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타 가주 레이싱 특집⑤] 분초 다투는 두 개의 심장, 토요타 레이싱 하이브리드

2006년, 토요타 하이브리드 레이스카의 역사가 막을 올렸다. 렉서스 GS 450h 레이스카를 만들어 홋카이도의 도카치 24시간 내구레이스에 출전했다. 20년이 흐른 지금, 토요타 레이싱 하이브리드는 르망 최상위 클래스에서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올해 르망 출전 40주년을 맞아 토요타 레이싱 하이브리드의 변천사와 GR010 하이브리드를 자세히 소개한다.

글 서동현 기자(dhseo1208@gmail.com)
사진 토요타자동차
1세대 프리우스
토요타와 하이브리드는 운명의 단짝이다. 1993년 초, “21세기를 대비할 자동차 본연의 모습을 고민해야 한다”는 도요다 에이지 명예회장의 생각이 역사를 바꿨다. 그해 가을 프로젝트 팀을 결성했다. 1L당 20㎞의 연비를 목표로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승용차 개발에 뛰어들었다. 전례 없는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연구진은 모든 경우의 수를 검토했다.

반년 동안 80여 가지 하이브리드 설계도를 검토했다. 개발 2년 만에 시제작차를 완성했지만 시동조차 걸리지 않았다. 1997년 10월, 시행착오 끝에 1세대 프리우스를 도쿄에서 언론에 처음 공개했다. 비슷한 시기 북미 제조사들이 선보인 친환경차는 전부 콘셉트카 단계였다. 그렇게 프리우스는 ‘세계 최초 하이브리드 양산차’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후 프리우스의 명성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올라갔다. 실제 연비도 좋았다. ‘친환경’ 키워드에 매력을 느낀 소비자와 셀럽들이 앞다퉈 샀다. 2023년 말 기준 누적 판매량은 약 590만 대. 같은 기간 전 세계에서 약 2,000만 대 팔린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30%를 차지했다. 21세기 ‘하이브리드의 대중화’에 기여한 차종을 고르라면 단연 프리우스다.

2005년 12월, 토요타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이용한 레이싱 프로그램을 처음 검토한다. 관련 데이터는 하나도 없었다. 프리우스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을 때처럼 밑바닥부터 쌓아올려야 했다. 경주차를 만들어도 문제였다. 하이브리드 레이스카가 참가할 수 있는 대회가 없었다. 토요타는 이미 보유한 기술들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레이싱 하이브리드’를 구상했다.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레이스카
토요타는 첫 번째 하이브리드 레이스카의 기초로 5세대 렉서스 GS 450h를 골랐다. V6 3.5L 가솔린 자연흡기 엔진과 후륜구동의 조합은 경주차의 밑바탕으로 제격이었다. 니켈-메탈 배터리의 부담을 덜고 충전과 방전 속도를 높이기 위해 ‘축전기(Capacitor)’도 추가로 달았다. 합산 최고출력은 345마력으로, 순정 출력을 애써 건드리지 않았다.

마침 일본 슈퍼 다이큐 시리즈의 ‘도카치 24시간 내구레이스’가 2006년 ‘P-1(Production-1)’ 클래스를 신설했다. 모터스포츠 내 환경 인식이 증가할 것을 예상해 만든 특별 카테고리였다. 이미 슈퍼 다이큐 출전을 위해 특별 승인까지 받아두었던 GS 450h는 즉시 이 대회에 참여했다. 결과는 완주 성공.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17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번엔 수프라를 선택했다. 일본 슈퍼 GT의 GT 500 클래스에 내보내던 레이스카였다. 토요타는 기존의 V8 4.5L 가솔린 자연흡기 엔진에 전기 모터 3개를 더했다. 하나는 트랜스액슬 앞, 나머지 두 개는 양쪽 앞바퀴에 달아 구동과 회생제동을 맡겼다. 배터리 팩은 축전기로 대체했다. ‘토요타 하이브리드 시스템-레이싱(THS-R)’ 시스템의 기원이다.

수프라 HV-R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완주는 물론 36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당당히 1위에 올랐다. 국제 레이스에서 하이브리드 레이스카가 종합 우승을 차지한 첫 사례였다. 또한, 연료 소비율이 10%, 브레이크 패드 마모도는 예상 수준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 이로써 일반 도로보다 가혹한 조건에서도 하이브리드의 이점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수프라 HV-R의 데뷔 이후 한동안 활약할 무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새로운 내구 레이스 시리즈인 ‘WEC(World Endurance Championship, 이후 WEC)’가 출범한다. 1년 동안 전 세계 8개 국가를 돌며 펼치는 큼직한 대회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레이스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긴 르망 24시간 내구 레이스도 여기에 속해있다.
WEC에서 기회를 포착한 토요타
TS030 하이브리드
토요타는 WEC 첫 시즌에 도전한다. 출전 클래스는 최상위 카테고리인 ‘LMP1(Le Mans Prototype 1)’. 레이싱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성능 검증할 최고의 무대였다. 토요타는 1980~1990년대 내구레이스에 출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토타입 레이스카 TS030 하이브리드를 완성했다. 1998년 마지막으로 르망에 참가한 TS020의 후속 개념이었다.

