끌어 모은다. 주철 건물이 늘어선 거리들은 여전히 패션 화보와 광고의 배경으로 등장하며, 뉴욕 특유의 세련된 감각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소호 곳곳에는 여전히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산업의 현장에서 예술의 요람으로, 그리고 소비의 무대로 변화해온 이곳은 도시진화의 역사가 압축된, 살아 있는 도시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이우형 남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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