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 '전,란', 재미가 이슈를 넘지 못했다

김지혜 2024. 10. 1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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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 '전,란'이 제작 단계에서부터 화제를 모았던 건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 박찬욱 감독이 제작에 참여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2014) 이후 무려 10년 만에 메가폰을 잡는 김상만 감독의 '감'에 대한 우려가 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 박찬욱의 제작 참여는 영화의 출발을 든든하게 하는 버팀목이었을 터. 그러나 박찬욱이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에 나서는 영화도 투자에 난항을 겪기는 매한가지였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2019년부터 준비)였던 만큼 제작비 100억 이상이 투입되는 사극에 섣불리 투자할 국내 투자 배급사는 없었다.

제작자 박찬욱의 동분서주 끝에 '전, 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세상에 나왔다. 넷플릭스는 2020년 '사냥의 시간'을 시작해 최근 '무도실무관'까지 총 23편의 한국 영화를 투자, 배급해 왔다. 사극 장르에 투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란'은 지난 2일 개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베일을 벗으며 29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화제 최초의 OTT 개막작이 됐다. 'OTT 영화의 영화제 습격'으로 영화제 초반 모든 화제를 집어삼켰던 '전,란'은 부국제 이슈를 뒤로하고 오늘(11일) 전 세계 180개국 시청자들과 만난다.

'전,란'은 왜란이 일어난 혼란의 시대, 함께 자란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적이 돼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강동원이 노비 천영으로, 박정민이 무신 집안의 양반 종려로 분해 전(戰)과 란(亂)을 아우르는 브로맨스를 예고했다.

영화는 기축옥사(己丑獄事: 조선 선조 때인 1589년,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의 인물들이 모반의 혐의로 박해를 받은 사건)로 문을 열며 대동계(양반과 천민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한 무술 연마 조직)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진정 왕과 노비가 대동한가"라며 분노하는 선조의 광기로 시대를 앞서간 비판의식을 제시한다.

영화는 전(戰), 쟁(爭), 반(反), 란(亂)에 이르는 네 개의 챕터 구성을 띤다. 영화의 제목인 '전,란' 사이에 위치한 쉼표의 의미를 쟁과 반으로 풀어냈음을 알 수 있다. 쟁과 반은 전과 란을 조응한다. 일본 고전물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이 구조는 혼란의 시대를 압축하고 친구에서 적이 돼 대결을 펼치는 두 인물의 관계에도 비장미를 더한다. 

김상만 감독은 천영과 종려의 관계를 과거와 현재 순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교차 구성으로 서서히 베일을 벗긴다. 이러한 방식은 보는 이들의 호기심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인물의 이면이나 이야기의 반전이 있을 때 빛을 발한다.

그러나 '전,란'이 내세우는 캐릭터와 이야기는 그리 새롭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신분제의 모순을 몸소 겪으며 자란 천영은 시스템을 뒤엎는 꿈을 꾸며 반란을 준비하고, 그 문턱에서 종려와 마주하게 된다. 쟁과 투의 혼돈 속에서 하나의 목적으로 모인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을 추구하다 균열이 일기도 한다. 이같은 시대상과 주제의식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이나 '군도:민란의 시대'(2014)가 떠오른다. 안타깝게도 '전,란'이 그 영화들의 업그레이드라고 보긴 어렵다.

물론 인상적인 장면들이 꽤 있다. 미술과 촬영(국악 요소를 가미한 음악은 이견이 갈릴 수 있다.)이 특히 그렇다. 시각적 요소는 이야기의 보완재다. 미장센만으로 이야기의 헐거움을 매울 순 없다. 불합리한 시대와 민중의 분노가 만났으니 보는 이들의 감정도 폭발해야 함에도 그 지점까지 쉬이 도달하지 못한다.

인물들의 얕은 감정선 때문이다. 특히 천영과 종려의 브로맨스는 시나리오보다 약화된 인상을 주는데 이는 강동원과 박정민이라는 두 배우의 시너지가 기대만큼 폭발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문제처럼 보인다.

강동원은 발성과 발음을 때때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며 감정 연기도 온도 조절 면에서 아쉬움을 자아낸다. 어떤 영화에서도, 어떤 캐릭터로도 메인 롤을 능가하는 존재감을 보여왔던 박정민은 이번 영화에서 만큼은 활력을 잃은 인상이다.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배우는 선조를 연기한 차승원이다. 최근 박훈정 감독과 잇따라 작품을 해왔던 차승원은 설정이 많이 들어간 '투머치' 연기를 구사해 왔다. 그러나 '전,란'에서는 더하기와 빼기가 잘된 연기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목소리 톤 조절, 감정을 여실히 담은 표정, 과장된 몸짓 등으로 인물의 아둔함과 예민함을 부각한다. 배우의 연륜과 내공이 보이는 연기다. 강동원의 불안한 무게 중심은 차승원의 활약으로 어느 정도 상쇄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친구에서 적이 돼 다시 만난 천영과 종려 그리고 왜군 겐신의 1:1:1의 대결이다. 천영과 종려는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마지막 대결에서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는 말을 주고받는다. 이를 뒤에서 듣고 있던 겐신이 던지는 "지루해서 못 견디겠구나"라는 말은 이 꼬리가 긴 감정 시퀀스를 압축하는 말처럼 들린다.

'전,란'이 가장 힘을 준 건 액션이다. 한국 영화계에서 액션 연기를 가장 잘한다는 강동원을 활용한 액션 시퀀스들은 시각적으로 아름답지만 인물이 내뿜는 감정까지 느껴지진 않는다. 액션 디자인도 여타 사극과 비교했을 때 창의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영화는 전과 란, 쟁이 초래한 폭력과 살육의 현장을 강도로도 보여주는데 다소 전시적이다.

후반부 등장하는 해무 액션신의 경우 역동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해무를 활용한 연출상의 의도가 있겠지만 그 의도는 시야처럼 희미하다.

영화에서 비장미를 일부러 해제한 순간도 있다. 왜군을 말을 옮기는 동시 통역사 캐릭터를 활용할 때다. 한 번이 아닌 반복이라는 점으로 미뤄봤을 때 우연이 아닌 의도한 개그 캐릭터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관객의 숨통을 틔우는 웃음 구간이기는 하지만 극 분위기에 어우러지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매혹적인 건 연출도 연기도 아닌 제목이다. 쉼표를 찍어 압축과 함축을 모두 의도한 제목은 문학적이다. 다만 기대치와 상상력을 밑도는 결과물로 인해 비단 보자기 포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전,란'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돼 대형 스크린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마쳤다.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벤트였다. 오늘 전 세계에 공개되는 영화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TV와 모바일 등에서만 만날 수 있다. 시각적 효과가 극대화된 상영 여건에서 장점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이제 '끊어보기'라는 난관과 마주해야 한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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