TS030 하이브리드는 V8 3.4L 가솔린 엔진과 전기 모터, 축전기로 뒷바퀴만 굴렸다. 당시 규정상 수프라 HV-R처럼 앞바퀴는 구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축전기의 전기 저장 용량을 늘렸다. 2013년엔 파워트레인 효율과 브레이크 정밀도를 개선하고, 공기역학 성능을 높였다. 덕분에 데뷔 첫해의 아쉬움을 딛고, 르망 2·4위라는 기록을 남긴다.
TS040 하이브리드
이제부터는 규정과의 싸움. 2014년 엔진 배기량 제한을 풀었다. 르망에선 서킷 한 바퀴 당 방출할 수 있는 에너지를 2·4·6·8MJ(메가줄)의 네 단계로 나눴다. 높은 단계를 고르면 차의 무게가 늘어난다. 신중한 선택이 필요했다. 6MJ를 고른 토요타는 엔진 배기량을 3.7L로 늘리고, 앞 차축에도 모터를 달았다. 시스템 최고출력은 무려 1,000마력으로 뛰었다.

TS040는 영국과 벨기에, 일본, 중국, 바레인까지 다섯 경기에서 우승하며 2014년 WEC의 LMP1 제조사 챔피언에 등극했다. 하지만 르망 우승을 놓쳤다. 유일한 설움이었다. 마지막 목표를 이루기 위해 TS040도 업그레이드에 들어갔다. 3만㎞에 이르는 프리시즌 테스트 주행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르망을 대비할 6,000㎞의 시뮬레이션도 마쳤다.
그런데 2015년 돌연 에너지 방출 규정을 개정했다. 그 결과 별도의 배터리 없던 TS040은 불리해졌다. 전기 에너지 순환시킬 축전지 홀로 부담 떠안는 동안, 리튬이온 배터리 얹은 포르쉐가 쭉쭉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구조적 약점은 성적에도 영향 미쳤다. 개막전과 최종전 3위가 최고 기록이었다. 제조사 순위는 포르쉐와 아우디에 이어 3위에 그쳤다.
고장과 규정 변경으로 수정 거듭해
2016년 대대적 수정을 거쳐 TS050 하이브리드가 태어났다. 최대 8MJ의 에너지 방출을 감당할 수 있는 경량·고출력 리튬이온 배터리로 축전지를 대체했다. 엔진은 경기 조건에 따라 밸런스를 빠르게 고치기 위해 V6 2.4L 가솔린 트윈터보로 바꿨다. 이후 개막전인 영국 실버스톤 서킷에서 2위로 포디움에 오르며 순조롭게 출발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르망의 벽은 높았다. 마지막 3분을 남기고 간발의 차로 우승을 놓친 그 경기가 TS050의 첫 시즌이었다. 수리할 틈조차 없는 타이밍에 일어난 엔진 고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명적이었다. 시즌 전체도 순조롭지 않았다. 유일한 우승은 홈그라운드인 후지 6시간 내구레이스. 포디움에 틈틈이 올랐음에도 LMP1 챔피언십 순위는 3위에 머물렀다.
2017년 TS050은 모노코크 섀시 뺀 모든 부분을 손봤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연료가 한정적인 탓에 엔진 열효율부터 높였다. 더 빠른 충·방전을 위해 전압은 높이되 저항은 낮췄다. 덕분에 고온에서 성능을 오래 유지하면서도 배터리 내구성은 올라갔다. 또한, 처음으로 레이스카 3대를 내보냈다. 우승을 향한 열망이 묻어나는 결정이었다.

이번에도 르망 우승은 실패했다. 모터 고장과 사고가 연달아 터지며 8번 레이스카만 완주했다. 우승 횟수가 더 많았지만 해당 시즌 합산 포인트는 포르쉐에게 밀렸다. 경기 시간이 긴 만큼 르망의 승점은 다른 경기보다 두 배 높은 까닭이다. 도요다 아키오 사장은 “빠른 차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르망에서 우승할 수 없다”라며 다음 시즌을 기약했다.

2018년의 숙제는 내연기관 레이스카 대비 불리한 규정. 내연기관은 연료 흐름을 초당 30.5g까지 허용했는데, 하이브리드는 초당 22.8g이었다. 연료 소모량으로 따지면 시간당 약 30㎏ 차이로 벌어진다. 엄격한 중량 제한으로 몸무게는 최대 45㎏ 더 무거웠다. 즉 냉각 시스템과 배터리 무게는 물론, 눈에 보이는 부품 대부분의 무게를 악착같이 줄여야 했다.
2021년 전승한 GR010 하이브리드
토요타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겨울에 걸쳐 진행한 WEC 2018-2019시즌에서, 3라운드를 뺀 모든 레이스 우승컵을 든다. 원투 피니시는 무려 여섯 번. 이 가운데 2라운드와 8라운드가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였다. 토요타는 르망 출전 33년 만에 짜릿한 우승에 성공했다. ‘일본인 드라이버의 르망 최초 우승’이라는 값진 결과도 얻어낸다.

