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캐스터 되는 법

안녕하세요.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입니다.
봄, 여름이면 제 SNS의 DM 박스에는 전국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스포츠 학과 학생들의 인터뷰 요청 메일로 가득 찹니다.
아마 직업 탐방 수업이 있는 모양입니다.
최대한 답변을 해드리고는 있는데 이게 쉽지 않네요. 그래서 지난 2015년, 2016년 네이버 칼럼에 버전-업을 해가면서 연재를 했던 '야구 캐스터 되는 법'을 2024년 현재 상황에 맞춰서 다시 써보려고 합니다. 이 글의 제목은 '야구 캐스터가 되는 법'이지만 '스포츠 캐스터가 되는 법'을 다룹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사진> 안녕하십니까. 정우영입니다. 이순철 해설위원과 함께 합니다. 중계방송 오프닝 중
  • 스포츠 캐스터가 되려면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하면 좋을까요?

맥 빠지는 대답이 될 수 있겠는데, 전공은 무관합니다. SBS스포츠에는 4명의 야구 캐스터가 있습니다. 저는 독일어를 전공했고, 윤성호 캐스터는 무역학을 전공했습니다. 유희종 캐스터는 대학 시절 정치 학도였고, 막내 이준혁 캐스터는 국문과 출신입니다.
얼핏 보면 어문계가 많아 보이기는 하는데요. 캐스터 전체의 전공을 따져보면 아주 다양합니다. 성악 전공이 두 명에(이재형, 안현준), 작곡과 출신(장유례)도 있습니다. 체육학 전공자(한형구), 영화학도(신예원), 호텔 경영을 전공했던 아나운서(진달래)도 있어요.
대학 전공과목은 정말 무관하고요. 전공보다는 대학 시절 스포츠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스포츠와 관련된 어떤 활동을 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 저는 공부를 못하는데 야구 캐스터를 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하나요?

제가 공부를 못하게 생겨서 그런가 중고생들이 보내주는 질문 중 가장 많은 질문입니다. 두 번째로 많이 하는 질문은 '스포츠 캐스터 힘들어요? ㅋㅋ'
글쎄요. 굳이 공부를 잘했어야 할 필요는 없는데 화면과 언어에 대한 이해도는 높아야 합니다. 이건 야구 캐스터뿐 아니라 전 종목 캐스터에게 모두 해당합니다.
중계방송은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입니다. PD가 만드는 화면을 1차적으로 캐스터가 이해하여 해석해 주고, 2차적으로 해설 위원과의 대화로 시청자에게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과정이죠. 이러려면 화면을 말로 풀어가는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이 있어야죠. 여기에는 현장 제작 PD와의 소통 능력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캐스터는 한 종목만 중계하지 않아요. 저만 해도 올해 야구, 당구, 골프, 펜싱, 테니스, 농구, 복싱, 근대 5종 등을 중계방송 했습니다. 이 종목들의 선수들과 룰에 대해서는 누가 공부를 시켜주지 않아요. 본인이 해야 하는 거죠.

<사진> 왼쪽부터 막내 김재형(언론정보), 한형구(체육학+커뮤니케이션), 유희종(정치학) 캐스터입니다. 전공이 모두 다 다릅니다. 화면 맨 오른쪽에 살짝 보이는 조민호 캐스터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 야구 중계할 때의 일정을 알려주세요.

수도권 중계방송 시에는 보통 사무실에 들렀다가 야구장으로 갑니다. 경기 3시간 전 홈팀 더그아웃 도착을 원칙으로 합니다. 평일 경기 시작이 오후 6시 반이니까 보통 오후 3시 반 정도가 되겠죠. 그때부터 홈팀, 원정팀의 순서로 선수들, 코치, 감독과 경기 관련 정보를 주고받고 식사까지 마치고 중계석으로 올라오면 중계 시작까지 약 40분 정도가 남아요. 그때부터는 해설위원과 중계방송 이야기 - 주로 오프닝 관련 - 를 나누고 중계방송 자막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방송에 돌입하면 여러분이 보고 들으시는 중계방송이 됩니다.
수도권 이외 지역의 중계방송일 경우는 전일 혹은 당일 오전에 그 지역으로 갑니다. 이하 야구장에서의 시간 배분은 위와 같습니다. 단, 모든 캐스터가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제 경우가 저렇다는 겁니다.

<사진> 더그아웃에서 김도영 선수와. 경기 전에는 더그아웃에서 선수, 코치, 감독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 공채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스포츠 캐스터도 아나운서고 방송사의 아나운서를 뽑는 공채 진행 과정과 똑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방송사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통상 아나운서 공채는 2회에 걸친 카메라 테스트와 필기, 면접으로 진행이 됩니다.
카메라 테스트는 1차는 간단한 뉴스 리딩, 2차는 조금 더 긴 뉴스, 혹은 애드리브 테스트 등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스포츠 방송사의 경우 2차 카메라 테스트에서 스포츠 중계방송의 테스트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 채널 SBS스포츠의 경우는 최근 주로 경력직을 뽑았기 때문에 카메라 테스트를 1,2차를 합쳐서 심층적으로 진행을 했습니다.
필기시험의 경우는 스포츠 방송사들이 생략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아나운서 아카데미를 검색하시고 조금 더 심층적인 정보를 얻기를 바랍니다.

