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펠리에의 밤은 길었다. 그리고 마지막 포인트에 손을 번쩍 들며 외친 사람은 주천희였다. 세계 22위가 세계 10위 하시모토 호노카를 상대로 1시간 17분을 버틴 끝에 4-3으로 뒤집었다. 스코어는 11-7, 8-11, 5-11, 11-9, 4-11, 11-3, 11-9. 숫자만 늘어놓아도 숨이 찬데, 내용을 떠올리면 더 선명하다. 공격을 먼저 걸어 잠그고, 수비에 걸리면 다시 한 박자 늦춰 길이를 바꾸고, 긴 랠리에서 끝까지 참고, 기회가 오면 악착같이 밀어붙였다. 창과 방패의 대결에서 마지막 칼끝을 내민 쪽이 바로 그녀였다.

경기는 애초에 쉽지 않았다. 하시모토는 요즘 여자 탁구에서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운 수비 전형이다. 길게 끌고 가며 각을 숨기고, 때로는 날카로운 역공으로 박자를 흔든다. 1게임을 11-7로 잡아 기세를 올린 주천희는 2·3게임을 8-11, 5-11로 연달아 내주며 밀렸다. 여기서 많은 선수가 급해진다. 그러나 주천희는 4게임 초반부터 길이를 낮추고 코스를 단순하게 정리했다. 한 포인트씩 당겨서 11-9. 다시 맞선 5게임은 4-11로 허무하게 빠졌지만, 그 역시 준비였다. 6게임에서 초반부터 톱스핀의 각을 세워 11-3으로 보답했고, 마지막 7게임 8-8 동점에서의 두 랠리는 이 경기의 압축본처럼 빛났다. 상대의 깊은 커트를 두 번 받아낸 뒤, 포핸드 라인을 끝까지 밀어 넣어 10-8 매치 포인트. 10-9에서 이어진 장기전에서는 짧고 낮은 리시브로 3구를 만들고 그대로 내려찍었다. 테이블을 타고 나가는 공을 보며 그녀는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그 장면만으로도 오늘의 서사가 설명된다.

사실 몽펠리에로 오기까지의 길도 만만치 않았다. 32강에서 지민형을 3-1로 꺾고 몸을 풀더니, 16강에서는 같은 팀 동료 김나영을 3-0으로 제압하며 8강에 올랐다. 그리고 하시모토와의 7게임 승부 끝에 준결승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불과 한 달 전 중국 스매시에서는 이토 미마와 쉬쉰야오를 잇달아 넘고 8강에 올랐다가 신유빈에게 막혀 멈췄다. 그 과정에서 복식 준우승까지 챙겼지만, 단식에서는 “마지막 한 고비”가 늘 아쉬웠다. 오늘 그 고비를 스스로 넘었다. 그것도 세계 10위, 수비의 교과서 같은 상대를 상대로.

무엇이 달라졌을까. 눈에 들어온 건 욕심의 방향이었다. 예전의 주천희는 랠리가 길어지면 마지막 한 박자에서 급하게 힘을 싣는 습관이 있었다. 오늘은 반대였다. 득점을 서두르지 않고, 역으로 하시모토의 역공 타이밍을 앞질렀다. 백핸드 푸시의 길이를 짧게 두 번 찍은 다음, 세 번째 공에서 포핸드로 각을 틀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서브를 숨겼다. 같은 자세에서 회전만 바꾸거나, 같은 회전에서 길이만 바꾸는 작고 성가신 변화들. 수비형을 흔드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 결국 통했다. 체력 관리도 훌륭했다. 6게임을 11-3으로 끊은 선택이 7게임 초반 발의 반응 속도로 돌아왔다. 큰 무기 하나로 찍어 누른 승리가 아니라, 작은 결정들의 합이 만든 승리였다.
이 승리가 더 반가운 이유는 시간대가 겹치는 다른 이름들 덕분이다. 앞서 신유빈이 세계 8위 천이를 4-2로 꺾고 4강을 확정해 한국 여자 탁구가 같은 대회에서 두 명을 동시에 준결승에 올렸다. 몽펠리에의 브래킷에 태극기가 두 개 박힌 장면, 그것만으로도 오랜 팬들에게는 가슴이 뛸 소식이다. 이제 주천희는 세계 5위 왕이디와 결승행을 다툰다. 수비형과의 체력전이 끝난 바로 다음 날, 상위권 공격형과의 속도전이 이어진다. 부담스러운 흐름이지만, 오늘의 내용이라면 해볼 만하다. 중요한 건 시작 5포인트다. 초반에 서브와 리시브에서 두세 번만 앞서가면, 왕이디의 직선 라인이 조심스러워지고, 이후에는 주천희의 코스 선택이 살아난다. 몽펠리에의 조명 아래서, 다시 한 번 길이를 낮추고 각을 분명히 하면 된다.

무대 밖 이야기들도 이 서사의 질감을 만든다. 2002년 산둥에서 태어나 2018년 삼성생명 유니폼을 입고 한국에 왔고, 2020년 귀화했다. 세계선수권은 아직 규정 탓에 나서지 못했지만, 내년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과 2028 LA 올림픽은 열린다. 그 시간을 향해, 그녀는 한국에서 성장했고, 한국의 이름으로 오늘 같은 밤을 만들었다. 이쯤 오면 “귀화 선수”라는 수식어는 선수 소개의 일부일 뿐이다. 코트에서 보여준 선택과 집중, 그리고 마지막 한 공에 실린 용기야말로 이 이름을 설명할 가장 정확한 언어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주천희는 “많은 관중 앞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이겨 기쁘다. 7게임에서는 더 욕심 있고 의지 있는 모습으로 이겨내려 했다”고 말했다. 과장 없는 문장이다. 그 ‘욕심’이 단지 강하게만 때리는 마음이 아니라, 이기기 위한 계산과 참음까지 포함하는 마음이라는 걸 우리는 오늘 봤다. 팬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바랄 게 있을까. 긴 랠리의 마지막에서, 우리 편 라켓 끝이 흔들리지 않는 장면. 스코어가 동점인 순간, 위험한 라인샷을 망설이지 않는 선택. 손에 땀을 쥐고 보다가, 마지막 공이 상대 테이블을 벗어나자마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는 장면. 이런 밤이 자주 오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더 값지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내일도 이 리듬을 가져갈 수 있느냐. 답은 오늘 이미 절반이 나왔다. 하시모토의 공을 1시간 17분 동안 버틴 다리, 듀스에서 세트를 두 번 내주고도 흔들리지 않은 눈, 그리고 7게임 8-8에서 라인을 찍은 손. 이런 디테일은 하루 사이에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결승 문턱을 두드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그녀가 택할 첫 선택은 더 단순해질 것이다. 낮게, 길게, 그리고 필요할 때는 세게.
오늘의 주천희는 단순히 “해냈다”가 아니라 “어떻게 해냈는지”를 코트에서 설명했다. 그 설명은 팬들에게 오래 남는다. 그리고 이런 설명이 쌓이면, 어느 순간 “한국 여자 탁구의 표준”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몽펠리에의 밤은 길었고, 우리는 끝까지 함께했다. 다음 밤도, 그렇게 함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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