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문이 막히는 17분이었다. 롯데 새 외국인 투수 벨라스케즈가 1회도 못 버티고 내려갔다. 가운데 높게 들어간 빠른 공이 홈런으로 이어졌고, 1루 뒤 뜬공에서 내야가 서로 보다가 공을 떨어뜨리며 흐름을 완전히 놓쳤다. 스트라이크 살짝 밖으로 벗어난 공들이 자동 판정(ABS) 존에 걸리지 않자 급해졌고, 결국 초구 한복판 실투가 터졌다. 추모 패치를 달고 뛰던 ‘최동원 14주기’에 이런 출발이라니, 사직의 한숨이 그대로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야구는 끝날 때까지 모른다. 롯데는 곧바로 배트를 강하게 돌렸다. 1회말 레이예스가 한 점을 가져오며 숨통을 틔웠고, 2회 전민재가 몸쪽으로 몰린 변화구를 정확히 잡아당겨 좌측 담장을 넘겼다. 이어 황성빈이 살살 굴려 만든 내야 안타로 불씨를 살렸고, 고승민이 우익수 옆에 떨어뜨려 또 한 점을 붙였다. “이대로는 못 진다”는 뜻을 타석에서 몸으로 보여준 셈이다.

김태형 감독의 결단도 빨랐다. 2회 초 위기에서 이민석이 흔들리자 곧바로 박진을 올려 불을 껐다. 이어 정철원, 최준용, 정현수, 윤성빈, 김원중까지 릴레이로 총동원했다. 한 명이 길게 끌기 어려운 날이면, 과감히 짧게 끊어 가는 게 답이다. 벤치는 그렇게 판을 다시 깔았고, 타선은 그 판을 놓치지 않았다.
경기의 결은 5회부터 완전히 롯데 쪽으로 기울었다. 나승엽이 바깥쪽 투심을 끝까지 보고 밀어 올린 솔로포로 “쫓아가는 분위기”를 “뒤집는 분위기”로 바꿨다. 전민재의 희생번트, 대타 박찬형의 볼넷·도루, 그리고 황성빈의 한가운데로 뚫는 깨끗한 중전 적시타.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일련의 플레이들이 점수를 만들었다. 이건 운이 아니라 준비된 득점, 요즘 말로 하면 ‘과정이 좋은 점수’였다. 6회엔 손호영의 내야 안타와 도루, 손성빈의 중전 안타로 만든 1·3루에서 황성빈이 희생플라이로 또 한 점, 윤동희가 라인을 타는 2루타로 추가점을 냈다. 11-7, 사직은 다시 살아났다.

물론 SSG도 만만치 않았다. 최지훈이 두 방을 터뜨리며 집요하게 추격했고, 8회엔 한유섬의 2루타와 최지훈의 동점 3루타로 결국 11-11을 만들었다. 여기서 롯데는 또 한 번 버텼다. 김원중이 9회초를 깔끔히 막아 “마지막 한 번의 공격”을 만들어줬고, 그 한 번을 타선이 놓치지 않았다. 9회말, 레이예스가 중전 안타로 나가자 대주자 장두성이 전력질주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김민성이 좌중간 담장을 때리는 큼지막한 타구를 날렸다. 타구가 펜스를 맞는 순간, 사직은 폭발했고, 장두성은 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절망에서 환희까지, 시작은 최악이었지만 끝은 최고였다.
이 경기가 말해주는 건 분명하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도, 남은 단추를 바르게 끼우면 옷은 제대로 여며진다. 벨라스케즈의 불안은 명백한 숙제다. 가운데로 뜨는 빠른 공, 볼·스트라이크 경계에서 맥이 끊기는 패턴, 내야 뜬공 처리에서의 콜 미스까지, 모두 당장 고쳐야 한다. 단기간 해법은 두 가지다. 첫째, 오프너 전략으로 1~2이닝을 다른 투수에게 맡겨 초반을 잠그고 벨라스케즈를 2~3회부터 넣는 방법. 둘째, 높낮이 확실한 콜링으로 초구는 무조건 무릎 아래, 결정구는 포수 미트 바깥으로 빼서 ‘볼이더라도 헛스윙’이 나오게 만드는 운영이다. 내야 커뮤니케이션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누가 부르면 나머지는 양보한다, 이 기본만 지키면 1점은 막는다.

반대로 밝은 점도 뚜렷했다. 황성빈은 상황에 맞는 타격을 계속 보여준다. 내야 안타, 2타점 중전 안타, 희생플라이까지 경기가 요구하는 역할을 정확히 수행했다. 전민재는 ‘번트도, 한 방도’ 되는 유틸 카드로 상대를 불편하게 했다. 레이예스는 초반 추격의 실마리를 잡아줬고, 윤동희는 필요할 때 중견수 머리 넘기는 타구로 쐐기를 도왔다. 그리고 김민성은 끝내기 한 방으로 이 모든 과정을 결과로 묶었다. 타선이 “어떻게 점수를 낼지”를 알고 움직였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다.
감독의 투수 운용도 높이 살 만하다. “오늘 롱은 없다”는 판단을 초반에 확실히 했고, 한 타자·한 이닝 단위로 끊어 가며 타이밍 싸움에서 이겼다. 마무리를 8회에 조기 투입한 선택은 실점은 있었지만, 마지막 9회에 삼자범퇴로 회복하며 전체 흐름을 지켜냈다. 가을야구는 결국 벤치의 속도전이다. 오늘은 롯데 벤치가 한 수 빨랐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이, 최동원 추모의 날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의미를 더한다. 초반에 무너졌던 팀이 포기하지 않고, 하나씩 해내며 끝내 웃었다. 최동원이 늘 보여주던 그 끈기와 투지 그대로다. 공동 5위. 아직 갈 길은 남았지만, 이런 승리는 순위를 넘어서 팀을 단단하게 만든다. 남은 경기에서 롯데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선발이 초반만 버텨주고, 수비는 약속 지키고, 타선은 오늘처럼 “필요한 방식으로” 점수를 만든다. 힘으로만 밀지 않고, 방법으로 이긴다. 그러면 9회말 사직은 또 한 번 환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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