  • 업무를 위해 꼭 필요한 자격증은 없나요?

없습니다. 저는 자격증이라고는 운전면허증 한 장 들고 있습니다.

<사진> 아시안 게임 중계를 앞둔 중계진, 이대호(좌), 이순철(우) 해설위원과.
  • 경쟁률은 어느 정도인가요?

최근은 신입보다 경력직을 선호하다 보니 예전 보다 경쟁률이 좀 약해졌습니다.
지금은 남녀 모두 100:1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 뭘 잘해야 뽑히나요?

스포츠 캐스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소리입니다. 장시간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목소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아나운서, 캐스터 시험을 보러 오시는 분들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목소리 좋다'라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들었던 분들이세요. 그런 분들이 아니고서는 이 꿈을 꿀 수가 없죠. 그럼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뭘 잘해야 뽑힐까요?
저는 '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들과는 다른 '결정적인 한 방' 말이죠.
저는 2002년에 MBC 방송 아카데미의 아나운서 과정을 수료했는데 당시 방현주 아나운서가 특강 수업을 와서 정말 인상적인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MBC 여자 아나운서의 경우는 시험을 보러 1000명이 와요. 그중에 한 명 뽑아. 많이 뽑으면 두 명을 뽑고요.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 1000명 중에 1등 할 수 있는 거 뭐가 있어요? 그거 없으면 아나운서 못해요. 잘 생각을 해보세요. 내가 1000명 중에 1등인 게 뭔지.

이 이야기가 저에게는 가장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저는 2002년 연말 MBC espn 신입 공개 채용에 응시했는데 그 당시 경쟁률이 300:1이었습니다.
저 300명 중에 제가 1등인 게 뭔지를 찾기 위해서 시험 기간 내내 고심했던 기억이 있네요. 나름 찾아서 자기소개에서 녹여냈고 그게 '킥'이 됐습니다.
저를 뽑아주셨던 분께서도 '너는 그 자기소개 덕분에 뽑혔어.'를 늘 제게 말씀을 해주셨답니다.
뭘 잘해야 뽑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할 때 먼저 생각을 해야 할 것은 자신이 확실한 경쟁 우위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극대화하려는 노력입니다.

<사진> 경쟁자들 가운데 1등인 것이 뭘까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AI 시대가 도래했는데 직업의 향후 전망은 어떤가요?

VOD의 시대를 거쳐 OTT의 시대가 되면서 확실히 TV본방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TV에서 본방의 효용이 남아있는 분야가 딱 두 가지가 있습니다. - 이건 제 말이 아니라 대학원 수업에서 배운 내용입니다. - 하나는 선거 방송, 다른 하나는 스포츠 방송입니다.
이 두 가지 중 선거 방송은 방송 간격이 너무 크게 벌어져 있죠.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는 5년에 한 번, 국회의원 선거는 4년에 한 번이고, 지자체장 선거 등등이 있다고 하더라도 평균적으로 2~3년에 한 번 정도 될까요?
반면 스포츠 중계방송은 매일매일 있습니다. 심지어 이제는 Youtube를 통해 독립리그나 뉴-스포츠 종목까지도 중계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캐스터는 더 필요하면 더 필요했지 덜 필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AI 캐스터가 등장한다면 분명 인간 캐스터가 위협을 받기는 할 겁니다. 인간보다 더 정확한 중계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야구중계 듣다 보면 인간 캐스터들이 허구한 날 틀리는 선수 이름, 볼 카운트, 스코어, 팀, 이닝 등등을 실수 없이 완벽하게 중계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각종 트래킹 데이터와 AI기술을 연동을 한다면 타구의 정확한 판단에 따른 타구콜도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야구뿐 아니라 많은 스포츠에서 플레이가 진행되지 않고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다는 겁니다. 그 시간을 AI가 심지어 해설위원까지 함께 소통을 해가면서 중계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머신러닝을 시켜야 가능할지 아직 감이 잘 안 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아직 저렇게 까지 해서 AI 캐스터를 등장시켜야겠다는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그만한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죠. 글쎄요. 향후 10년 정도까지는 직업군이 사라질 일은 없으리라고 봅니다.

  • 야구캐스터를 따로 뽑나요? 아니면 뽑아서 종목을 나누나요?

스포츠 채널의 경우 회사에서는 스포츠 캐스터를 뽑고 입사 후 본인의 적성과 종목 적응력을 따라서 캐스터들의 종목 배분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야구 캐스터가 되고 싶고 또 스포츠 방송국에 캐스터가 됐다고 해서 반드시 야구 캐스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캐스터가 되고 나서도 야구에 대한 사랑과 본인이 하고 싶다는 의지를 끊임없이 드러내야 합니다.
이는 위 내용의 '야구 캐스터'를 '축구 캐스터'로 바꿔도 마찬가지입니다.

