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에 헤딩’일까 ‘맨땅에 헤더’일까…해설자도 헷갈려 [아하 월드컵]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자, 코너킥∼, 헤딩∼! 오, 다행입니다. 골대에 맞았습니다."
24일(한국시각)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H조 1차전 전반 43분, 우루과이의 코너킥 상황에서 디에고 고딘(36·벨레스 사르스필드)이 머리로 공을 받자 지상파 3사 해설위원들은 일제히 "헤딩"을 외쳤다.
헤딩처럼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축구 용어에는 일본식 조어가 여전히 남아 있다.
'핸들링', '센터링' 등의 용어는 점점 자정되는 분위기지만 '헤딩'은 여전히 우세 단어로 남아 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하 월드컵][2022 카타르 월드컵]

“자, 코너킥∼, 헤딩∼! 오, 다행입니다. 골대에 맞았습니다.”
24일(한국시각)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H조 1차전 전반 43분, 우루과이의 코너킥 상황에서 디에고 고딘(36·벨레스 사르스필드)이 머리로 공을 받자 지상파 3사 해설위원들은 일제히 “헤딩”을 외쳤다. 하지만 이후 진행된 가나-포르투갈 경기에서 〈문화방송〉(MBC) 해설진은 ‘헤딩’ 대신 ‘헤더’라는 말을 줄곧 사용했다. 축구에서 머리를 사용해 공을 다루는 기술은 헤딩일까? 헤더일까?
대부분 ‘헤딩(heading)’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지만 영어권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일본에서 쓰던 말이 그대로 한국에 넘어왔다. 헤딩의 정확한 표현은 ‘헤더(header)’다.
헤딩처럼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축구 용어에는 일본식 조어가 여전히 남아 있다. 대다수는 단어에 동명사형(ing)이 붙는 식이다. ‘핸들링(handling)’이 대표적이다. 손 또는 팔을 공에 대는 경우 반칙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는데, ‘핸드볼(handball) 파울’이 정확하다. 공을 길게 띄워 연결하는 행위도 ‘센터링(centering)’이 아니라 ‘크로스(cross)’로 사용해야 한다. ‘핸들링’, ‘센터링’ 등의 용어는 점점 자정되는 분위기지만 ‘헤딩’은 여전히 우세 단어로 남아 있다. ‘맨땅에 헤딩’이라는 말이 익숙한 것처럼 말이다. ‘맨땅에 헤더’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축구 포지션과 관련된 잘못된 말도 꽤 있다. ‘사이드 어태커(side attacker)'와 ‘골게터(goal getter)'도 일본에서 주로 사용되는 단어다. 측면 공격수를 뜻하는 사이드 어태커는 포지션에 따라 ‘윙백(wingback)', ‘미드필더(midfielder)', ‘윙어(winger)'가 적합하다. 골게터는 단어를 조합해 만든 전형적인 조어로 골을 잘 넣는 선수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스트라이커(striker)' 또는 ‘포워드(forward)’가 일반적이다. ‘골인(goal-in)’을 ‘골(goal)’로 고쳤듯 일본식 조어를 바로잡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영어로 된 축구 용어를 우리말로 바꿔 표현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오히려 난해한 영어 표현이 축구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너킥을 구석차기, 프리킥을 자유차기, 스로인을 던지기 공격, 골키퍼를 수문장 등으로 바꿔도 자연스럽다.

김해정 기자 sea@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월드컵 보던 중국 누리꾼의 절규 “우리는 왜 못 이기는 것인가”
- ‘가난한 핵보유국’은 변하는데…‘과거의 북한’만 찾는 진보와 보수
- 10대 형제 인천 빌라서 숨진 채 발견…40대 부모는 뇌사 상태
- ‘슈룹’ 임화령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까닭
- 문소리, 이태원서 숨진 스태프 추모…“진상규명 되면 진짜 애도할게”
- 이란 골잡이 아즈문, 케이로스 감독 목 조른 이유는
- 김진표 의장, 저출생 해결책으로 “동성애 치유운동” 소개
- ‘신촌 모녀’ 숨진 원룸, 냉장고엔 케첩·고추냉이·물뿐…
- 한번만 때리는 상사는 없어요, 112에 신고하세요
- 여성 패널 입지 더 줄인 ‘알쓸인잡’의 익숙한 불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