TS050는 마지막 시즌을 위한 보강에 들어갔다. 배터리 전력을 레이스 막바지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셀과 전해액을 개선, 열화를 줄였다. 외부 디자인도 바꿔 불필요한 공기 저항을 줄이고 다운포스만 높였다. 덕분에 우승 여섯 번, 전 경기 더블 포디움이라는 성적과 함께 TS050는 은퇴한다. WEC 시즌 챔피언과 2020 르망 우승도 당연히 토요타 몫이었다.
2021년 WEC의 최상위 카테고리가 LMP1 클래스에서 LMH(Le Mans Hypercar)로 거듭났다. 여기에 맞춰 경주차도 바꿨다. V6 3.5L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은 뒷바퀴, 전기 모터는 앞바퀴를 굴렸다. 합산 최고출력은 952마력으로, 이전보다 살짝 낮췄다. 안전을 위해서다. 대신 출력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도록 배터리와 인버터, 전기 모터 효율을 높였다.

시즌 중 바꿀 수 없는 공기역학 부품은 모든 서킷의 특성을 감안해 신중하게 설계했다. 각 부품이 주행 스트레스를 충분히 견디도록 내구성도 키웠다. 레이스카 이름은 GR010 하이브리드. 가주 레이싱을 뜻하는 GR과 1992년 르망에 도전했던 TS010에서 가져온 숫자를 조합했다. 결과는 ‘전 경기 우승’. GR010 하이브리드의 시대가 드디어 막을 올렸다.
이듬해 휠과 타이어 사이즈를 바꿨다. 100% 재생 연료를 쓰기 위해 엔진도 소폭 수정했다. 또한, 참가 팀들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BoP(Balance of Power)’를 적용하면서 앞 차축 전기 모터를 시속 190㎞ 이상에서만 구동할 수 있었다. 때문에 최적의 성능 조율에 어려움 겪은 토요타는 1·2라운드에서 한 대씩 리타이어해 맞수보다 낮은 점수로 출발했다.
최적화로 ‘BoP’ 극복 꾀한 GR010
다행히 3라운드 르망에서부터 기세를 되찾았다. 이탈리아와 일본, 바레인에서도 순위를 바짝 끌어올리며 42포인트 차이로 챔피언 방어에 성공한다. 마냥 안주할 수는 없었다. 2023년부터 경쟁 팀들이 부쩍 늘었다. 페라리와 포르쉐, 캐딜락, 푸조 등 모터스포츠 ‘고인물’들이 토요타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렸다. GR010은 최적화로 ‘BoP’ 극복을 꾀했다.

가령 회생제동과 기계식 브레이크의 균형을 맞추는 등 드라이버가 차를 ‘쉽게’ 운전할 수 있도록 튜닝했다. 운전 편의성을 높여 실수를 최소화하고, 타이어가 받는 하중과 마모를 줄여 피트 스톱 횟수도 줄일 수 있도록 했다. 르망 테스트 주행 직전 통보받은 추가 ‘BoP’로 무게가 37㎏ 늘어 고전했지만, 결국 르망을 뺀 모든 라운드의 우승 트로피를 쓸어갔다.

2024년 GR010 수명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너무 잘 나가서 문제였다. 승자 독식을 고려한 규정의 견제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특히 한 번 투입한 레이스카는 5년 동안 주요 구조를 바꿀 수 없다. 왼쪽 주유구를 추가하거나 야간 레이스를 위해 헤드램프 조사각을 넓히는 정도만 가능했다. 그래서 올 시즌을 소화하는 GR010도 기계적 성능은 이전과 같다.
그 결과 2024년은 포르쉐와의 2포인트 차 접전 끝에 WEC 챔피언 자리를 유지한다. 14초 차이로 놓친 르망 우승은 아깝지만 체급은 지켰다. 진짜 어려움은 현재진행형이다. 6라운드 앞둔 지금, 토요타는 포디움 기록이 없다. 5라운드 치른 브라질에서 유독 고전했다. 그 결과 2018년 이후 굳건히 지켜 온 WEC 챔피언 연패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하지만 걱정보단 기대가 앞선다. 지난 7년간 세계 최정상 내구 레이스를 지배한 경험만큼 값진 자산도 없는 까닭이다. 게다가 내년부터 토요타도 레이스카 구조를 대폭 바꿀 수 있다. 풍성한 경쟁 팀 덕분에 동기부여도 충분하다. 흥행 상승세를 탄 내구 레이스 무대에서 ‘하이브리드 장인’ 토요타가 어떤 묘안으로 승리를 이어갈지 관심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