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6월에 유학 떠납니다" 윤정희의 폭탄(?)선언[선데이서울로 본 50년전 오늘]
[스포츠서울] “저 6월에 유학 떠납니다.”
50년 전인 1973년 3월, 갓 서른살이 됐던 톱 탤런트 윤정희가 돌연 유학을 떠나겠다고 폭탄선언을 해 연예가를 떠들썩하게 했다. 윤정희가 누구인가. 당시 TBC TV(지금의 KBS 2TV)에서 방송 중이던 매일극 (요즘은 보통 ‘일일연속극’으로 부른다) ‘사모곡’의 여주인공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당대 톱스타였다.
당시 윤정희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드라마 출연료 이야기를 지난주 살짝 언급한 바 있다. 회당 출연료가 말단 공무원 월급 보다 많은 2만원이었고, 매일 극이었으니 한달이면 출연료만 40만원. 당시 말단 공무원 월급이 1만7300원이었으니, 한달 출연료면 그들의 2년치 월급을 벌어간 셈이다.
높은 몸값을 받는 윤정희가 부러워 다른 드라마의 주연으로 물망에 오른 여자 탤런트가 같은 대우를 요구하다 끝내 출연이 무산되기도 했다.
오매불망 캐스팅을 노리는 감독과 PD가 줄을 선 인기 절정의 배우가 공부하러 연예계를 떠나겠다니…. 폭탄 선언이나 다름 없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 것이 상식일진대 이를 거부하고 말이다.
당시 윤정희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추측해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유학을 발표하기 1년 전인 1972년 한 해 동안 윤정희 주연의 영화가 장장 27편이나 개봉했다. 그야말로 공장에서 찍어내듯 영화를 만들던 시대였다.
단아하면서도 매혹적인 미모의 윤정희는 데뷔 7년차로 인기며 연기력이 절정이었고, 선데이서울 지면에 단골로 등장했다. 이를 보면 팬들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고 있었는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선데이서울은 ‘사모곡’이 끝나는 6월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는 윤정희의 비보(?)를 ‘유학 가는 윤정희 제3의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윤정희는 인터뷰에서 “프랑스로 유학 결행은 영화, 연극 교수가 되기 위한 것으로 오래전부터 꿈이었고, 돌아와서 연기 생활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연기와 대학교수, 두 가지를 다 하겠다는 양수겸장의 욕심이었다.
사실 윤정희는 이미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고학력의 연기자였다. 그런데도 공부를 계속해서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것인데 이는 한때의 인기인으로 살기보다 평생 연기 공부와 함께 살기로 결심한 셈이었다.
석 달의 시간은 흘러 출연 중이던 드라마 ‘사모곡’은 6월 29일, 264부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유학길에 올랐을 것이다. 기사는 데뷔할 당시 고은아, 남정임, 문희 등 3인의 견고한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에 스스로 노력해 그 반열에 오른 성공한 연기자라고 윤정희를 칭찬했다.
실제 윤정희는 유학을 떠나 프랑스 파리 3대학교(소르본 누벨 대학교)에서 영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지만 소망했던 대학교수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곳에서 필생의 인연이 된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만나 부부로 평생을 해로했다.
미모의 여배우와 미청년 피아니스트의 만남 자체가 영화같은 스토리였고, 두 사람은 일생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았다. “아흔 살까지 배우를 하는 게 소원”이라던 그녀는 하지만 2010년 출연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詩)’를 끝낸 뒤 알츠하이머가 발병, 긴 세월 투병하다 지난 1월23일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지 꼭 50년만이었다.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 인생 2막을 열고 배우를 넘어 한 사람의 아내이자 엄마로 새로운 인생을 알차게 꾸려갔던 윤정희는 그렇게 영원한 은막의 전설이 됐다.
그녀는 1967년 1200대1의 경쟁을 뚫고 영화 ‘청춘극장’ 주인공으로 데뷔해 2010년 66세에 출연했던 작품 ‘시’까지 총 300편 내외의 작품을 남겼다. 그중 2018년 세상을 떠난 신성일과 공연한 작품이 99편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1973년 3월 18일 선데이서울의 당시 기사 제목은 왜 ‘유학 가는 윤정희 제3의 인생’이었을까. 유학이 제3의 인생이라면 영화 인생이 아닌 또 다른 인생이 있었다는 것일까.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궁금증이 더해진다.
선데이서울이 윤정희의 프랑스 유학 소식을 전한 날, 다른 지면에는 그녀의 제10회 청룡영화상(3월 6일 시상) 여우주연상 수상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수상 작품은 ‘효녀 심청’(1972·신상옥 감독)으로 그해 여우주연상 수상은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바로 한해 전인 1972년 제9회 청룡영화상에서 ‘석화촌’(정진우 감독)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데 이어 연거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기 때문. 흔하지 않은 연속 수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그녀의 위상과 존재감을 보여주는 일화다.
전성기였던 1972년에 ‘석화촌’, 1973년 ‘효녀 심청’으로 청룡영화상을 받은 데 이어 37년을 건너 뒤어 66세에 그녀는 또 한번 청룡영화상을 거머쥐었다. 바로 그녀의 마지막 영화가 된 ‘시’가 안긴 상이었다.
평생에 한 번 받기도 쉽지 않은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세 번이나 받은 3관왕 영화배우였다는 것만 보아도 그녀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스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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