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특한 보호자’ 8살배기에 씌워진 덫 [밀려난 삶의 반: 가족 간병과 나·(2-1)]
“너 같은 딸 없다” 순순히 새긴 말
학교생활은 늘 잦은 조퇴와 결석
아픈 엄마는 곧 내 마음이 되었다
간이식은 내 인생 위한 선택인 것
# 다음은 이정민(가명·20대 초반)씨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간병 약자'
사전적인 의미는 ‘힘이 약한 사람’, 사회적인 의미는 ‘소외된 자’. 남들보다 열악한 위치에 있기에 아무리 노력해서 열심히 달려도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 보입니다. 부당한 상황에 처해도 힘이 약하기에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고, 누구나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에서 소외되기 일쑤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건 이들에게 거리가 먼 일로만 다가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간병을 도맡은 ‘영 케어러’ 이정민(가명)씨는 일찌감치 ‘약자’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유일한 보호자’라는 타이틀은 정민씨에게 주어진 몫이었습니다. 어머니를 간병해야 하는 정민씨의 삶에서 자유롭게 교육받고 나의 진로를 고민하며 온전히 정체성을 형성할 권리는 주어지기 힘든 것입니다. 간병으로 인해 사회적 고립에 놓인 ‘간병약자’ 정민씨에게 ‘선택할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자신의 삶은 없었고, 엄마의 보호자라는 타이틀만 정민씨를 압도했습니다. 그렇게 ‘간병약자’의 삶을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정민씨. 그랬던 그는 이제 스스로가 선택해 만들어갈 ‘자신만의 삶’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scene1.
엄마가 쓰러졌다. 초등학교 1학년, 그러니깐 내가 8살 때 갑자기 들이닥친 일이다. 엄마는 담도가 기형이라 담즙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해 계속해서 몸속에 염증이 쌓이는 유전병이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병상에 누워 있는 엄마에게 말했다. “염증 수치가 높아서 패혈증이 왔어요, 심장 판막 수술을 해야 돼요.” 겨우 정신을 차린 엄마는 생사기로에 놓인 위중한 환자였다. 우리 가족은 엄마와 나, 단둘인데…. 초등학교 1학년, 이제 고작 8살인 나는 그날 이후 엄마의 ‘보호자’가 됐다.
엄마는 수술 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엄마의 대소변을 받고, 땡땡 부은 팔다리를 주무르고, 밥을 챙겼다. 엄마를 휠체어에 앉히는 것 같이 힘쓰는 일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일을 했다. 엄마는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나를 찾았다. 엄마는 어린 나에게 의지했다. ‘아픈 엄마를 가까이서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내가 엄마의 보호자라니….’ 엄마와 나, 우리가 가족이라서일까. 막막한 와중에도 내가 우리 가족의 가장이 된 것 같아 괜스레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친척들은 병문안 올 때마다 엄마를 간병하는 나를 대견하게 여겼다. “고생한다. 너무 착하다. 요즘 세상에 너 같은 딸 없다….” 그러면서도 항상 마지막엔 “너가 엄마 옆에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당부는 마치 당연한 듯 했다. 나는 그 말을 순순히 마음에 새겼다. 누군가는 엄마의 보호자가 돼야 하는데, 나 말고는 가족이 없으니. ‘당연히 있어야 되나 보다’란 생각으로 엄마 곁을 지켰다.
#scene2.
“정민아 얼른 병원으로 와 줘.” 힘이 빠진 엄마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렸다. 우리집, 우리학교는 경기도. 엄마가 입원한 병원은 서울 강북의 대학병원. 나는 학교 교실에서 전화를 받았고 수업이 채 끝나지 않았지만 짐을 쌌다. 내가 아니면 엄마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에서 병원은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 타고 1시간30분이 걸렸지만, 병원에서 밤을 지새고 학교를 오고가는 일은 ‘일상’이었다.
다만 이럴 때마다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조퇴를 해야 한다는 게 괴로웠다. 다행히 담임선생님은 내 사정을 알고 배려를 해주었지만, 나는 늘 이런 상황이 미안해서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요…. 엄마가 지금 병원으로 와달라고 해서요”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 하나로, 간곡히 말했다. “그럼! 어머니는 괜찮으셔?” 선생님은 걱정과 함께 흔쾌히 승낙했다.
