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분마다 폐업, 무너지는 독일 제조업
독일 제조업의 허리로 불리는 미텔슈탄트가 흔들리며 한국 기업의 독일 쇼핑이 본격화하고 있다. 미텔슈탄트가 관세 전쟁과 인공지능 확산 등 시대의 변화에 흔들리는 틈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23분마다 기업 하나가 문을 닫고 있으며, 기업 파산이 3년 새 56% 급증해 실업자가 294만 명에 달한다. 독일 제조업 경쟁력의 핵심은 대기업보다 수천 개의 중소 전문기업에 있었다. 자동차와 산업 설비 분야에서 세계적 브랜드로 알려진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그리고 산업 자동화와 전력 장비를 이끄는 지멘스 뒤에는 특정 부품 하나로 세계 시장 점유율 60~70%를 차지하는 수많은 중견·중소기업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가족 경영과 장인 정신을 기반으로 수십 년에서 100년 이상 단일 기술에 집중하며 글로벌 공급망의 필수 기업으로 성장했고, 독일이 제조업 강국으로 유지되는 구조적 토대를 형성해 왔다.

DN솔루션즈, 130년 전통 헬러 인수
국내 최대 공작기계 업체 DN솔루션즈는 2026년 1월 말 독일 공작기계 업체 헬러 인수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1894년 독일 뉘르팅겐의 장인 공방에서 시작된 헬러는 자동차, 항공우주, 방산 등 고난도 초정밀 공정에 특화된 독일의 대표적인 하이엔드 공작기계 업체로 꼽힌다. 헬러는 연매출이 8,000억 원대로 초고정밀 공작기계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지닌 업체다. 이번 인수 이후 세계 3위권인 DN솔루션즈의 연결 매출은 3조 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DN솔루션즈는 헬러의 고난도 초정밀 기술에 주목했으며, 1894년 설립된 헬러는 공작물을 돌려가며 깎는 머시닝센터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이다. 글로벌 완성차와 항공우주, 방위산업 기업들이 헬러의 주요 고객사다.

에너지비 폭등과 탈원전 후유증
최근 수년간 독일 제조 생태계는 급격한 압박에 직면했다. 탈원전 정책 이후 전력 요금이 크게 상승했고,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 축소로 에너지 비용이 폭등하며 철강, 화학, 기계 등 에너지 집약 산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독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전기요금은 킬로와트시당 평균 41.6센트로 EU 27개국 가운데 최고였고 EU 평균 28.5센트보다 46% 높았다. 독일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공장 문을 닫거나 주변국으로 생산 거점을 옮기며 탈독일에 나서고 있는 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비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독일산업연합의 2023년 조사에 따르면 독일 기업 가운데 59%가 해외로 생산 거점을 옮기려는 이유로 에너지 안보 및 비용을 꼽았다.

고령화 승계난과 AI 투자 부담
고령화로 인한 후계자 부재, 디지털 전환과 AI 투자 부담, 글로벌 경쟁 심화까지 겹치며 재무 구조가 흔들리는 기업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권준화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고령화에 따른 승계난과 탈원전·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부른 에너지비 급등으로 독일 내 제조업의 경쟁력이 구조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디지털·탈탄소 전환이 요구하는 투자 규모가 기존 미텔슈탄트의 내부 자본 역량을 넘어서면서 기업들이 매각과 외부 투자 유치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밝혔다. 독일 기업의 AI 투자 비중은 전체 기업의 70%에 불과하며, 중국의 추격과 AI 투자 실기가 겹치며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

매물로 쏟아지는 히든챔피언들
독일 기업들의 매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독일 자동화 설비 제조기업 만츠AG는 독일 내 전기차 산업 위축 여파로 지난해 파산해 테슬라에 인수됐다. 타이어 및 수리 용품 분야 히든챔피언으로 불리는 레마팁탑,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핵심 부품 공급사인 리겐트파인바우 등 미텔슈탄트가 매물로 나와 해외 자본과의 인수 협상이 진행 중이다. 과거에는 인수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견고했던 기술 명가들이 매각을 검토하거나 외부 자본을 찾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산업계 관계자는 예전엔 인수는 꿈도 못 꿨던 기업들이 매물로 쏟아지고 있다며 독일 현지에서도 중국으로의 매각에 대해선 우려하는 분위기가 커 한국 기업에게 기회가 열린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 기업에게 열린 역사적 기회
이 변화는 글로벌 인수합병 시장에서 새로운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독일 중소 제조기업들이 기업가치 하락과 함께 매물로 나오면서 아시아 기업들의 전략적 인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기술 내재화와 고부가가치 산업 전환을 추진 중인 한국 기업들에게는 단기간에 핵심 기술과 글로벌 고객망을 확보할 수 있는 통로로 평가된다. 한때 독일 산업 경쟁력의 상징이었던 히든챔피언들이 에너지 위기와 산업 구조 변화 속에서 새로운 주인을 찾는 현실은 유럽 제조 강국의 약화와 함께 글로벌 산업 지형이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중소기업 67만 개 이상이 승계난을 겪는 데다 전기료 부담 때문에 폐업하는 사례도 늘고 있어 독일 강소기업 위기를 남의 나라 얘기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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