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이 심란할 때 읽기 좋은 책 5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 에디터 기명균이다. 이번 달에도 역시 재밌게 읽은 책 5권을 소개한다.


[1]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

“맛있는 쌀국수가 내 일주일을 바꿔놓은 기억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사회초년생 시린, 나나, 실비아는 집세를 나눠 내는 룸메이트다. 동시에 각자의 기쁨과 슬픔, 설렘과 분노, 성취와 우울을 공유하는 친구다. 세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아시아인 여성으로서 뉴욕에 이주해 살고 있고, 크고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며, 스트레스받는 날엔 좋아하는 훠궈집에 모여 왕창 먹는다. 마음 맞는 친구 셋이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이 그래픽 노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매력이다.

두 번째 매력은 세 사람을 섣불리 뭉뚱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로 친하고 공통점이 많다고 해서 비슷한 고민, 비슷한 꿈만 안고 사는 건 아니니까. 예를 들어, 셋 다 책을 좋아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하는 자세와 인생의 목표가 완전히 다르다. 니나가 좋아하는 건 책 만드는 일이다. 위대한 편집자가 되기 위해 일터에서 인정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실비아는 일하는 틈틈이 자기 글을 쓴다. 출판사 경력 20년을 지나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토니 모리슨이 롤모델이다. 시린은 책 읽는 게 좋을 뿐, 책으로 뭔가를 이루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다. 그래서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세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읽을수록 더 알아가고 싶고, 또 응원하고 싶어진다.

세 번째 매력은 제목에 언급된 ‘아래층 사는 부커상 수상자’ 베로니카 보의 존재감이다. 어느 날 잘못 배달된 음식을 계기로 안면을 튼 네 사람은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한층 더 가까워진다. 각자 다른 욕망과 결핍을 가진 세 친구에게, 베로니카는 ‘맞춤형 어른’이다. 니나의 열정을 받아주고, 시린의 우울을 보듬고, 실비아의 꿈을 응원하는 베로니카에게 나도 살짝 기대고 싶어졌다.

  •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 | 케이트 가비노 | 윌북 | 1만 7,800원

[2]
<영화 보고 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

“평범하지도 못한 길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평범한 길을 빨리 선택하는지도 모른다.”

대학 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처음 봤다. 엄지원과 이기우가 주연을 맡은 <극장전>이었다. 동기 중에 영화를 많이 보는 친구가 있었는데, 내가 어제 <극장전>을 봤다고 하니 “넌 홍상수 영화 이해 못 할 텐데?”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해는 못 했다. 근데 좋았다. 뭐가 좋았냐는 물음에 답하기가 참 어려웠다. 그냥… 사람들이 진짜 같아서 좋았는데. 친구는 ‘니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분했다.

그 후로 영화를 많이 봤고, 좋아하는 영화의 목록도 길어졌다. 홍상수 영화도 열심히 봤다. 어떤 건 좋았고, 어떤 건 그냥 그랬다. 뭐가 좋은지 설명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소설가 김중혁은 이 책에서 홍상수의 영화가 왜 좋은지 명료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홍상수 감독은 언제나 일상에서 주고받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흔히 겪는 일을 특별하게 만들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오, 이건데. 그때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데.

디에디트에 연재하는 이 글도 그래서 늘 어렵다. 매달 소개하는 다섯 권 중 최소 세 권은 읽으면서 좋다고 느낀다. 근데 왜 좋은지 글에 담기가 쉽지 않다. 배움이 필요하다. 이 책을 참고서삼아 연습해보려 한다. 책 서문에는 영화 <패스트라이브즈>를 보고 나서 글 한 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예시로 들어가 있다. 영업비밀을 이렇게 공개해주셔도 되나요. 감사합니다.

영화당과 빨간책방을 좇아, 볼 영화와 읽을 책을 고르던 시절이 있었다. 이 책이 다루는 영화는 모두 77편. 지난주에는 <당신얼굴 앞에서>를 봤고, 다음주에는 <마이어로위츠 이야기>를 볼 거다. 오랜만에 ‘봐야 할 영화 리스트’가 생겨서 좋다.

  • <영화 보고 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 | 김중혁 | 안온북스 | 2만 4,000원

[3]
<이중 하나는 거짓말>

“소리는 말하고 싶었다. 누가 들어도 명백한 거짓 같아서 모두 웃어넘길 수 있는 진짜 이야기를.”

노벨문학상 수상 다음날 공개된 인터뷰에서, 소설가 한강은 최근 읽은 책으로 김애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과 조해진의 <빛의 멜로디>를 꼽았다. 보통 이런 질문에 갓 출간된 한국소설이 언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더욱 반가웠다. 번역 없이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이번 기회에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제목은 소설에 나오는 ‘좀 특이한 자기소개’ 방식과 관련이 있다.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을 다섯 개 말하되, 그중 하나는 거짓말이어야 한다. 그럼 듣는 사람은 무엇이 거짓일지 맞히기 위해 더 집중해서 듣게 되고, 말하는 사람은 드러내기 껄끄러운 비밀도 거짓인 양 슬쩍 꺼내놓게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지우, 채운, 소리도 각자 껄끄러운 비밀을 가지고 있다.

