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극 드라마 한편 때문에 미국인들이 크게 분노한 사건

K-사극의 시초, 미국 보수 심장부 뒤흔들다…'태조 왕건'에 열광한 필라델피아

미국 동부의 문화적 자존심이자 보수적 색채가 짙은 도시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의 대하사극 '태조 왕건'이 현지인들을 사로잡았던 놀라운 사건이 재조명되고 있다. 영국의 BBC 등 쟁쟁한 글로벌 방송을 밀어내고 하루 종일 한국 사극을 방영하는가 하면, 미국 현지인들이 '궁예' 코스프레를 하고 모금 전화를 받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뉴욕, 워싱턴 일부 지역을 커버하던 필라델피아의 공영 방송국 WYBE(채널 35)는 영국 BBC, 독일, 중국, 인도 등 세계 유력 방송사들의 프로그램을 주로 편성하던 곳이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한국 프로그램인 '태조 왕건'은 한국어 음성에 영어 자막을 입힌 형태로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10시에 정식 편성됐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당시 미국 방송가에서는 대규모 인원이 투입된 블록버스터급 대하사극이 드물었던 터라, 1000년 전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수천 명이 격돌하는 거대한 스케일의 전쟁 장면은 현지 고전 역사 마니아들과 마초 성향의 미국 남성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단순히 액션에만 열광한 것이 아니었다. 극 중 견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수달의 압도적인 충성심에 경탄하고, 왕건과 견훤을 둘러싼 인물들의 사랑과 질투, 암투에 현지 여성 시청자들까지 대거 유입되며 두터운 팬층을 형성했다. 어쩌다 방송이 한 번이라도 결방되는 날에는 "왜 드라마를 방영하지 않느냐"며 방송국에 항의 전화가 빗발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연이어 발생했다.

시청률이 고공행진을 이어가자 WYBE 방송국은 대담한 기획을 선보였다.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공영 방송의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른바 '태조 왕건 쇼'라는 특별 기부 모금 방송을 편성한 것이다.

방송국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 기존에 편성되어 있던 영국 BBC 등의 정규 방송을 모두 취소하고 '태조 왕건'의 하이라이트인 '금성 대회전' 편을 집중 방영했다. 드라마를 30분간 상영한 뒤 15분간 토크쇼를 진행하며 시청자들의 기부를 독려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전설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배우 김영철이 연기한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 '궁예'에 완벽히 매료된 현지 방송 관계자와 자원봉사자들이 안대를 착용하고 '궁예 코스프레'를 한 채 전화를 응대하며 모금 행사를 진행한 것이다. 현지 진행자들은 북한 핵문제 등으로 경직되어 있던 정세를 언급하며 "정치적 이슈를 떠나 이런 위대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한국 문화의 저력과 깊은 역사에 갈채를 보내야 한다"고 극찬했다.

현지 반응도 뜨거웠다. 방송작가인 카렌 해리슨은 인터뷰를 통해 "영국이 자랑하는 BBC의 그 어떤 드라마보다 태조 왕건이 훨씬 훌륭하고 압도적이다"라고 평가했으며, 일부 주부들은 드라마를 계기로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음식과 문화를 독학하기 시작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이례적인 성공의 뒤편에는 숨은 주역이 있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현지 매체인 '중앙방송'의 김덕수 대표가 일체의 방송료와 프로그램 공급 비용을 전액 부담하는 조건으로 공영 방송국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김 대표는 당시 인터뷰에서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작품의 완성도가 워낙 뛰어났기에 외국인들도 충분히 매료될 것이라 확신했다"고 전했다.

유튜브 등 뉴미디어를 통해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는 이 사건은 문화적 장벽이 높았던 2000년대 초반, 별도의 각색 없이 전통 콘텐츠의 순수한 완성도만으로 미국 주류 사회와 보수층의 마음을 훔친 K-콘텐츠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이색적인 심리적 영토 확장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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