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이 지독했던 '1차전 잔혹사'를 17년 만에 완벽하게 끊어냈다. 류지현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5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조별리그 C조 1차전에서 문보경의 만루 홈런과 셰이 위트컴의 연타석 홈런을 앞세워 체코에 11-4 대승을 거뒀다. 2009년 대만전 승리 이후 무려 4개 대회 만에 거둔 귀중한 첫 승이다.

1회부터 터진 전율의 그랜드슬램, '문보물' 문보경의 포효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도쿄돔은 거대한 환호성에 휩싸였다. 1회말, 김도영의 볼넷과 이정후의 안타, 안현민의 볼넷으로 만들어진 1사 만루의 기회. 타석에 들어선 문보경은 상대 선발 다니엘 패디삭의 밋밋한 슬라이더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방망이를 돌렸다.

타구는 시속 178.2km(약 110.7마일)라는 가공할 속도로 뻗어 나가 도쿄돔 중앙 담장을 훌쩍 넘겼다. 비거리 130.5m의 대형 그랜드슬램이었다. 문보경은 1루를 돌며 비행기 세리머니를 선보였고, 이는 이번 대회를 위해 압박감을 견뎌온 선수단의 사기를 단숨에 끌어올리는 시원한 포효였다.
단 한 번의 스윙으로 도쿄돔의 공기를 바꾼 문보경의 '미사일' 홈런이었다.
'한국계 거포' 위트컴, 연타석 홈런으로 이름값 증명

이번 대표팀의 '비밀병기' 셰이 위트컴은 자신이 왜 태극마크를 달 자격이 있는지를 실력으로 웅변했다. 팀이 5-0으로 앞선 3회말, 위트컴은 좌중간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으로 자신의 대회 1호 포를 신고했다. MLB.com 측정 기준 타구 속도 171km/h에 달하는 강한 타구였다.

진짜 위력은 위기 뒤에 터졌다. 5회초 정우주가 3실점 하며 6-3으로 쫓기던 5회말, 위트컴은 다시 한번 괴력을 발휘했다. 1사 1루 상황에서 그는 상대 구원 미할 코발라의 공을 받아쳐 다시 한번 좌측 담장을 넘기는 투런 아치를 그렸다. 연타석 홈런이 터지는 순간, 체코의 추격 의지는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추격의 불씨를 끄고 분위기를 다시 가져온 위트컴의 '클래스'가 빛났다.
41세 노경은의 헌신, 임창용의 기록을 넘어서다
이날 마운드에서 가장 가슴 뭉클했던 장면은 '베테랑' 노경은의 등판이었다. 만 41세 11개월 26일의 나이로 마운드에 오른 노경은은 2017년 임창용(40세 9개월 2일)을 넘어 WBC 역대 한국 대표팀 최고령 출전 신기록을 작성했다.

노경은은 4회초 안타와 도루를 허용하며 1사 1, 3루의 실점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답게 흔들리지 않았다. 노련하게 타자의 타이밍을 뺏으며 삼진과 뜬공으로 이닝을 매조지었다. 기록지에 남은 1이닝 무실점이라는 숫자는 짧았지만, 그가 보여준 투혼은 마운드 옆 후배들에게 그 어떤 강연보다 큰 가르침을 주기에 충분했다.
소형준의 뚝심과 막내 정우주의 값진 성장통

선발 투수 중책을 맡은 소형준은 3이닝 동안 4피안타 2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매 이닝 주자를 내보내며 다소 불안한 면도 있었으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병살타를 유도하며 실점 없이 마운드를 지켰다. 2회 2사 만루 위기에서 상대 타자를 뜬공으로 처리하고 내려올 때의 표정에는 선발 투수로서의 강한 책임감이 가득 묻어났다.

물론 아쉬운 순간도 있었다. 5회 등판한 '막내' 정우주는 MLB 경력을 가진 테린 바브라에게 우월 3점 홈런을 허용하며 국제 대회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홈런을 맞은 뒤 입술을 꽉 깨문 정우주의 모습은 야구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지만, 이 또한 대한민국 야구의 미래를 짊어질 투수가 겪어야 할 소중한 성장통이었다. 그는 흔들림을 추스르고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17년 만의 1차전 승리, 화력으로 지워낸 '잔혹사'
대한민국 타선은 8회말 저마이 존스의 쐐기 솔로포까지 더하며 총 11점을 뽑아냈다. 문보경은 1회 만루포를 포함해 7회 적시타까지 더하며 5타점 경기를 완성했고, 타선 전체가 고른 집중력을 발휘했다. 연습경기 때부터 제기됐던 마운드의 불안함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화끈한 방망이가 모든 우려를 잠재웠다.

이번 승리로 한국은 8강 진출을 향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2013년, 2017년, 2023년 세 대회 연속으로 1차전 패배의 쓴잔을 마셨던 한국 야구는 이제 다시 한번 비상을 꿈꿀 수 있게 됐다. 현재 공개된 자료만으로는 이후 경기에서의 투수진 보직 변경이나 컨디션 변화를 단정하기 어렵지만, 타격의 기세만큼은 최절정에 올라 있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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