지우는 얼마 전 실족사한 엄마가 실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채운은 아빠를 칼로 찔렀는데 자기 대신 엄마가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갔다. 소리는 자기 손이 닿은 생명을 죽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 고 믿는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비밀을 속에 품은 세 아이는 그 비밀로 인해 서로 연결된다. 촘촘하게 연결된 셋의 관계는 분명 이 소설의 장점인데, 나에겐 단점이기도 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괴물>은 촘촘해서 재밌는 영화였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좋아해 온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웠다. 지나치게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대한 아쉬움도 비슷하다. 너무 이야기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좋아하는 창작자의 변화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어디로든 나아가고 있으니, 다음에 또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겠지.

  • <이중 하나는 거짓말> | 김애란 | 문학동네 | 1만 6,000원

[4]
<예술 도둑>

“주인공은 천재 같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한데, 아마 두 가지 모두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예술 도둑’ 스테판 브라이트비저는 미술품을 훔친다. 티켓을 끊고 박물관에 들어가 그림을, 술잔을, 투구를 훔친다. 그가 여느 예술 도둑과 다른 점은 훔친 미술품을 팔지 않고 집에 모셔둔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고, 답답한 박물관에 갇혀 있던 아름다운 작품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다. 훔친 작품들로 엄마 집 2층 다락에 꾸민 컬렉션이, 그가 도둑질로 얻는 유일한 보상이다.

그는 왜 훔칠까. 예술에 대한 사랑, 아니 집착은 어릴 때 받은 상처에서 비롯되었다. 매일같이 죽일 듯 다투는 부모 밑에서 자라서인지 그는 자주 불안해했다. 도피처가 필요했다. 청소년 때부터 고고학과 역사에 빠져들었다. 과거에서 건진 아름다움으로 현재의 불안을 잊었다. “상자 속 보물은 그를 화나게 하지도, 괴롭히지도, 버리지도 않는다. 사람과는 다르다.”

그는 어떻게 훔칠 수 있었나. 애인 앤 캐서린의 도움을 받았다. 한 사람이 망을 보다 OK 사인을 내면 다른 한 사람은 훔친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조합이다. 캐서린은 눈치가 빠르고 브라이트비저는 손이 빠르다. 예술품을 지키는 일과 관람객에게 보여주는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박물관은 합이 잘 맞는 ‘도둑 커플’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는 붙잡혔을까. 훔친 미술품은 어떻게 됐을까. 이 2가지 질문까지 답해버리면 책을 읽는 재미가 반감될 테니, 대신 내가 느낀 위험한 감정을 고백하며 글을 마치겠다. 나는 브라이트비저에게서 내 모습을 봤다. 아직 책을 훔친 적은 없지만, 미술품에 대한 그의 집착이 책에 대한 나의 집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난 그저께도 도서관 대여한도를 꽉 채워, 읽지 못할 책 5권을 빌려왔다. 나는 무엇이 두려워 “나를 화나게 하지도, 괴롭히지도, 버리지도 않는” 책 속으로 도피하려 하는가.

  • <예술 도둑> | 마이클 핀클 | 생각의힘 | 1만 7,800원

[5]
<지도로 보아야 보인다>

“5개국 28개국의 세계를 120개의 화려한 지도로 읽는다.”

앞서 소개한 <예술 도둑>과 <지도로 보아야 보인다>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동진 평론가가 유튜브에서 추천한 책이라는 점이다. 이동진은 요즘 가장 영향력이 큰 ‘책 큐레이터’다. 그가 2023년 올해의 책으로 꼽은 <나는 메트로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이후 판매량이 급증하며 올해 상반기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한 권이 됐다. 평소 부지런히 읽고 좋은 책 추천해주는 사람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이동진만큼 꾸준히 부지런한 사람이 있을까. 내가 고른 책을 이동진도 골랐다니, 그것만으로 그저 영광이다.

표지에서부터 지도 한 장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다. 튀르키예가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 역할을 하고 있음을 한눈에 보여주니, 제목이 부끄럽지 않다. 저자 3인은 저널리스트, 지정학 박사, 지도 제작 전문가다. 그중 두 사람은 프랑스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에 방영되는 지정학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심지어 장수 프로그램이란다. 한국에선 10여 년간 신동엽과 유재석이 꽉 잡고 있는 황금시간대에, 프랑스 사람들은 저녁을 먹으면서 TV로 세계 지도를 읽는다. 예능은 나쁘고 교양은 좋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부러운 건 사실이다.

막상 책을 펼치니 읽기 전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 지도책을 기대했는데 글의 분량이 생각보다 많다. 지도 한 장을 읽기 위해 알아야 할 그 지역의 역사 및 이후의 정세 변화까지 구구절절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평소 국제 관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살짝 지루할 수도 있겠다. 솔직히 나도 중국, 일본처럼 익숙한 나라는 휙휙 넘겨가며 읽었다. 하지만 이 기회에 전 세계 나라들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훑고 싶다면 아주 유익할 것이다.

  • <지도로 보아야 보인다> | 에밀리 오브리 외 2인 | 사이 | 2만 9,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