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밖 여성·약자 삶 발굴한 지역의 행동하는 지성

"지식인은 퓨즈가 되어야 한다."

백낙청 전 서울대 교수가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에 크게 공감했던 적이 있다.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사회를 지키고 건강성을 담보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

국립창원대학교 문경희(53) 교수를 보면 그가 감당하는 지식인의 역할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국립창원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사회과학연구소장, 지속가능발전센터장 등등. 감당하는 직책만큼 학자로서의 사회적 역할도 막중하다. 많은 학자 중에 유독 그가 눈에 띄는 이유는 학문이 삶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 분야가 삶의 핵심에 닿아있고 다양한 연구와 모색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삶 가까이에 있어야 하기에 그는 유난히 지역민의 삶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문경희 국립창원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참여한 '청년, 3.15의 마산을 기억하고 기록하다'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윤은주

◇후기 대학 입학생, 호주에서 꿈을 찾다 = 1971년생인 그는 성장기를 부산에서 보냈다. 전기 대학 입시에 낙방하고 고민하다가 재수는 안 된다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당시 후기 전형이었던 부산외대에 입학하여 언어학을 전공했다. 원래 영어 공부를 좋아했던 데다가 전공 강의의 원어민 영어 수업을 들으면서 현실적 필요를 느끼다 보니 영어 공부에 빠져들었다.

1993년 대학 졸업 후 좋은 학점과 빼어난 영어 실력에도 자신이 원하는 대기업 일자리를 얻을 수가 없었다. 취업 재수를 결심하고 아르바이트로 영어 강사 일을 하다가 영어권 국가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26살에 미국 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1년여 공부와 일, 여행을 병행하면서 진로를 고민하다 1997년 6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미 있던 돈은 다 써버렸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전이라 국내 취업은 이전보다 더 어려웠다. 하지만 미국 생활 중 배운 마음의 여유를 바탕으로 '위기가 왔을 때 대안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배움에 흥미가 많았던 그는 취업 대신 부산대학교 국제대학원에 입학해 정치학과 국제 무역, 경제학 등을 배우는 융합 전공인 해외지역학을 공부했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스위스 출신으로 호주국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롤란드 블레이커(Roland Bleiker) 교수는 그동안 한국 교육체계에서 받아보지 못한 질문을 던지고 학생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도록 이끌었다.

수업 시간마다 열성적으로 토론하며 흥미로운 답을 내는 그를 눈여겨본 블레이커 교수는 그에게 흥미로운 일자리를 제안했다. 호주국립대학교 교수로 일하는 크리스틴 실베스터(Christine Sylvester) 교수가 한국 사회를 연구하고자 오는데 연구를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실베스터 교수는 국제관계학계의 1세대 페미니스트 연구자였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이 평범한 한국 여성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연구하러 한국으로 와서 그를 연구조교로 고용하게 된 것이다.

문경희 국립창원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윤은주

갑자기 20%까지 치솟은 은행 이자와 고용불안, 해고 등이 한국인, 특히 부산대학교 부근의 식당 아주머니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했는지를 이야기 나누고 알려주면 되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의 시각도 획기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전에는 국가의 위기가 닥쳐오면 국민이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결과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개개인들, 여성이거나 부도를 당한 사람, 정리 해고를 당한 사람 등의 경험을 중심으로 사회적, 학문적 메시지를 끌어내는 일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었다. 평범한 개인의 삶이 국제 질서와 국가의 운명, 정부 정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알게 됐고, 스스로 걸어야 할 학문의 길을 찾게 된 것이다.

