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맥주와 함께, 옛날 돈가스 맛집

안녕. 판에 박힌 말을 즐거워하는 객원 필자 에리카팕이다. 나는 이런 말들을 좋아한다. 전천후, 휘뚜루마뚜루,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 흔한 표현이지만 그만큼 어디에 갖다 놓아도 믿음직스러움과 든든함을 안겨주는 말들. 그리고 이 말도 참 좋아한다. “아이들의 영양 간식이요, 엄마 아빠의 술안주”. 어릴 적 채널을 돌리다 홈쇼핑 채널에서 돈가스가 나올 때면 늘 따라붙던 멘트다. 이제는 엄마, 아빠의 나이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아이로서 나의 영양 간식이자 술안주로 돈가스를 찾는다. 오늘은 나 같은 하이브리드한 마음으로 돈가스와 맥주 a.k.a 돈맥을 하기 좋은 장소 세 곳을 소개한다. 근데 이제 20년 전 감성을 곁들인.


[1]
서울88맥주

서울88맥주는 가게 외관에서부터 수제 돈가스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낸다. 과연 돈맥의 맛집으로 가장 먼저 소개할 만한 집이다. 또 1호선, 3호선, 5호선이 모여있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 종로3가에 위치해 있는데, 어르신들의 메가 핫 플레이스인만큼 위치부터 맛과 편의성이 보장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장에 들어가자마자 내돈내산 와이어 공예 작품들이 눈에 띈다. 아니 눈에 띄는 정도가 아니라 시야를 압도한다. 벽 한 면을 모두 채우는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눈이 쉴 틈이 없어 왜인지 마음이 요동쳐서 술이 당긴다. 묘한 마케팅이다.

다른 손님은 무엇을 먹나 보니 두 테이블 모두 돈가스가 있었다. 그중에는 어르신들로만 구성된 팀도 있어서 다른 메뉴에 대한 아쉬움 없이 가뿐하게 돈가스를 선택했다.

수제 돈가스에 대한 자부심을 대변하듯 오로지 돈가스만 보관하는 냉장고가 버젓이 홀에 있다. 가게 안에 있다 보면 뭔가 계속 망치로 내리치는 소리가 연신 나는데 돼지고기를 두드리는 소리다. 부드러움이 보장되는 소음이라 기대감이 차올랐다.

메뉴판에 ‘박나래 하이볼’이라는 메뉴가 있어 주문해 봤다. 홍차와 레몬이 들어간 하이볼이다. MBC <나 혼자 산다>에 나온 메뉴라고. 집에서 해먹기는 귀찮은데, 한번 맛보고 싶다면 여기서 주문해 보면 좋겠다. 은은하게 상큼한 맛이라 낮술로 즐기기에도 부담 없는 맛이다.

주인공인 돈가스가 등장했다. 왕돈가스로 주문할까 고구마 치즈 돈가스로 주문할까 고민하다가 이왕이면 더 많은 풍미를 느껴보고자 고구마 치즈 돈가스로 주문했는데, 모양새가 아주 말쑥하게 나와서 잘못 주문한 줄 알았다. 접시에는 단정하게 잘 튀겨진 돈가스 한 덩이와 밥, 단무지, 케요네즈가 곁들여진 양배추샐러드 그리고 고추가 나왔다.

이 집의 특이점은 사이드 메뉴에 풋고추가 나온다는 것. 나는 이 조합이 퍽 생소해서 웃음이 났는데, 기사식당에서 돈가스를 시키면 고추를 곁들여 주는 집들이 제법 많다고 한다. 한 입도 안 먹었는데 엔도르핀을 선사하는 플레이팅이다. 고추에는 사과의 18배에 해당하는 비타민이 들어있다고 하니 괜찮은 사이드 메뉴다. 돈가스와 맛의 조화도 꽤 좋았다. 생소하지만, 영양학적으로도 맛으로도 돈가스와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칼질을 하면 단정하게 숨겨져 있던 고구마와 치즈들이 터져 나온다. 맛은 오늘 소개하는 세 곳 중 가장 대단하다. 겉면은 바삭하면서도 보송한 질감인데 부드러운 브라운소스가 촉촉하게 더해져 입에 착 감긴다. 안쪽을 베어 물면 망치로 내리쳤던 소리가 납득이 가는 부드러움이다.

맥주와 즐기기에도 좋고 그냥 한 끼 돈가스만 먹으러 가기에도 좋은 곳이다. 종로구 근처에서 퇴근하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서울88맥주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8길 102 1층 서울88맥주
  • 11:00~05:30 (05:00 라스트 오더)

[2]
클럽투

[진정한 Y2K 감성은 로마숫자 II로 써줘야 한다는 것. 희한하게도 이곳은 L 자리에 2를 길게 넣었다. 이 또한 어떤 그런 Y2K식 감성]

잠실에는 월드타워가 2개가 있다. 롯데월드타워와 그냥 월드타워. 여기는 잠실역 7번 출구로 나오면 보이는 금색 건물 바로 뒷 건물에 있는 그냥 ‘월드타워’다. 클럽투는 여러 회사들이 모여있는 건물 지하 아케이드에 있는 식당인데, 나는 아케이드 식당에 대한 믿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다른 곳보다 저렴하다는 것, 하나는 맛이 보장됐다는 것. 맛없는 집은 오래가기 어렵다.

