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하나 오타났을 뿐인데'' 국민에게 수천억 배상하며 사과한 '이 기업'

연비 숫자 한 줄이 부른 5,000억 원대 사과

2012년 현대·기아차의 연비 표기 논란은 “글자 몇 개, 숫자 한 줄 잘못 적은 것”으로 치부하기엔 규모와 파장이 너무 컸다. 미국 환경보호청 조사에서 13개 차종 약 90만 대의 연비가 실제보다 높게 표시된 사실이 확인됐고, 조사 범위가 확대되자 2011~2013년식 약 120만 대로 대상이 늘어났다. 산타페, 소나타, 엘란트라 등 주력 차종이 대거 포함되면서, 단순 실수가 아니라 인증·측정 과정의 구조적 문제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연비는 소비자가 차량을 고를 때 가장 먼저 보는 핵심 수치였던 만큼, 이 사건은 “계기판 대신 광고를 믿었다”는 소비자들의 신뢰를 정면으로 뒤흔든 사례로 남았다.

EPA 조사에서 드러난 ‘숫자의 차이’

미국 환경보호청이 문제 삼은 지점은 연비 시험 과정과 공인 수치 산정 과정이었다. 시험 방법과 조건, 보정 방식에서 제조사와 당국의 기준이 엇갈렸고, 그 결과 실제 주행 조건에서 재확인한 수치와 차량 홍보·인증에 쓰인 수치 사이에 차이가 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13개 차종, 90만 대라는 초기 발표가 나간 뒤 추가 조사에서 120만 대까지 범위가 늘어났다는 점은, 오류가 몇 개 차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생산된 차량군 전반에서 반복됐음을 의미했다. 이 과정에서 “연비를 과장해 표기했다”는 표현은 더 이상 언론의 과장이 아니라 규제기관의 공식 판단에 가까운 무게를 갖게 됐다.

미국에서는 전면 사과와 연간 800억 원대 보상이 나왔다

현대·기아차의 미국 내 대응은 빠르고 전형적인 ‘미국식 수습’ 절차를 밟았다. 회사는 즉각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일간지에 전면 사과 광고를 게재했다. 이어 연비 보상 프로그램을 마련해 문제 차량 소유주에게 매년 평균 88달러를 지급하는 방식의 금전적 보상을 약속했다. 전체 보상 규모는 연간 약 862억 원 수준으로 추산됐고, 이 프로그램은 일정 기간 동안 지속 집행되는 구조였다. 여기에 더해 2014년에는 미국 당국과의 합의에 따라 벌금 1억 달러와 온실가스 배출권 2억 달러 상당을 추가로 부담하면서, 총 5,300억 원이 넘는 비용을 지불하게 됐다. 미국 소비자 보호·환경 규제 체계에 맞춘 ‘벌금 + 배출권 + 소비자 보상’ 패키지 수습이었다.

국내 소비자에게는 사실상 ‘없는 일’이 된 사건

같은 차를 산 한국 소비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미국에서 문제로 지적된 차종 상당수가 한국에서도 판매됐지만, 국내에서는 미국식 연비 보상 프로그램이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다. 대대적인 공개 사과 광고나 상세한 경위 설명 역시 찾아보기 어려웠다. 즉, 동일한 연비 표기 오류에 노출된 소비자라도 국적에 따라 보상과 대응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차는 미국 소비자에게는 고객이고, 한국 소비자에게는 내부시장으로만 본 것 아니냐”는 비판이 소비자 단체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세게 제기됐다. 미국에서의 신속한 금전 보상과 국내에서의 사실상 무대응이 나란히 비교되면서, 형평성과 책임 의식에 대한 논쟁은 사건이 끝난 뒤에도 오래 이어졌다.

‘글자 하나 차이’가 신뢰 구조를 갈랐다

연비 표기는 숫자 몇 개로 표현되지만, 그 숫자를 둘러싼 의미는 국가별 규제와 소비자 권리 인식에 따라 전혀 달랐다. 미국에서는 연비 과장 문제가 드러난 즉시, 소비자 피해 산정과 기업 책임 부과가 제도화된 절차를 통해 진행됐다. 잘못된 연비 수치는 계약 조건의 핵심 오정보로 간주됐고, 그에 상응하는 금전 보상과 환경 관련 제재가 뒤따랐다. 반면 한국에서는 같은 수치를 놓고도 “실제 주행 연비는 원래 광고와 다를 수 있다”는 식의 인식이 일부에서 제기되며, 규제기관과 기업 모두 미국만큼의 압력을 받지 않았다. 결국 같은 오타, 같은 수치 오류가 한쪽에서는 수천억 원대 사과와 보상으로 이어지고, 다른 쪽에서는 기억 속 ‘과거 뉴스’로만 남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숫자만이 아니라 소비자를 기준으로 보자

현대·기아차의 2012년 연비 과장 사태는 기술적 오류나 인증 절차의 문제를 넘어서, 기업이 각 시장의 소비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잣대가 됐다. 미국에서는 법과 제도가 소비자 권리를 강하게 담보하며 기업의 사후 책임을 강제했고, 국내에서는 같은 수준의 문제 제기와 제도적 대응이 부족했다는 인식이 남았다. 연비 숫자 한 줄, 글자 하나의 오류가 가져온 파장은 결국 “누가 잘못했는가”보다 “누가 어떻게 책임지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됐다. 이제 연비든 안전이든, 어떤 숫자 아래에 있는 소비자부터 기준으로 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