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해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의 강박 [노동의 표정]

문종필 평론가 2024. 10. 1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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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텍스트 속 노동의 표정
6편 최지인 시인 2023년 작품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
경계에 서서 비극 얘기하는 화자
세상을 견디고 다짐하며 미래로
전쟁ㆍ부조리, 학살의 순간도 응시
불가능한 겹침 이행하는 작가 노력

많은 사람들이 내 가족, 내 자식, 내 식솔을 지키기 위해 노동을 한다. 어떤 이는 일터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고, 또 어떤 이는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을 강행한다. 어떤 방식이든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이런 행동은 노동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시대의 강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최지인 시인은 이런 사람들의 표정을 이야기한다.

현대인은 힘겨운 노동을 해야 생존할 수 있다.[사진=팩셀]

시인 김수영의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1966년)'에는 죄罪를 이야기하는 구절이 있다. 간략하게 말하면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건강한 개인도 그렇고 건강한 사회도 그렇고 적어도 자기의 죄에 대해서 몸부림"쳐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니,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말일 테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죄'를 짓고 부끄러워하거나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존재가 예술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대개 부끄러움과 관련된 감정을 품으며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부분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몸부림을 떤다. 그래서 죄송해하면서 사과하기도 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용서를 받아주지 않는 존재에게 용서를 받아달라고 강요할 순 없다. 누군가는 지은 죄로 인해 평생 죄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 그것이 비극일지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서글픈 인간의 운명이다.

최근 최지인 시인의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아시아ㆍ2023년)」를 읽었다. 이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화자가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사이'에 서서 자신이 서 있는 이곳과 저곳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에세이스트 양주안과 시인의 대화인 '우리는 함께 치솟았다가 함께 곤두박질쳤다'에 수록된 글에서 몇 자를 빌려오자면, "어떤 사건 앞에서 분노하지만 머지않아 잊고 살게 되죠(양주안)"라는 목소리와 "우리의 삶이 허무하게 끝날지라도 질문을 멈춰선 안돼요(106쪽)"라는 목소리에 담긴 '사이'의 속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 시집에서 화자는 힘겹게 세상을 견디고 다짐하며 미래로 나아간다. 동시에 저곳의 전쟁과 부조리, 학살의 순간도 응시한다. 그래서 여러 편의 시에서 자신의 흔적과 외부의 흔적이 혼종된 상태에서 파편처럼 시의 풍경이 흩뿌려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인 자신도 '저곳'의 풍경을 온전히 끌어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이런 혼종성이 시집 속에서 차이를 반복하면서 의도적으로 재생하는 듯하다. "이해한다는 말은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과 닮았다"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이해'를 넘어 불가능한 겹침을 이행하는 것이 작가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 겹침이 성공했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 작업에서 성공과 실패는 의미 없다. 자신의 상처가 아닌 타인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만큼 어려운 것은 없을뿐더러,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그렇다.

굳이 정답에 가깝게 이야기하자면 닿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닿을 수 없더라도 닿고자 하는 것이, 몸부림을 떠는 윤리적인 행위일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시집에 수록된 '청혼'을 읽어보자.

낮과 밤이 바뀌었다
네가 자는 동안 나는 뜬눈으로
참 부족한 사람이구나 쉽게 단정 짓고 너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청혼의 부분

아무래도 '청혼請婚'은 가장 사적인 영역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의 제목이 청혼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거라고 예상하는 것은 어리석다. 작가가 '청혼'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는 그런 모험을 즐기기보다는 사랑하는 당신에게 향하는 고맙고 미안한 감정을 담아 놓는다. 그러니 개인적인 고백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독자들을 위해 조금만 풀어 놓자.

당신은 일터에서 낮에 힘겨운 노동을 한다.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해야만 하는 날들도 많다. 아침 일찍 나가 저녁이 돼서야 들어온다. 화자는 그런 너를 조심스럽게 쳐다본다. 반면에 화자는 밤에만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것은 아마도 글 작업이겠다. 밀린 원고일 것이고,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각종 아르바이트일 것일 테다.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온 당신은 곧바로 잠들고, 그런 당신을 쳐다보면서 화자는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힌다. 스스로 "참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화자는 당신에게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한다.

하지만 다행히 지금은 과거보다 비참하진 않다. 지금은 그래도 살아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현실이 역설적으로 두려움을 품는다. "일하지 않으면/일할 수 없으면" "가난해져서 모든 것을 잃게 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이든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시인의 이런 마음은 노동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시대의 강박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이 작품 속의 화자는 두번 다시 "불운"해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적는다.

가장 행복할 때 불행을 생각하는 것처럼, 가장 화려할 때 죽음을 생각하는 것처럼, 꽃이 필 때 질 수밖에 없는 식물의 운명을 생각하는 것처럼, 화자는 불운해지면 안 된다고, 과거 자신의 잘못이 있다면 용서해 달라고 빌기도 한다.

시인은 저곳의 전쟁과 부조리, 학살의 순간을 응시한다.[사진=연합뉴스]

여기까지 이야기한다면 이 작품은 멋진 '청혼' 시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애쓰는 화자의 심정이 애틋하게 담겨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흐름 속에 앞서 이야기한 '그곳'의 비극이 낮은 구름처럼 밀려온다. "전쟁과 학살/가장 먼저 희생당할 일개 시민들"이 '청혼'을 노래하는 자리에 슬며시 다가온다. "나와 나 아닌 것과의 투쟁"을 응시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최지인 시인은 다가갈 수 없는 대상에게 다가갈 수 없지만 도달해 보려는 자신의 표정을 솔직하게 적어 놓는다. 세계의 모든 아픔을 공감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애써보려는 마음 자체를 담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적어도 저곳의 아픔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으니 그렇다.

시인은 자신의 불안한 미래와 끔찍한 불안을 겪고 있는 저곳의 다른 존재들과 교감하려고 애쓴다. 아마도 이 방식은 "무지로 미지를 뚫고('신세계')" 나가는 방식이겠다. 오랜 시간 "달마다 갚아야 할 돈을" 헤아려야 했던 시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시인의 몸부림과 이런 괴로움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야 하는 당신을 응시하는 것일 테다. 아마도 이 감정은 그에게 미래의 방향을 제시해 줄 것 같다.

문종필 평론가 | 더스쿠프
ansanssun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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