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락스, 마셔도 되나요?

이 락스, 마셔도 되나요?
답은 당연합니다. 마시면 안 됩니다. 마실 수 있는 락스는 없습니다. 하지만 답이 정해진 이 질문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은 만져만 봐서는 마실 수 있는 음료인지, 락스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점자가 적혀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 음료에는 '탄산'·생활 화학 제품에는 없다…험난한 제품 고르기
KBS 취재진은 시중 마트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제품 10여 종을 시각장애인과 함께 구분해 봤습니다.
사이다 캔 음료에는 '탄산'이라는 점자가 적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사이다인지, 콜라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울산시 점자도서관 점자 지도원으로 일하고 있는 시각장애인 유재국 씨는 "점자가 있는 대부분의 마시는 제품이 음료, 탄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제품인지를 알아보기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술처럼 과도한 음용이 신체에 위험할 수 있는 제품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건 생존의 문제임에도 점자 표기가 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페트병에 담긴 소주는 점자 표기가 전혀 없었고, 우유갑과 같은 용기에 담겨있는 일본식 청주에는 '일본어' 점자가 적혀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만져만 봤을 때는 소주와 콜라를, 일본식 청주와 우유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마시면 위험한 제품에 점자 표기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음료수 같은 걸로 추정이 되긴 하는데, 점자가 만져지지 않으니까…이렇게 흔들어 봤을 땐 음료수로 추정이…"
시각장애인 유 씨가 음료로 추정한 제품은 락스 성분이 포함된 세탁조 세정제였습니다.
작은 요구르트처럼 생긴 화장품에도, 콜라병처럼 생긴 세탁조 세정제에도, 플라스틱 음료병처럼 생긴 주방세제에도 점자는 없었습니다.
대신 세제와 세정제에는 "내용물을 먹거나 삼킨 경우 응급조치를 하고 즉시 의사와 상의하십시오"라는 주의 사항이 적혀있습니다.
비장애인이 보기에도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쓰여있어 살피기 어려운 주의 사항에 시각장애인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유 씨는 평소 가정에 두는 물품에는 '점자 스티커'를 붙여놓는다고 합니다. 마셔도 되는 물건인지, 아닌지를 직접 구분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기업이 직접 해준다면 제품을 구분할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며 말을 흐리기도 했습니다.
마트에 혼자 갈 일이 있으면 유 씨는 소비자임에도 점원들의 눈치를 살핀다고 합니다. 안내를 해주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빨리 물건을 고르고 갔으면 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콜라 하나를 사더라도 어떤 종류인지 살펴보고, 가격도 비교하면서 물건을 구매하고 싶지만 바쁘게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상황. 제품을 따져보고 고를 수 있는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가 시각장애인에겐 없습니다.

■ 누군가에겐 '게임', 하지만 시각장애인에겐 '생존'의 문제
사실 눈을 가리고 물건을 만지며 무엇인지 맞히는 건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게임'으로 취급됩니다.
시청자들은 촉감만으로 물건을 추정해 오답을 말하는 참가자들을 보며 웃습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일상이고 생존의 문제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울산에서는 80대 시각장애인이 술에 취한 70대 이웃에게 점자가 없는 '식용 빙초산'을 건네 숨지게 한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촉감이 비슷한 빙초산과 비타민 음료를 구분하지 못해 잘못 건넸다가 사망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유 씨는 " 촉감으로 제품을 고르는 건 비장애인에게는 '게임'이지만, 우리에겐 매일 같이 일어나는 '삶'과 같은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3월 기준, 점자나 음성·수어 영상 변환용 코드를 표기한 식품은 총 891개, 전체 1%도 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앞서 살펴본 '탄산'이라는 점자조차도 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주방세제, 락스와 같은 화학용품이나 잘못 바르면 인체에 위험할 수 있는 화장품에는 점자 표기가 전무합니다.
하지만 관련 발의된 법안은 폐기되기 일쑤입니다.
2023년 김승남 전 의원이 '생활 화학제품' 점자 표기 의무화를 담은 개정안을 대표로 발의했지만 "산업계의 반대와 가격 인상 우려가 있다"며 비용 문제를 이유로 계류하다 임기 만료로 폐기됐습니다.
지난해 9월에는 시각장애인인 김예지 의원이 화장품 용기에 점자 등 표시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화장품은 다품종 소량 생산의 특성이 있어 산업계 비용 부담이 크고, 수출 제품에 한글점자를 표시하면 소비자 혼선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의무화에는 이르지 못했고, 식품의약처가 화장품 제조업자에게 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신설됐습니다.
오늘(4일)은 '한글 점자의 날'입니다. 1926년 11월 4일 한글 점자가 반포된 날을 기념하는 날로 올해 99주년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의 눈이 되어야 할 점자는 일반 식품에서도 위험 제품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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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천 기자 (hub@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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