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서 못 사던 차" 출시와 동시에 돌풍을 일으킨 기아의 미니밴

차명 '카렌스'는 자동차를 뜻하는 '카'와 '르네상스'의 합성어로, 자동차의 새로운 중흥기를 열겠다는 기아차의 의지를 담았습니다. 카니발과 비슷한 부드러운 인상에 늘씬한 차체, 형태는 웨건에 가까웠지만, 범퍼와 도어 가니쉬를 투톤 처리하면서 스포티한 느낌을 더했고, 소형차를 기반으로 했음에도 여느 중형 SUV와 맞먹는 늠름한 크기를 자랑해 소비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죠.

다만, 아무리 스타일보다는 실용성에 집중하는 미니 밴인 것을 감안해도 등장 당시부터 이미 몇 년은 된 차 같다며 스타일이 고루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는데요. 이는 카렌스의 성패에 의문을 품었던 당시 경영진의 염려가 작용해 최대한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디자인을 채택한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특히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도요타의 7인승 MPV '입섬'의 스타일을 필요 이상으로 반영했기 때문에 외관이 굉장히 비슷해졌죠.

무엇보다 카렌스의 가장 큰 경쟁력은 실내 공간에 있었습니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의 미달이네를 그대로 투입한 TV광고를 꽤 오랜 기간 방영했던 게 떠오르는데요. '내 집처럼 편안한 차'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3대가 함께 타고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실내 공간을 자랑했죠. 

당시만 해도 이렇게 조부모와 함께 사는 대가족이 흔했고, 다함께 외식이라도 하러 가려면 값비싼 중형 SUV나 스타렉스, 봉고 같은 승합차가 필요했는데요. 어차피 부부 내지 가장이 혼자 타는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 이런 차량들은 좀 부담스럽죠. 이 빈틈을 정확하게 채워주는 카렌스의 적절한 사이즈는 수많은 가장들을 단번에 사로잡았습니다.

지난 콘텐츠에서 소개한 싼타페 편에서 짧게 언급했던 승차 정원 늘리기에만 초점을 맞춘 어거지에 가까운 3열이 아닌, 좁긴 하지만 제대로 된 3열 시트를 갖췄다는 점도 경쟁력 있는 부분이었죠. 특히 5:5로 분할된 뒷좌석 시트를 모두 접으면 비슷한 가격의 세단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활한 적재 공간이 펼쳐졌기 때문에 패밀리카와 업무용 차량에 구분이 없는 현장직 소비자나 자영업자들도 선호했습니다.

눈에 띄는 점은 스티어링 휠 뒤편에 위치한 칼럼식 자동 변속기 레버를 장착했다는 점인데요. 일반적으로 변속기 레버가 위치하는 중앙 콘솔을 비워둠으로써 좌석 간 이동을 수월하게 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지금도 거대한 수납 공간을 만드는 등 실용성을 극대화할 때 이런 설계를 쓰곤 하죠. 주행 중 탑승객에 대한 안전이 강화된 지금은 그 중요성이 많이 희석됐지만, 당시에는 주행 중에라도 자리를 옮길 수 있는 워크-쓰루를 갖추는 것이 미니밴의 덕목처럼 여겨지던 때였죠. 필요하다면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조수석에서도 뒷좌석으로 언제든 넘어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덕분에 좁은 곳에 주차하고 조수석으로 내리기도 수월했죠. 단, 수동 변속기 차량은 일반적인 플로어 타입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컬럼식 자동 변속기를 사용했던 현대차의 중형 MPV '트라제 XG'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여기에 기존의 고리타분한 운전자 중심 구조가 아닌 안정적인 좌우대칭 레이아웃에 오디오 유닛을 최상단에 배치해 조작 편의성도 뛰어났고, 당시의 고급 사양이었던 CD 플레이어는 물론 보여주기용 옵션이었지만 TV, VCD로 영화 감상이 가능한 AV 시스템까지 탑재한 것은 카렌스를 그저 '짐차', '생계형 차'가 아닌 세단 같은 '승용차'로 어필하고자 했던 그들의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었습니다.

파워트레인은 중형 세단 크레도스에 쓰이던 4기통 1.8L LPG 및 가솔린 엔진을 탑재했고, 5단 수동 및 4단 자동 변속기가 맞물렸습니다. 충분하진 않았지만, 그만큼 가벼운 공차 중량으로 무난한 가속감을 제공했고 가스식 쇼버와 듀얼링크 타입의 후륜 서스펜션으로 패밀리카의 덕목인 안락한 승차감까지 제공했습니다.

다만 가뜩이나 세단 베이스라 지상고가 낮은데, 서스펜션마저 물렁하게 세팅돼 있어서 사람을 꽉꽉 채워 탑승하면 뒷부분이 심하게 주저앉아 하부를 긁고 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하네요.

