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서 9단이 또 한 번 해냈다. 1패 뒤 2연승. 마지막 날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더니, 결국 초대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제1회 쏘팔코사놀 세계최고기사결정전 결승 3번기에서 신진서는 중국의 투샤오위 9단을 상대로 1국을 내준 뒤 2국과 3국을 연달아 가져오며 종합 2-1로 우승했다. 최종국은 218수 끝 백 불계승. 상금 2억 원. 무엇보다 값진 건 내용이었다. 초반 우변 공방에서 상대의 작은 실수를 정확히 붙잡았고, 이후에는 흔들림 없이 이겼다. 막판 흔들기도 깔끔한 행마로 막아냈다. “첫판에서 지고 욕심을 내려놓고 제 바둑을 두었다”는 그의 말이, 판 위에서 그대로 보였다.

이 우승으로 신진서는 세계 메이저 개인전 통산 9번째 우승을 채웠다. 이제 세계대회 최다 우승 순위에서 조훈현 9단과 공동 3위다. 위로는 이세돌 9단(14회), 이창호 9단(17회)뿐. 더 의미 있는 대목은 ‘결승에서 한 번 지면 끝’이라는 본인의 징크스를 깬 점이다. 그동안 3번기 결승에서 1패라도 하면 최종 우승을 놓친 경우가 이어졌는데, 이번엔 1국 패배를 딛고 2·3국을 완승으로 정리했다. 강한 상대를 상대로도 흐름을 다시 잡는 힘, 큰 판에서의 멘탈과 운영이 더 단단해졌다는 신호다. 상대 전적도 6승 2패로 벌렸다.

이번 대회 자체도 상징성이 크다. 첫 대회 초대 챔피언 타이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치가 커진다. 스폰서의 바둑 사랑을 언급하며 “일류 기사들과 많이 둬서 더 성장할 수 있었다”는 그의 소감처럼, 포맷 자체가 강자들만 꾸준히 만나야 하는 구조였다. 그래서 더욱 ‘내용 있는 우승’이었다.
2025년 신진서의 발걸음을 한 번 더 훑어보면, 왜 이 결승에서 그가 끝내 웃을 수 있었는지 분명해진다. 상반기 41국 35승 6패(승률 85%대)로 다승·승률 1위를 찍었다. 2024년 12월부터 2025년 3월 말까지 25연승을 달리며 컨디션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상금도 1위. 대회 우승은 쌓였다. 난양배 초대 우승, 농심신라면배 5연패를 이끌었고, 7월에는 GS칼텍스배 결승을 3-0으로 끝내며 이 대회만 6번째 우승을 달성했다(통산 42번째 국내 타이틀). 하반기 들어서도 흐름은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9월, 쏘팔코사놀 초대 챔피언으로 세계 메이저 9관을 완성했다. ‘한 시즌 내내 흔들림이 없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이제 시선은 자연스럽게 다음 목표로 향한다. 통산 기록만 놓고 보면 신진서 앞에는 이세돌, 이창호라는 두 개의 산이 남아 있다. 하지만 속도는 충분하다. 2020년 첫 세계 우승 이후 5년 만에 세계 메이저 9회. 지금의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몇 년 안에 이세돌의 기록을 추월하고, 그다음 산까지도 볼 수 있는 자리로 간다는 전망이 나온다. 물론 숫자는 결과일 뿐이다. 신진서가 진짜로 보여주는 힘은 ‘매일의 공부’와 ‘판 위에서의 선택’이다. 대표팀 연구일에 새벽까지 홀로 수읽기를 이어간다는 이야기, 첫 판을 지고도 마음가짐을 바꿔 흐름을 다시 잡는 장면들이 그 증거다.
무엇보다 이번 결승은 신진서가 어떤 방식으로 이기는지를 잘 보여줬다. 큰 싸움에서 무리하지 않고, 작은 득점들을 놓치지 않으며, 상대가 걸어오는 승부수를 차분히 무력화하는 운영. 초반 포석 단계에서 만든 작은 유리함을 끝까지 지켜내는 집중력. 팬들이 “안정감이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다. 바둑은 한 수의 묘수로 끝나는 게임이 아니다. 수십 번의 평범한 선택이 모여 승부를 만든다. 신진서는 그 평범한 선택을 정확히 한다. 그래서 강하다.

초대 챔피언, 2억의 상금, 메이저 9관… 타이틀은 충분히 화려하다. 하지만 이 결과가 던지는 메시지는 더 간단하다. ‘가장 강한 기사’가 ‘가장 흔들리지 않는 법’을 알게 됐다는 것. 한 번의 패배로는 멈추지 않는 선수. 팬들이 보고 싶어 하던 모습 그대로다. 다음 무대에서 또 어떤 장면을 보여줄지, 기대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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