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을 참았는데…이번엔 진짜 다르다” 남자 5000m 계주가 보여준 ‘금메달 설계도’

남자 5000m 계주는 한국 쇼트트랙에게 늘 특별한 종목이다. 개인전에서야 메달이 나오고 안 나오고의 문제지만, 계주는 자존심 그 자체다. 한때는 “한국은 계주로 끝낸다”는 말이 당연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문장이 과거형이 됐다. 그래서 ‘20년의 한’이라는 표현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번 밀라노에서 남자 대표팀이 준결승을 **전체 1위 기록(6분52초708)**으로 결승에 올려놓은 장면은, 단순히 “결승 진출”이라는 결과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준서(성남시청), 임종언(고양시청), 이정민(성남시청), 신동민(화성시청)이 만든 레이스는 ‘기세’가 아니라 ‘계획’에 가까웠다. 눈에 보이는 순위만 쫓는 게 아니라, 체력과 타이밍을 돈처럼 아껴서 필요한 순간에 한 번에 쓴 경기였다.

초반 39바퀴 남기기까지 4위에서 머문 선택은 겁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계주는 개인전처럼 ‘한 번 뚫고 끝’이 아니다. 앞에서 소모전을 벌이면 마지막 10바퀴에서 발이 묶인다. 특히 네덜란드, 일본, 벨기에가 섞인 조에서 초반에 괜히 몸싸움에 휘말리면, 넘어지는 건 순식간이고 구제도 장담 못 한다. 한국은 그 위험을 알았고, 그래서 “후반 승부”로 방향을 명확히 잡았다.

분위기를 바꾼 건 이준서의 예열이었다. 33바퀴를 남기고 3위로 올라서는 순간, 레이스의 공기가 달라졌다. “아직 안 쓴 카드가 있다”는 느낌을 트랙 전체에 던진 셈이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부터는 이정민이 사실상 경기를 뒤집었다. 25바퀴 남기고 연속 추월로 2위까지 끌어올린 장면은 ‘무리한 한 방’이 아니라, 상대의 흐름을 읽고 빈 공간을 파고든 ‘정석’이었다.

결승선 11바퀴 전 선두 탈환, 7바퀴 전 재역전은 더 인상적이다. 계주에서 선두를 빼앗는 건 어렵지만, 한 번 내준 선두를 다시 되찾는 건 더 어렵다. 상대는 “이제 한국이 썼다”고 생각하고 더 거칠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정민은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듯 다시 치고 들어갔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초반에 체력을 비축했고, 팀 전체가 같은 그림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부터는 신동민의 구간이 사실상 승부를 끝냈다. 계주에서 ‘격차 벌리기’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가장 위험한 임무다. 속도를 올리려는 순간, 바깥에서 밀리고 안쪽이 닫히면 부딪힘이 생긴다. 그런데 신동민은 흔들림 없이 2위 그룹을 떼어냈다. 그 격차가 마지막 주자 임종언에게 “지키는 경기”를 만들어줬고, 임종언은 여유 있게 1위로 결승선을 찍었다. 마무리가 깔끔했다는 건, 팀이 불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이번 계주의 구성은 ‘신구 조화’라는 말로 퉁치기엔 구체적인 장점이 많다. 이준서의 안정감, 이정민의 변곡점 능력, 신동민의 스피드 유지, 임종언의 마무리 집중력까지 역할이 겹치지 않는다. 좋은 팀은 누가 빠져도 돌아가지만, 더 좋은 팀은 “누가 어떤 순간에 무엇을 할지”가 선명하다. 이번 준결승은 그게 보였다.

결승 상대도 만만치 않다. 네덜란드는 기록이 0.0초 단위로 따라붙을 정도로 끈질기고, 캐나다는 마지막에 사고가 안 나면 언제든 치고 올라온다. 이탈리아는 홈 분위기를 등에 업고 과감한 승부를 걸 가능성이 높다. 결국 결승은 ‘속도 싸움’이라기보다 ‘리스크 관리’와 ‘타이밍 싸움’이 될 공산이 크다. 초반에 괜히 1등을 잡겠다고 몸을 쓰면, 마지막 5바퀴에서 그 이자가 돌아온다.

그래서 결승에서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오늘처럼, 조급해하지 말 것. 선두를 오래 잡는 게 목표가 아니라, 마지막에 선두로 통과하는 게 목표라는 걸 끝까지 잊지 말 것. 그리고 한 번 흔들리는 장면이 나오더라도 “계주에선 흔들림이 곧 끝은 아니다”라는 믿음을 유지할 것. 준결승에서 보여준 ‘재역전’은, 이 팀이 그 믿음을 이미 갖고 있다는 증거다.

20년은 길었다. 그 시간 동안 한국 남자 계주는 실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장면들을 여러 번 겪었다. 그런데 이번 준결승은 말이 다르다. 우연히 살아남은 레이스가 아니라, 준비한 대로 꿰맞춘 레이스였다. 결승까지 이 온도를 유지한다면, ‘한’이라는 단어를 드디어 과거형으로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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