졸업을 앞둔 그에게 블레이커와 실베스터 교수는 호주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길을 열어주었다. 그 인연의 힘으로 그는 호주국립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가 호주행을 결심했을 때 주변으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왜 미국으로 가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미국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가 한국 사회에 만연했지만, 정작 그는 주류가 아닌 호주에서 공부하는 것이 너무 값지다는 생각이었다. 영국의 정착 식민지로 만들어진 호주는 직접적인 제국 운영의 경험이 없다. 더욱이 서구 국가의 역사적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아시아와 가까운 지리적 위치 때문에 호주 학계에서는 국제 질서를 바라보는 데 강대국 중심 힘의 논리에 대한 비판과 대안 의식이 발달해 있었다. 그러한 영향으로 박사과정에 진학한 그는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고 토론하는 경험을 쌓게 되었다. 국제 정치에 페미니즘 관점을 더할 수 있었고, 중심의 경계에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좋았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여성의 고용변화를 주제로 박사논문 작업을 하면서, 학위 취득을 앞둔 마지막 1년은 호주국립대 전임 교원으로 강의도 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가르치는 일의 재미와 기쁨, 성취감을 안겨 주었다. 일자리 등 다양한 고려 끝에 호주 유학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09년 3월부터 국립창원대학교에서 일하게 됐다.

'청년, 3.15의 마산을 기억하고, 기록하다' 사업에 참여한 창원대 학생들. /윤은주

◇지역 사회 문제에 해답을 찾다 = 15년 동안 그는 국립창원대학교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아서 수행했고 실천적, 진보적 학자로서 역할을 다해왔다. 학계에서는 호주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한국과 호주 사회의 공통점과 연결성을 찾아 비교, 분석하는 일들도 해왔다. 최근에 발간한 책 <호주 한인의 소속의 정치>는 그 결과물 중 하나이다.

또,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인 전쟁을 탐구하며 피해자들의 고통과 활동가들의 연대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직접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부채 의식과 도덕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 작가들이 참여한 <평화그림책> 재현 연구에도 참여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전쟁의 참상과 양국 국민이 겪은 피해 경험을 중심으로 평화 메시지를 강조한 한일 그림책 작가의 연대 노력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합천 원폭 피해자 실태 조사, 하와이 사진 신부 조사, 경상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지역성 등의 연구 사업도 전개했다. 이러한 지역에 대한 그의 관심은 현재 창원대 사회과학연구소가 수행 중인 '산업도시의 위기와 재구조화' 연구사업(한국연구재단 지원)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연구 이외에도 모의 UN 회의를 개최해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에게 국제 사회 속에서 국가의 역할은 물론이고, 각자 역할을 고민할 기회도 여러 차례 만들었다. 몇 년 전에는 학생, 동료 교수와 함께 창원대 기후시계 건립에 앞장서기도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연구와 교육 활동들이 모두 앎을 삶으로 실천하려는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기후 관측 사상 가장 덥다는 올여름에도 그는 국립창원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또 한 번의 의미 창출을 위해 애쓰고 있다. 창원시 양성평등 사업인 '청년, 3.15의 마산을 기억하고 기록하다'에 참여해 역사의 책임과 기록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자신 역시 타지 출신으로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창원 지역의 역사를 탐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립창원대 국제관계학과에서 개최한 제1회 창원시 청소년 모의유엔총회. /국립창원대

이 작업은 일본 나고야의 난잔대학교 학생들과의 교류 프로젝트로도 활용될 예정으로 한국, 특히 우리가 살아가는 창원 지역의 역사를 이웃 나라의 대학생들에게 전한다는 의미도 크다. 지역에 발 디디고 살았던 주민들, 그중에서 기록되지 못한 여성이나 약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보는 과정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고민한다. 결국, 개인의 삶이 만들어내고 이루어가는 역사를 다면적으로 바라보고 저마다 역사관을 만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좋은 영향을 받았을 때' 최고의 보람을 느낀다고 말하는 천생 교육자이다. 사람의 삶을 통해 가치를 발견하고 의미를 창조하며 학문적 성과를 만들어 온 실천적 지식인, 그는 우리 지역 사회의 건강한 퓨즈이다.

/윤은주 시민기자·꿈꾸는산호작은도서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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