카렌스는 등장 당시부터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앞서 다른 차량들을 소개하면서 주로 비극으로 다뤄졌던 IMF 외환위기가 이 카렌스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기회로 작용했어요. 1천만 원 초반대의 합리적인 시작 가격과 7인승 이상 승합차 혜택을 등에 업은 저렴한 보험료와 자동차세, 여기에 연료비까지 저렴한 LPG 파워트레인이 방점을 찍었습니다.

LPG 연료를 쓰는 신차를 일반 소비자들이 제약 없이 구입할 수 있게 된 건 비교적 최근 일이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LPG 세단은 택시 같은 영업용 차량이나 국가유공자, 장애인 등 특정 조건에 해당하는 소비자만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타고 싶어도 못 타는 분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승합차는 이런 제약이 없었죠.

이를 노려 LPG 파워트레인이 SUV, 미니밴 같은 RV 차량에 폭넓게 적용되면서 일반인도 특수한 조건 없이 LPG 차량을 살 수 있었고, 이를 공략한 카렌스의 강력한 세일즈 포인트가 됐습니다. 2001년 이후 승합차 관련 규정이 강화되면서 11인승 미만은 일반 승용차로 분류됐지만, 대신 승합차 혜택 중 하나였던 7인승 이상 LPG 차량의 일반 판매는 그대로 유지되면서 인기는 꾸준히 이어졌어요. 또 카렌스 같이 법 개정 이전에 출시된 차량의 경우 형평성을 위해 2004년까지 관련 규정을 유예해주면서 승합차 세제 혜택도 받을 수 있었죠.

출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천년을 맞이, 2000년에는 소소한 부분 변경을 거친 '밀레니엄 카렌스'를 선보였습니다. 새로운 디자인의 크롬 라디에이터 그릴과 알루미늄 휠, 난해했던 리어램프의 그래픽을 깔끔하게 수정하고 밀레니엄을 맞이해 새롭게 변경한 기아 엠블럼을 적용해 세련미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죠. 더 넉넉한 출력을 원하는 소비자들을 위해 배기량을 키운 2.0L LPG 모델도 이 무렵 추가됐어요.

이듬해에는 상품성을 보강한 '뉴 카렌스'로 업그레이드 됐는데, 외적인 부분에서 이렇다 할 큰 변화는 없었지만, 인테리어의 소재를 업그레이드하고 원격 잠금장치, 앞좌석 열선시트, 워크-쓰루로는 모자랐는지 국내 최초로 조수석을 아예 180도 회전시켜 뒷좌석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을 적용하는 등 패밀리카로서의 편의성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실수로 라이트나 실내등을 켜놓고 내리면 일정 시간 뒤에 스스로 꺼져 방전을 막는 배터리 세이버 기능도 깨알 같았죠.

한편 이 바람 잘 날 없는 분위기 속에서도 카니발, 카렌스 형제가 묵묵히 판매량을 떠받치고 있는 와중, 갑자기 쌩뚱맞은 RV 라인업 하나가 튀어나왔습니다. 바로 카렌스와 같은 해 출시된 '카스타'였죠. 부드러운 유선형의 카니발, 카렌스와 달리 당대 고급 세단을 연상케 하는 견고하고 강인한 느낌의 디자인과 승용 감각의 인테리어, 풀 오토 에어컨 같은 고급 사양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기아차라기에는 디자인도 어색했고, 무엇보다 카렌스와 포지션이 완벽하게 겹쳤는데요. 그럴 만도 한 게 이 차는 사실 현대정공이 준비했던 '산타모'의 후속 모델이었어요. 앞서 짧게 언급했듯 기아차는 카렌스 출시 직전 결국 부도가 나버려 현대차에 인수됐죠. 현대차와 합병한 이후 부실한 기아차의 라인업을 보강한다는 명목 하에 몇 개의 모델을 선심 쓰듯 증여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카스타였습니다. 심지어 산타모를 만들던 울산 라인에서 그대로 생산해 기아차로 판매되는 특이한 모델이었죠.

현대정공을 이끌던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의 수장이 되면서 기존 현대정공의 임원진들이 기아차로 대거 자리했고, 마치 이삿짐처럼 이 차를 가져갔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어요. 하지만 차가 참 애매했죠. 디자인과 승차감에서는 나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가격은 비싸면서도 한 지붕 아래 압도적인 가성비를 내세운 카렌스에 비해 돋보이는 장점이 별로 없다 보니 그야말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습니다. 또 후속이라기엔 구형 산타모의 차대와 파워트레인을 그대로 사용하는 등 브랜드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산타모였기 때문에 이 카스타 역시 선대 모델인 산타모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고, 결국 소수의 오너들만 만족하며 타는 차가 됐죠. ( 2편에서 이어집니다. )

본 콘텐츠는 '멜론머스크'의 이용 허락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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