  • 아나운서 아카데미를 꼭 다녀야 하나요?

아니요. 자신이 방송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확신한다면 안 다니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 아나운서 아카데미를 나와야만 아나운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대부분의 아나운서들은 아카데미를 수료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아나운서가 된 사람들은 극소수 방송 천재고요.
아나운서 아카데미에서는 카메라 앞에 서는 법을 배우고 방송의 기초를 배우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닙니다. 아카데미는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에게 돕고 경쟁하면서 자극을 주고, 또 방송사 공채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곳입니다. 본격적인 방송은 방송사에 들어와서 실전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위 글에서 방현주 전 아나운서의 예를 들기도 했는데 선배들과의 대화를 통해 큰 힌트를 얻기도 합니다.

  • 시험 볼 때 야구(또는 스포츠)를 많이 알아야 하나요? 아니면 방송을 잘해야 하나요?

절대적으로 후자입니다. 가끔 탈락하신 분들이 연락을 주십니다.
'자신의 잠재력을 모르고 탈락을 시켜서 아쉽다.'
'시험을 칠 때는 잠깐 떨었을 뿐이다.'
억울한 마음은 알지만 잠재력은 화면에서 볼 수 없습니다. 그분보다 카메라 앞에서 더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잠재력을 주장하는 분을 뽑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같은 응시생일 경우 카메라 앞에서 더 잘하는 사람이 당연히 잠재력이 더 높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스포츠를 많이 안다고 자신하면서 시험을 치르러 오시는 분은 대부분 1차 카메라 테스트에서 짧은 리딩을 하고 탈락합니다. 방송에 천부적인 자질이 없다면 말이죠. 그렇다고 꼭 위에 언급한 아카데미를 다니란 이야기는 아닙니다. 서로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끼리 스터디 그룹을 조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 스포츠 방송국에 가는 게 좋은가요? 공중파가 좋은가요?

저는 스포츠 방송사 출신이고요. 그래서 스포츠 방송사의 사정만 알고 있습니다.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이겁니다.
스포츠 방송사의 캐스터 만을 목표로 하지 마시고 넓게 보세요.
저를 포함해서 현재 스포츠 방송사에서 캐스터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모두 '운과 때'가 좋았던 거죠. 왜냐. 공개 채용이 언제 진행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거든요. 제 경우를 돌아봐도 제가 전 직장에 입사한 이후 바로 아래 후배인 정병문 캐스터가 들어올 때까지 4년이 걸렸습니다.
이건 제가 지금 몸담고 있는 SBS스포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2014년에 SBS스포츠로 왔던 시기에 당시 이 회사의 막내는 2011년에 입사한 유희종 캐스터였고 5년을 기다려서 안현준 캐스터가 입사한 이후에야 막내를 탈출했습니다.
이렇게 부정기적인 공채를 기다리면서 오로지 스포츠 방송국의 캐스터를 꿈꾸라고 권유하는 것은 아무리 제가 스포츠 캐스터지만 말이 좀 안 됩니다. 냉정한 현실이 있는데 꿈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청춘이 날아가면 그걸 누가 책임지나요?
그래도 스포츠 방송사의 스포츠 캐스터를 지망하는 지망생들에게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스포티비가 여러 개의 채널을 운영하면서 캐스터의 수요가 많습니다.
또 쿠팡플레이와 티빙 등의 OTT도 스포츠 중계방송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고 이곳 역시 캐스터들의 수요가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결론적으로 제 권유는 스포츠의 꿈을 품은 지망생분들은 어디서든 일단 방송 일을 시작하시고 기회가 생길 때 스포츠로 오라는 겁니다.

<사진> 2010년 현 KBO 총재 허구연 당시 해설위원과. (MBC espn 중계화면 캡처)
  • 여자는 중계 캐스터가 될 수 없나요?

아니요.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꼭 보고 싶습니다.
과거의 경우는 여성의 톤이 높아서 장시간의 중계에는 맞지 않다는 선입견이 있었으나 말 그대로 선입견이었습니다.
MLB, EPL 등, 우리보다 훨씬 긴 역사를 자랑하는 리그에서 여성 캐스터가 중계 캐스터로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으며, 유럽의 손꼽히는 스포츠 이벤트 럭비 6 Nations에서도 여성 캐스터가 메인급 캐스터 역할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내도 KLPGA의 장유례 캐스터, KOVO에 오효주 캐스터가 그간 금녀의 구역처럼 여겨졌던 중계석에 캐스터로서 안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앞으로 캐스터의 꿈이 있는 여성 지망생들이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KBO와 K-리그의 캐스터가 되는 모습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사진> 2024 도쿄 올림픽 펜싱 중계방송을 함께 한 2012 런던 올림픽 사브르 금메달리스트 김지연 해설위원. 각 종목의 레전드와 함께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일단 스포츠 캐스터 관련해서 제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을 정리해 봤습니다.
혹시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많은 분들께 공유할만한 정보를 드릴 수 있는 질문이면 또 답변 추가해 드리겠습니다.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