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종 학생들은 알까, 여기서 사람 고문했다는 걸
(예전 기사 가져옴)
3월초이기는 하지만 아직 날씨는 쌀쌀했다. 신이문역으로 찾아가는 길이 춥고 떨리는 것은 쌀쌀한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문동은 아직도 기억 속에서 떨칠 수 없는 공포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몇 년 전부터 이사영을 괴롭혀온 허리 통증이 오늘따라 한층 심해졌다. 그나마 남양주에서 살다가 서울 쪽으로 이사를 한 뒤에는 아픈 허리를 이끌고 다니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떨린다. 신이문역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방향으로 가는 길은 길고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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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쳐다도 보기 싫은 곳이었지. 바라보기도 싫은 장소잖아. 처음에는 망설이기도 했고 가고 싶지도 않았어. 근데 이제는 그냥 그래. 내가 이곳에 있었지 하는 그런 마음이 이전보다는 평범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개강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교문 앞 거리에는 학생들과 근처 의릉을 찾은 시민들이 제법 많았다. 꽃샘추위라고는 해도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없던 날이어서 의릉 앞에는 많은 사람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또는 수업시간 때문인지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보며 이사영은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이 알까... 여기서 사람을 고문 했다는 걸"
"사실 바깥 모습은 전혀 몰라"
4.19 혁명으로 되찾은 민주화는 박정희 주도의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독재의 긴 시간으로 빠져들었다. 독재와 통제 수단의 필요에 의해 창설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는 의릉터 전역과 근방 토지 등 13만 평의 부지를 매입해 청사로 사용했다.
중정은 조선의 20대 왕 경종과 왕비 선의왕후의 능인 의릉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역사의 공간을 권력기관의 전유 공간으로 바꿨다. 이후 전두환의 쿠데타로 정권이 바뀐 뒤 중정은 안기부로 이름을 바꿨다가 1995년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새 청사를 지어 옮긴 뒤 1999년 국가정보원으로 개명했다.
중정 이문동 청사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미술원으로 바뀌었다.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에 의해 훼손된 능이 본래의 모습을 찾은 것도 그 이후였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한예종 건물 중 중정 시절 지어졌던 건물은 몇 채 남지 않았다. 그 모습도 과거의 것과 많이 달라졌다. 내부 시설 역시 많이 바뀐 듯했다. 예전과 많이 달라진 건물을 둘러보던 이사영은 중정 시절 본청으로 쓰인 오래된 건물 앞에 서서 45년 전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사실 바깥 모습은 전혀 몰라. 집에서부터 천을 뒤집어 쓰고 왔고, 와서도 밖을 못 보게 했으니까. 건물 안쪽만 봤지, 밖은 못 봤어. 그러니까 이문동 중정으로 끌려간 걸 알아도 정확히 내가 어디서 고문을 받은 건지 모르겠더라고. 여기서 한참 고문 받고 남산으로 갈 때도 아무것도 못 보고 갔네."
함께 간 일행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과거의 흔적이 있는지 찾아보려 했다. 경비실 책임자에게 건물 구경을 좀 할 수 있겠느냐고 양해를 구하자 책임자는 '한 번 쓱 돌아보시고 나오는 거야 괜찮다'고 했다.
건물 내부는 여느 대학 건물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건물 안쪽이 뚫려 있고 내부에 정원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그와 같은 건물이 유사시 폭격을 맞을 경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1층을 거닐던 중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오래 전부터 있던 1층과 지하실을 가리키는 표지판과 상대적으로 근래에 만들어진 듯한 1/B1 표시판이 같이 붙어 있었다. 그렇게 내려온 지하층은 춥고 차가웠다. 쭉 늘어진 강의실 겸 작업 공간에서 왠지 모를 서늘함이 느껴졌다. 건물 자체가 커서 그런지 공간 하나하나의 규모가 제법 큰 편이었다.
"그래도 호텔 같은 데서 조사를 받았구만 그래"
▲ 지하실을 가리키는 과거와 현재의 표지판
"우리가 지난 번에 남영동에 갔을 때는 고문실이 조그마했잖아요. 근데 이문동 중정에서 내가 있던 방은 훨씬 컸거든. 남영동의 두 배 정도는 됐던 것 같아. 이렇게 보니까 그 때 공간이 컸다는 생각이 다시 드네."
함께 있던 김순자는 "다른 의도로 쓰인다니 좋긴 한데, 그 현장 모습이 없어져서 아쉽네"라며 과거의 아픔과 기억은 그대로인데 공간은 사라져버린 현실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적어도 이 공간을 쓰는 학생들이 그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최양준은 이곳에서 고생했을 이사영에게 짓궂은 농담으로 마음을 전한다.
"아니, 그래도 호텔 같은 데서 조사를 받았구만 그래. 나는 부산 보안대 지하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여기보다 시설이 훨씬 안 좋아서 고생했어."
남영동 대공분실처럼 무언가 남아있지 않은 공간에서 탁본을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참가자들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남기려 했다. 특히 이사영은 수십일간 이 공간에 갇혀 고문을 받다가, 혹은 화장실을 가다가, 취조 중 치료를 받다가, 그 어떤 이유로든 1974년에 짚었을지 모를 벽에 다시 손을 대어본다.
그리고 과거 그 시간의 느낌을 질감으로 떠올리며 한장 한장 탁본으로 남겼다. 한 때 자신이 갇혀있었을 강의실 이름판을 탁본하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무죄 받았다 해도 가해자가 사과 안 하면 무슨 소용이야?"
▲ 우리는 이렇게 여기에 서 있다.
"재판받을 때 판사가 그러는거야. 허위자백을 했으면 재판 받을 때 사실대로 발언을 해야지 왜 안 했느냐고. 당시 상황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됐거든. 날 고문한 그 놈들(수사관)이 법정까지 다 와 있었어. 고문한 수사관들이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고. 그놈들 때문에 말을 마음대로 못해. 검찰 조사 받을 때도 검사가 '너 여기 와서 그렇게 부인하면 다시 중정으로 보낸다'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바른 말을 하겠어."
"이제야 다 지나간 일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 책임 있는 사람들이 꼭 사과를 했으면 좋겠어. 재심으로 무죄를 받았다고는 해도 당시 나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들이 사과하지 않으면 그게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거지."
아프고 힘든 기억이지만 용기 내어 함께 걸을수록 그 길이 익숙해지듯이, 지난 어두운 역사를 덮고 잊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이야기하고 타인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행동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우리가 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26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