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겨울, 대한민국 극장가는 개봉 단 이틀 만에 무려 105만 명의 관객을 가볍게 쓸어 담으며 전설적인 흥행작 도둑들마저 뛰어넘는 괴물 같은 속도로 천만 고지를 향해 폭주하던 하나의 거대한 첩보 대작에 열광했다.
7번방의 선물과 함께 사상 최초의 한국 영화 쌍천만 시대를 열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쏟아졌지만, 이 눈부신 질주는 아쉽게도 716만 명의 고지에서 멈춰 서며 천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한국형 첩보 액션의 지평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던 영화 베를린이 보여준 압도적인 초반의 기세와, 아쉽게 천만 고지를 코앞에 두고 멈춰야 했던 흥행의 이면을 낱낱이 파헤쳐 본다.

영화는 차가운 분단의 상징인 독일 베를린을 주무대로 삼아, 불법 국제 무기 거래 현장을 급습하던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가 어떤 정보기관의 공식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는 정체불명의 북한 요원 고스트 표종성(하정우)과 운명적으로 마주치면서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류승완 감독이 오랜 기간 공들여 직조해 낸 치밀한 스파이 액션의 진수는, 표종성을 추적해 나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국제적 음모의 실체와 맞물려 관객들을 단숨에 숨 막히는 첩보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북한 최고 영예인 공화국영웅 칭호를 거머쥔 엘리트 요원 표종성은 사격과 맨손 격투, 고난도 해킹 능력까지 겸비한 완벽 그 자체의 인물이다.
류승완 감독이 오직 하정우만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단언했을 만큼, 대사 대신 차갑고 건조한 눈빛과 절제된 몸짓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하정우 특유의 카리스마는 극 전반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중심축으로 작용했다.

1999년 한국 첩보 영화의 전설을 썼던 쉬리 이후 무려 14년 만에 다시 첩보 요원 타이틀을 거머쥔 한석규는, 이번 작품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웅이 아닌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겪은 낡고 지친 구식 베테랑 정진수를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스스로를 퇴물이라 자조하면서도 사건의 실체를 파고드는 처절한 집단성과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묵직한 카리스마는, 자칫 차가울 수 있었던 첩보물의 결에 깊은 인간적 입체감을 불어넣었다.

개봉 초반의 기세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개봉 나흘 만에 상영관이 880개 규모로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단 하루 만에 무려 63만 명의 관객을 쓸어 담는 기괴한 흥행 괴력을 발휘했다.
전작들의 기록을 경신하며 극장가 점유율을 독식하다시피 한 이 폭발적인 속도는, 당대 관객들에게 한국 영화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못지않은 거대한 스케일의 스파이 액션을 소화할 수 있다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천만 관객 고지가 무난할 것으로 점쳐졌던 예상과 달리, 영화는 최종 716만 명이라는 기록을 끝으로 흥행 행진에 마침표를 찍었다.
전문가들과 관객들은 특유의 차갑고 무거운 영화적 분위기, 그리고 다소 복잡하게 얽힌 인물 간의 관계성이 전 국민을 아우르는 대중적인 천만 영화의 코스프레와는 다소 결이 달랐음을 원인으로 분석한다.
네이버 평점 7점대가 보여주듯 관객들 사이에서도 명확한 호불호가 갈렸으나, 라트비아와 베를린 현지 로케이션이 빚어낸 이국적인 영상미와 류승범, 전지현 등 조연진의 탄탄한 열연은 한국형 첩보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불멸의 유산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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