내부로 들어가면 왜인지 <쉬리>나 <접속> 같은 영화가 떠오른다. 어디선가 추상미 배우가 갈색 립스틱을 바르고 앉아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

기본 제공사항이다. 후추와 팝콘. 후추는 돈가스와 같이 나올 수프에 뿌려 먹으라고 주는 옵션이며, 팝콘은 무제한 리필이 가능하다. 어떤 테이블은 아예 큰 쟁반에 많이 얻어와서 점원의 수고를 덜어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오늘의 주인공 돈가스를 소개한다. 소스 색이 카레 색이지만 달큰한 양파와 과일 풍미가 묻어나는 경양식 돈가스의 정석 같은 소스다. 케첩과 마요네즈가 섞인 케요네스 소스가 올라간 양배추와 마카로니, 피클이 사이드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지만 이 집의 백미는 볶은 김치다. 한 덩이 나온 밥을 볶은 김치와 함께 먹는 조합이 아주 훌륭하다. 그래서 별도로 ‘김치덮밥’이라는 메뉴가 있다. 접시 가득 올려진 밥에 이 집의 볶은 김치를 담뿍 올려주고 그 위에 계란 후라이까지 얹어 나온다. 마치 학창 시절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 어머님이 차려주신 밥상 같은 정겨운 느낌이 물씬 난다.

잠실역 근처에서 퇴근하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2차로 왔다가 자리가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 김치덮밥과 돈가스를 필두로 1차부터 클럽투에서 시작하는 것을 추천한다.

클럽투

  • 서울 송파구 송파대로 558 지하1층
  • 평일 11:00~24:00 / 주말 15:00~23:30

[3]
프린스호프

압도적인 외관으로 에디터B님이 추천한 곳이다. 과연 추천할 만한 비주얼이다. 지금처럼 프랜차이즈 치킨 브랜드가 많아지기 전, 엄마 아빠가 여름밤에 마실 나갔다가 들르던 호프집 비주얼이다.

내부로 들어가면 압도적인 담금주 인테리어가 눈을 사로잡는다. 이곳의 벽면에는 모든 것이 적재되어 있다. 유리잔과 양념 그리고 세월도. 사진에 차마 담지는 못했지만 그 시절 호프집이라면 한 켠에 있던 누드 화보도 꽤 크게 걸려있다.

일일 드라마를 보는 사장님이 계신 식당은 왜인지 맛에 믿음이 간다. 다분히 사장님이 왕인 곳 같아서. 딱히 고객을 왕으로 삼지 않더라도 잘 굴러가는 곳 같아서.

동행했던 지인은 이곳 내부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20년 전 이대 앞에 이런 곳 많았는데…” 1990년대에서 2000년대를 넘어가던 시기에는 이런 곳들이 왕왕 있었다고. “맥주 한잔할래?” 보다 “호프 한잔할래?”라고 묻던 시절. 레트로 인테리어가 아니라 20년 전 그 시절의 현재가 여태 멈춘 인테리어다.

사실 이곳은 ‘프린스치킨’으로 상호를 검색해야 나오지만, 치킨은 이제 팔지 않는다. 치킨은 없지만 돈가스를 필두로 여러 가지 호프집 메뉴들을 즐길 수 있다. 돈가스는 디폴트로 정해둔 상태에서 다른 메뉴를 사장님께 추천받고자 “사장님 여기는 돈가스 말고 뭐가 제일 맛있어요?”라고 물으니 사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좋아하는 걸 시켜. 사람은 자기 먹고 싶은 걸 먹어야 해.” 스웩은 이런 것이 아닐까? 여유가 넘치는 말씀이었다.

모든 것이 남다르지만 티슈 케이스도, 잔도 남달랐다. 콜라를 시켰는데 위스키 브랜드 딤플의 잔을 주셨다. 이 집은 생맥주 500cc가 아직도 3,000원인 귀한 곳이다.

주인공 돈가스가 나왔다. 서울88 맥주에서는 오이고추에 놀랐고, 클럽투에서는 볶은 김치가 놀라웠다면 이곳은 돈가스와 함께 나오는 바나나와 오렌지가 생경했다. 바나나라니.

그리고 다른 곳과 달리 돈가스가 썰어져 나온다는 점이 특별했다. 그러니 더 안주로 제격이다. 포크로 한 조각 집어 먹고, 생맥주 한 입을 들이키기 최적의 시스템. 조금 아쉬운 점은 다른 곳과 달리 사이드에 밥이나 빵이 없다는 것. 여기는 그래서 무조건 2차로 추천한다.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하고 서대문 어딘가에서 옛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이 집을 추천한다.

“먹고 싶은 걸 먹어~”라던 사장님의 말씀에 골뱅이무침을 골랐다. 참기름의 향이 대단한 골뱅이와 함께 비닐장갑을 내주셨다. 젓가락으로 깔짝깔짝 비벼 먹는 것보다 시원스럽게 장갑 낀 손으로 무쳐 먹으니 속이 다 시원했다. 돈가스에서 아쉬웠던 탄수화물을 소면으로 채우고 새콤함과 매콤함도 채워준다. 프린스 호프에서 딱 두 가지 메뉴를 시켜야 한다면 돈가스와 골뱅이무침의 조합을 추천한다. 상성이 아주 좋은 콤비다.

이제 치킨은 팔지 않기 때문에 야무지게 치킨 간판은 불이 꺼져있다. 그래서 지금 상호는 ‘프린스호프’이지만, ‘프린스치킨’으로 검색할 것을 명심하자.

프린스호프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증가로 16 프린스치킨
  • 17:00~ 02:00 휴무 없음

오늘 소개한 세 곳은 돈가스와 맥주를 곁들일 수 있는 곳들로 꼽아봤는데 공교롭게도 컨셉이 아니라 진심으로 레트로 그 자체를 보여주는 곳들이었다. 맥주잔을 끝까지 비우고 나면 ‘어떤 것들은 영원히 발전하지 말았으면, 영원히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삼킬 수 있는 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