이렇게 잦은 조퇴와 결석으로 내 출석부는 늘 작대기가 그어져 있었다. 그 작대기를 하나라도 줄이려면 ‘인정 출석’이 필요했다. 학교 제도 안에선, 가족간병을 출석으로 인정하는 결석은 없었다. 오직 선생님의 재량이다. “선생님 혹시 엄마 입원 확인서 제출하면 인정 출석이 가능할까요?” 조심스러운 한마디에 선생님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나는 또 염치가 없어져 부끄러웠다.
#scene3.
‘엄마=나’
나의 모든 시간과 일정을 엄마의 간병에 맞췄다. 방과 후 친구들과 놀고 있어도 엄마의 전화면 한 걸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비로 형편은 빠듯했지만 엄마는 그래도 내 공부에 신경을 썼다. 문제는 학원에 가도 수업을 끝까지 들은 기억이 많지 않을 뿐.
하지만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 엄마의 건강이 악화됐다. 섬망 증세를 호소했고, 홀로 걸을 수 없어 휠체어를 탔다. 전문가의 간병이 필요하다는 병원의 권유에 잠시 간병인을 고용했지만, 엄마는 2주 만에 나의 간병을 바랐다.
간병하는 고통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친척도 있었고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도, 스트레스를 토로하지도 않았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간간이 찾아오는 병문안도 오지 않을까 겁났다. 친구들에겐 그냥 있는 그대로의 ‘정민’이길 바랐다. 그 순간만이라도 나는 나 이길 바랐다. 엄마를 간병하는 불쌍한 아이가 돼버릴까, 그 시선이 무서웠다.
나는 공부를 잘했다. 공부가 좋았다. 정확하게는 공부하는 그 시간이 좋았다. 공부하는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새로운 개념을 배우고 익히고 고민하며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공부만이 나의 시간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시간을 제외하면 엄마와 나는 하나였다. 우리 둘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떨어질 틈이 없었다. 투병 중인 엄마는 부정적인 말과 마음을 나에게 쏟아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잠을 설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낮에 꾸벅꾸벅 졸면, 엄마는 “나는 이렇게 힘든데 너는 잠이 오냐”고 나무랐다. 엄마가 무심결에 뱉은 한마디가 나의 일상을 지배했다. 몸이 아픈 엄마의 힘든 마음은 곧 나의 마음이 됐다.
그런데 나는 사실 그 말과 마음이, 그리고 이 현실이 무거웠다. 감당하기 벅찼다. 나는 아직 어린데 아픈 엄마를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간병은 나를 절망케 했다. 엄마와 연동된 나의 삶을 잠시라도 떼어놓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삐져나왔다. 하지만 이내 ‘내가 너무 나쁘다’는 죄책감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왜냐면 나는 엄마의 유일한 보호자니까.
#scene4.
‘나를 위한 선택’
엄마의 병을 치료하는 방법 중에 나는 ‘간이식 수술’을 선택했다. 다행히 엄마에게 나의 간 일부를 떼 줄 수 있었다. 만 16세부터 가능한 이 수술을 나는 손꼽아 기다렸다. 엄마를 살릴 수 있는, 가장 치료효과가 큰 방법이기도 했지만 아주 솔직하게는 엄마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 끝이 없는 간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이것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수술이 잘되고 엄마가 건강을 회복하면 나는 ‘정민’이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간이식은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엄마의 간이식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 엄마의 건강도 일상생활이 가능할 만큼 많이 호전됐다. 나는 결심했다. “엄마 나 노래가 하고 싶어” 이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간 숱한 번뇌를 견뎌야 했다. 그리고 간신히 막아왔던 마음의 둑도 와르르 무너졌다. 숨을 쉴수 없을 만큼 답답한 마음이 밀려왔는데, 병원에 가니 ‘우울’이라고 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우울이 밀려왔다. 내 인생이 아니라 엄마의 인생을 살아온 시간이 원망되면서도 내인생을 선택하려는 이 순간의 나는 또 죄책감에 시달렸다. 의사는 ‘더 나은 간병’을 위해 나를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픈 엄마와 나를 분리해야 한다고도 조언했다. 요즘은 엄마와의 거리두기를 연습 중이다. 주변에도 조금씩 나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때론 마음을 토로할 때도 있다. 아직은 ‘정민’으로 살기 위한 연습이 필요하지만 더 늦지 않게 한발씩 내딛고 있다.
/한규준·공지영·유혜연기자 kkyu@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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