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의 인수합병(M&A) 시계가 8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근 전장·오디오 자회사 하만를 통해 미국 오디오 브랜드를 품에 넣은 데 이어 유럽 최대 규모의 냉난방공조(HVAC) 기업까지 잇달아 인수에 나서면서 미래 먹거리 확보를 위한 신사업의 방향성이 정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일부에서는 연초 이재용 회장이 '삼성 부당합병 및 회계부정' 혐의 재판 2심에서도 무죄를 받으며 사실상 사법 리스크가 해소된 만큼 향후 핵심 사업인 반도체 등에서도 보다 적극적인 M&A 움직임이 나올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8년만에 조단위 M&A…AI 시대 맞춤 밸류체인 구축
14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이날 영국계 사모펀드 트라이튼이 보유한 유럽 최대 공조기기 업체인 독일 플랙트의 지분 100%를 15억유로(약 2조3763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번 인수는 삼성전자가 지난 2017년 80억달러(약 9조3400억원)를 들여 하만을 인수한 이후 8년 만에 이뤄진 조(兆)단위 대형 M&A다.
1918년 설립된 플랙트는 65개국의 가정, 사무실, 학교, 병원과 첨단 시설에 중앙 공조 제품 및 솔루션을 공급해 7억유로(약 1조113억원) 이상의 연 매출을 내는 글로벌 톱 티어 업체다.
특히 최근 인공지능(AI) 열풍 속 데이터센터 시장 확대와 맞물리며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발열량로 인해 냉각 솔루션이 필수적이다.
플랙트의 데이터센터 솔루션은 에너지 절감을 통해 저탄소·친환경 목표 달성이 중요한 고객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또한 냉각액을 순환시켜 서버를 냉각하는 액체냉각 방식인 CDU에서도 업계 최고 수준의 냉각용량, 냉각효율 등 제품군을 확보하고 있다.

이번 인수에 대해 삼성전자는 "생성형 AI·로봇·자율주행·확장현실(XR) 등의 확산에 따라 데이터센터 수요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플랙트를 전격 인수하게 됐다"며 "플랙트는 데이터센터 외에도 글로벌 톱 제약사, 헬스케어, 식음료, 플랜트 등의 폭넓은 대형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 조사 업체에 따르면 글로벌 중앙 공조 시장은 지난해 610억달러(약 86조원)에서 오는 2030년 990억달러(약 140조원)로 연평균 8%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데이터센터 부문은 2030년까지 441억달러(약 62조4400억원) 규모로 연평균 18% 성장이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그간 시스템에어컨 중심의 개별공조(덕트리스) 제품으로 HVAC 사업을 추진해왔다. 지난해 5월에는 미국 레녹스와 합작법인을 설립하며 북미 시장 공략에도 나섰다.
이번 인수를 계기로 삼성전자는 자사 빌딩 통합 제어솔루션(b.IoT)과 플랙트의 공조 제어솔루션을 결합한 서비스와 유지보수 분야에도 사업 확대를 기대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구글 MS 등 빅테크 기업들이 동남아, 중동 등 글로벌 사우스로 대규모 데이터센터 건설에 나선 만큼 이들 지역에서도 신규 사업의 기회를 빠르게 포착한다는 목표다.
또한 삼성전자는 AI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기업용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 AI PC용 메모리인 GDDR7 등을 생산하고 있는 만큼 향후 사업간 시너지 역시 기대된다.
노태문 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DX)부문장 직무대행 사장은 "플랙트를 인수하며 글로벌 종합공조 업체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며 "앞으로 고성장이 예상되는 이 사업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지속 육성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미래 먹거리 확보 '박차'…로봇·반도체 등 '추가 빅딜' 나오나
삼성전자가 일주일 사이 미국 마시모의 오디오 사업부와 플랙트를 잇달아 인수하면서 연초 '독한 삼성', '사즉생'을 강조한 이재용 회장의 넥스트 스탭에도 관심이 모이고 있다. 특히 주력 사업인 반도체를 비롯해 로봇, AI 분야에서 추가 빅딜이 나올지 주목된다.
먼저 로봇의 경우 삼성전자가 작년 말 레인보우로보틱스를 자회사로 편입하고, 창업멤버이자 카이스트 명예교수인 오준호 교수를 미래로봇추진단장에 선임한 만큼 향후 기술 확보를 위한 공격적인 연구와 투자가 뒤따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미래로봇추진단은 최근 휴머노이드 기술 개발을 위해 △보행전신제어 △조작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RFM) 등 분야에서 경력 사원을 모집하며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앞서 박순철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달 30일 1분기 실적발표 후 진행된 콘퍼런스콜에서 "로봇과 AI를 포함한 다양한 신사업 추진으로 새로운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며 "특히 봇에서는 하드웨어(HW)뿐 아니라 소프트웨어(SW)에 이르기까지 자체 개발과 외부 파트너 협력을 강화하고 있고 기술 역량을 지속적으로 고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주력 사업인 반도체에서도 M&A가 나올지 주목된다.그간 삼성전자는 영국 반도체 설계 기업 ARM과 차량용 반도체 기업인 인피니언, NXP 등의 인수를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앞서 이재용 회장은 지난 2019년 오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글로벌 1위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당시 △모바일AP·이미지센서 경쟁력 강화 △차량용 반도체 개발 확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선두 업체 추격 등을 핵심 전략으로 밝혔다.
자금은 충분하다는 평가다. 실제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단기금융상품을 포함한 현금성 자산 약 113조원을 보유하고 있다. 차입금을 제외한 순현금으로 보면 93조원 수준이다. 다만 일부에선 대부분의 자금이 해외법인에 묶여 있어 자금 확보 절차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그간 대표이사 직속으로 미래사업기획단을 신설하고 현금보유고를 탄탄하게 만든 점을 고려하면 M&A 추진 의지가 강한 것으로 해석된다"며 "특히 지난해 대형 M&A 키맨으로 꼽히는 안중현 사장이 2022년 삼성글로벌리서치로 자리를 옮긴 뒤 2년 만에 경영지원실로 다시 이동한 만큼 로봇, 전장 등 성장동력이 될 수 있는 분야에서 추가 인수나 투자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권용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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