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사기’보다 ‘조세사기’에 집중하라

이유진 기자 2024. 10. 26. 12:2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출판]‘슈퍼 리치’에 의문 제기하는 ‘부의 제한선’

30대 초반의 독일계 오스트리아인 마를레네 엥겔호른은 2022년 할머니에게서 상속받은 재산의 90%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 2500만유로, 한화로 360억원에 이르는 큰 금액이다. 그는 화학기업 바스프를 창업한 프리드히리 엥겔호른의 후손으로, 자신이 그 돈을 축적하는 데 기여한 바가 전혀 없기에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지금 나에게 과세하라’(Tax Me Now)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는 엥겔호른은 부자에게 자선이 아니라 무거운 상속세 부과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의 결심에 큰 영향을 준 학자가 바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잉그리드 로베인스였다. 로베인스는 부의 불평등이 끼치는 사회적 해악을 분석하며 ‘제한주의’라는 단어를 처음 제안했다. 제한주의는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부에는 상한선이 있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부의 제한선’(김승진 옮김, 세종서적 펴냄)에서 저자 로베인스는 극단적 부가 불평등과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심화한다고 지적한다. 한국 또한 순자산 100만달러 이상인 백만장자 수가 세계 10위일 정도로 많으며, 상위 1%가 전체 부의 22%를 소유한다는 점에 눈길을 준다. 또 사회적 불평등을 제어하지 못하면 사회의 교육, 의료 시스템이 망가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부의 제한선을 만들자는 것은 공산주의 체제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사유재산에 제약이 있어야 사회의 안정성과 자율성과 번영이 유지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부자들은 세계 곳곳에 집을 두고 개인용 비행기로 화석연료를 사용하며 오염을 일으키는 산업에 투자해 부를 축적해왔다. 기후변화 민관 협력을 논의한 2022년 다보스 포럼엔 개인용 비행기가 500대 날아왔다. 이는 대략 2만6700대의 자동차가 파리에서 다보스까지 달릴 때와 비슷한 양의 탄소 배출 규모다. 지구를 위해서라도 이런 이동에는 더 많은 세금 부과가 필요하다. 독재자, ‘도둑정치가’들은 정보와 수입을 독점한다. 부자가 되려고 정치 권력을 추구하고, 권력을 잡아서 부를 유지하며 다시 권력을 장악하는 악순환을 일으킨다. 언론을 파괴하고, 공포정치를 실시한다.

저자는 사회가 ‘복지 사기’ 적발에 사회적 열정을 쏟느니 전문가를 총동원한 ‘조세 사기’를 밝혀내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부자의 재산 상당 부분은 추적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의 불평등이 공식적 통계보다 훨씬 클지 모른다고 덧붙인다. 부자들의 조세포탈 또는 회피는 사회의 규범과 규칙을 망가뜨릴 수 있는 ‘사회 계약’의 핵심적 문제다. 저자는 “극도로 많은 부는 민주주의를 잠식한다”고 말한다.

가장 시급하고 필요한 일은 세대 간 부의 전승을 막는 일이다. 미국에서 부자들의 재산세를 잘 걷으면 모든 미국 아이에게 18살까지 매달 876만원씩 지원할 수 있다. 강압적으로 부를 제한하자는 것이 아니라 상속과 증여에 제한을 두고 그것이 넘을 때 조세수입을 사회로 귀속시키자는 주장이다.

‘규제의 이상주의’임을 저자 스스로도 모르지 않지만 이 아이디어는 사회의 지향점으로 중요하다. ‘트리클다운 경제학’이 틀렸다는 실증적 근거는 적지 않다. 재산은 개인의 노력, 능력의 산물이지만 사회적인 계약과 역사적 우연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누구도 ‘슈퍼 리치’가 될 자격은 없다는 얘기다. 경제학 전문으로 실력과 안목을 두루 겸비했다고 인정받아 많은 이들이 ‘믿고 보는’ 김승진 번역가가 옮겼다. 416쪽, 2만2천원.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실학, 우리 안의 오랜 근대

이경구 지음, 푸른역사 펴냄, 2만7900원

실학의 어원, 의미상 특징과 정의, 실학의 역사, 한국 사회에서 실학이 가진 영향력을 검토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실학자가 아니라 실학이라는 용어와 개념, 이를 언급한 사람들이다. 저자 이경구는 독재 이데올로기의 군불이 되었던 장면까지 실학의 역사로 포함해 ‘실학의 시대화’를 시도한다. 실학의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가늠자가 될 만하다.

다시 쓰는 수학의 역사

케이트 기타가와·티모시 레벨 지음, 이충호 옮김, 서해문집 펴냄, 2만2천원

14세기 인도에는 수많은 수학자가 있었고 그 가운데 미적분을 개척한 천재 마다바가 있었다. 뉴턴보다 300년 앞섰다. 1850년 모스크바 태생 소피야 코발렙스카야는 세계 최초의 여성 수학 교수가 됐다. 그는 비범한 수학자였지만 걸핏하면 팜파탈로 묘사되었다. 인종·젠더 편견, 서구 중심을 벗어나 세계를 아우른 수학의 아름다운 역사.

연기와 재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2만8천원

‘대혼란의 시대’ ‘육두구의 저주’로 잘 알려진 인류학자 아미타브 고시의 책. 아편의 생산과 유통이 어떻게 인류의 근현대사를 만들어왔는지, 아편을 둘러싼 서구 열강의 탐욕은 어땠는지 밝힌다. 식민지 개척자들이 어떻게 역사를 재구성하고 인식을 조작했는지 살피고 아편이라는 비인간 존재가 지닌 행위 주체성과 지능에도 눈길을 준다.

어두운 생태학

티머시 모턴 지음, 안호성 옮김, 갈무리 펴냄, 2만5천원

철학자, 영문학자, 생태이론가 티머시 모턴이 2014년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진행한 웰렉 강의를 엮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브뤼노 라투르, 도나 해러웨이 등 석학들이 진행한 강의였다. 생태적 위기에 대한 논리적 토대를 탐구하면서 비극적 멜랑콜리, 희극적 공존 감각을 설명한다. 우리를 가로지르는 우울증 내부에서 놀이와 즐거움을 찾자고 말한다.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